오시영의 세상의 창-황희순 시인의 “수혈놀이”, 새로운 변화가 밀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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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황희순 시인의 “수혈놀이”, 새로운 변화가 밀려오고 있다
  • 오시영
  • 승인 2020.06.0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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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오시영</strong>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6월, 여름으로 접어드는 태양은 뜨겁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에도 나뭇잎은 빛을 발한다. 반면에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태양 앞에서 힘들어 한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의 버팀이 살아 움직이는 것들보다 훨씬 강한 계절, 그게 유월이다. 유월은 그렇게 왔다. 21대 국회도 그렇게 태양처럼 뜨겁게 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21대 국회가 개원될지 아직은 미정이지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6월 5일 국회 개원을 기정사실로 하여 국회 개원 신청서를 제출하였으니 개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야당인 미래통합당이 상임위원장 배분 문제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협상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만, 여당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177석 다수 의석의 힘을 그대로 발동시킬 태세를 보이고 있다. 관례, 관습은 오래된 관행이 하나의 규범으로 작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어떠한 관례나 관습도 모두 시대 변화에 따라 각각 달라질 수밖에 없다. 관례를 존중할 필요도 있지만 관례에 발목 매일 필요도 없다.

관례는 언제나 새롭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177석의 다수당을 만들어 준 국민의 순수이성은 더불어민주당이 중심이 되어 국정을 이끌어가라는 지상명령을 내린 것이라 하겠다. 더불어민주당은 책임정치 구현이라는 국민적 요구, 달라진 세상의 가치를 그대로 실천할 용기와 신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미래통합당이 먼저 변해야 한다. 84석, 미래한국당을 포함하여 103석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볼 필요가 크다. 150명일 때나 120명일 때나 103명일 때나 모두 똑 같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산이지 않겠는가? 아무리 옳은 소리를 들려줘도 듣지 않으려 귀를 막고 있으니 그것도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황희순 시인의 “수혈놀이”라는 산문시를 본다. “처음부터 우리 사이엔 날선 칼이 놓여있었지 서로를 넘나드는 발자국에 피가 묻어났지 나란히 누워 마주보면 이빨 사이로도 피가 스몄지 그 피 서로 핥아주며 낄낄거렸지 손만 잡아도 상처가 환히 피었지 너의 외로움과 나의 즐거움이 부딪치면 불똥이 튀었지 둘이 머문 들판은 언제나 축제장이었지 불꽃 낭자한 축제에 정신이 팔려 피를 몽땅 낭비해 버렸지 우린 껍질만 남아 밀려다니다 사라졌지 살고살고 또 살아도 어김없이 혼자라도 다시 살고 싶어지는데 12월, 오래 숨겨두었던 마지막 남은 피를 꺼냈지 새싹이 봄에만 돋는 건 아니지” (전문, 시집 ‘수혈놀이’ 수록, 애지 2018 간)

“수혈놀이”는 어찌 보면 아주 난해해 보이지만, 어찌 보면 아주 현실적인 시다. 모든 관계에 “날선 칼”이 놓여 있는 게 우리 인생이다. 세상살이이고 정치판이라 하겠다. 동지인 것 같기도 하고 적인 것 같기도 한, 분명한 것 같으면서도 애매모호한 관계 속에서 우리 인간은 현실과 공간세계 사이를 넘나든다. 황희순 시인은 “수혈놀이”를 통해 생명을 중심에 놓고, 목숨을 판돈으로 내어놓고 승패를 벌이는 인간의 적나라함을 꿰뚫어 관통하려 한다. 서로를 넘나드는 발자국에 피가 묻어난다는 황희순 시인의 저 지적질은 마치 여야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21대 국회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분명 선의로 서로를 넘나들지만, 결국은 발바닥에 피를 묻히고 마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서로 마주 보고 누웠지만, 실상은 이빨 사이로 피를 흘리고 있는, 서로의 피를, 서로의 생명을 갉아먹는 고통제공자이지 고통수혜자인 이중적 인간 삶의 모습을 반추케 한다.

지난 2일, 검찰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5촌 조카 조범동 씨에 대한 형사재판 구형 과정에서 뜬금없이 조국 전 법무부장관에 대한 수사 의의를 밝혔다. 조국 전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는 “살아 있는 고위 권력층에 대한 검찰의 견제 기능의 작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의해 자행된 국정농단 사태를 끌어들여 “국정농단 사건은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의 신속한 견제 기능이 발동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다면서, 조국 전 장관에 대한 수사는 “우리 사회, 특히 언론이 제기한 의혹에 대하여 신속 대응하여 실체적 진실에 상당 부분 다다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러한 검찰의 주장은 자기중심적인,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여 재고할 가치조차 없다는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당시는 조국 장관이 법무부장관에 임명되기 전이어서 고위층에 의한 “권력형 비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객관적 상황이었음에 비추어 그렇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정경심 교수에 대한 공소장 내용이 7,8년 전에 있었던 동양대 총장 표창장 위조를 둘러싼 범죄 혐의였으니, 위 검찰의 주장이 더 황당하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황희순 시인은 말한다. 서로가 흘리는 피를 서로 핥으며 낄낄거리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손만 잡아도 상처가 환히 피어난다고. 결국 검찰은 위의 구차한 변명 외에는 조국 전 법무부장관에 대한 수사 동기나 원인을 제시할 수 없다는 자기 고백을 하고 말았다. 저러한 구차한 변명밖에 할 수 없는 사유로 자신들의 상관이 될 법무부장관 내정자를 흠을 내려 거의 발악에 가까운 수사권 남용행위는 자신들의 치부만 환히 드러내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서초동 사거리 촛불십자가로 평가되는 그날의 국민적, 시민적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전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이 “국가 권력에 대한 신속한 견제”를 하겠다는 발상이야말로 참으로 비상식적인, 비정상적인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권력, 행정부 권력은 국민에 의해, 국회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임에도, 감히 행정부의 1개 외청에 불과한 검찰청이 국가 권력에 대한 신속한 견제를 하겠다는 발상은 참으로 분수를 몰라도 한참 모른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교만이자 월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황희순 시인은 말한다. “너의 외로움과 나의 즐거움이 부딪치면 불똥이 튀었지 둘이 머문 들판은 언제나 축제장이었지”라고. 처음에 검찰이 조국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를 기소했을 때는 촛불시민을 향해 “너의 외로움이여, 자지러들어!”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나의 즐거움이 언제나 축제장!”이었다고 자축했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스스로 축제장에서 밤 지새는 줄 모르고 춤추는 주인공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제 서서히 새벽이 밝아오면서 시계의 째깍거림이 무서운 천둥소리로 변해가고 있음을 실감하며 초라한 비명을 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황희순 시인이 말하듯 “불꽃 낭자한 축제에 정신이 팔려 피를 몽땅 낭비”해 버린 뒤끝이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볼 일이다. 내부적으로 검찰은 다음 달에 발족하는 고위공직자수사처를 엄청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한 번도 공격의 대상이 되어 본 적 없는 검찰이 드디어 공수처에 의해 수사의 객체로 전락될 수 있다는 위기감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황희순 시인은 말한다. 우리 인생이, 축제장에서 삶을 탕진해 버린 껍질만 남은 인생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밀려다니면서도 “살고 살고 또 살아도 어김없이 혼자라도 다시 살고 싶어지는 마지막 순간”을 맞게 되면 마지막 새싹 돋을 봄을 기다리지 못한 채 “마지막 피를 꺼내어 12월, 바로 지금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다. 수혈놀이의 끝은 결국 말 그대로 끝이다. 아주 간단한 셈법이다. 수혈놀이는 생명을 살리는 생명놀이라며 서로의 피를 꺼내 주고받으며 낄낄거리지만, 축제장에서 낭비하고 또 낭비하지만, 결국 탕진된 삶은 “혼자라도 다시 살고 싶어지는 12월”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마치 검찰의 잘못된 권력행사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마지노 선 앞에 거대한 벽이 나타나고 있는 형국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마침내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뇌물 수사과정에서 검찰의 증인 회유 내지 강압에 대한 조사를 검찰에 하명하였다. 한만호 씨의 비망록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당시 한만호 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회유와 강압에 못 이겨 한명숙 전 총리에게 9억 원의 뇌물을 주었다고 진술하였다며 재판과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그러한 진술은 모두 진실이 아니며, 검찰의 회유와 강압에 어쩔 수 없이 거짓 진술한 것이라며, 뇌물을 준 사실이 없다고 밝혔고, 그러한 전 과정을 소설 한 권 분량인 1,200페이지의 비망록에 기록하였음은 정황상 신빙성이 대단히 높다고 하겠다. 거짓을 1,200페이지에 걸쳐 장황하게 묘사하는 것은 전문 소설가도 쉽게 하지 못한다. 무언가 진실을 말하고 싶었기에, 감방이라는 불리한 조건밖에 없는 장소에서 외롭지만 용기 있게 한 줄 한 줄 써 내려 간 것을 함부로 폄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비망록을 써서 자신이 얻을 이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정신 나간 이가 아니라면 아무런 이익이 없는데, 아니 오히려 불이익만 눈앞에 예상되는 비망록을 남길 수가 없다.

거기에 또 다른 두 명의 증인이, 당시 검찰측 증인이었던 두 사람이 자신들 역시 한만호 씨처럼 검찰의 회유와 강압에 못 이겨 허위증언을 하였다며 한 명은 두 달 전에 법무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다른 한 명은 뉴스타파의 인터뷰를 통해 허위증언을 하였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이미 망인이 된 한만호는 비망록을 통해, 다른 두 사람 역시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진정서와 인터뷰를 통해 “한명숙 전 총리 재판에서 검찰의 회유와 강압에 의해 거짓 모해증언”을 하였음을 고백하고 있음은 결코 쉽게 보아 넘길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수사팀의 조직적이고 즉각적인 반론이 쏟아지고 있음은, 어찌 보면 이상하다 할 정도의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 오히려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

6월의 첫 주는 이렇게 뜨겁게 흐르고 있다. 저 세 명의 증인이 한 목소리로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세상의 듣는 귀가 열렸다!”라는 안도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은 주장을 했다가 자신들이 불이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서 벗어난 상태, 우리가 진실을 말하면 세상이 자신들의 말에 귀 기울여 줄 것이고, 자신들을 검찰의 무서운 칼날로부터 지켜 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만큼 우리나라가 변하였다고 할 수 있다. 21대 국회의 개원은 그러한 시대정신 속에서 열리는 선진 국회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정권 투쟁일 것 같고, 미래통합당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는 다수당의 횡포라는 비판이 강하게 대두할 것 같지만, 변해버린 세상은, 수혈놀이의 뒤 끝에서 마지막 12월을 경험해 버린 국민들은 177석 거대 여당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것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다. 바다 건너 저 멀리 미국 땅에서는 백인 경찰의 한 흑인에 대한 목누름 과잉진압으로 인한 사망사건으로 촉발된 시민들의 평화시위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자국민을 상대로 전쟁하듯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을 행사하고 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시위가 과열되어 일부 상점이 약탈되는 등 무질서로 치닫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전 국민 마스크착용시대, 현명한 거리두기시대, 마스크 안에서 침묵을 지켜도 질서가 지켜지는 시대를 공고히 하고 있다. 자꾸 선진국이 되어 가고 있다. 황희순 시인이 말하듯 “우리 모두는 서로의 사이에 칼 한 자루씩”을 감추고 있지만, 그래서 적과 아군의 분별이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탕진된 삶을 되돌아보며 봄에만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살고살고 또 살아도 어김없이 혼자라도 다시 살고 싶어지는 12월”에도 꽃이 핀다는 사실을, 그래서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피 한 방울이 꽃을 피우는 생명수로 사용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함을 우리 모두 깨달았으면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다수 여당의 중지를 모아 정상적인 국회 개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를 확보하여 진정 국민의지를 집행하는 21대 국회가 되었으면 한다.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 이미 177석 당선이라는, 국민의 순수이성이 결과로 증명되지 않았는가. 검찰의 조범동 씨 마지막 공판법정에서의 구차한 변명을 들으며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황희순 시인의 “수혈놀이”를 통해 “철철 피 흘리는 마지막 투쟁”이 죽음을 향해서가 아니라 한 송이 꽃을 피우는 생명을 향한 투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말 6월, 여름으로 접어드는 태양이 뜨겁다. 그래 더 뜨거워라!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학장 / 변호사 / 시인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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