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봄꽃, 코로나19, 종교개혁, 총선, 반전의 페르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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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봄꽃, 코로나19, 종교개혁, 총선, 반전의 페르마타
  • 오시영
  • 승인 2020.04.03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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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오시영</strong>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봄꽃이 천지를 진동시킨다. 저 향내 나는 봄꽃들이, 저 연약한 봄꽃들이 겨우내 얼었던 대지를 뚫고, 말랐던 나뭇가지를 뚫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 맛있는 꿀을 생산해내는 것, 하나하나 헤아려보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인간들은 코로나19사태로 죽느냐 사느냐 전전긍긍하며, 모든 일상을 포기한 채 생존의 문제에 함몰되어 있는 이 순간, 꽃들은 인간들이 무엇을 하든 관심 없다며 제 할 일만을 묵묵히 하고 있다. 봄이 되니 꽃을 피워야 하고, 향내를 발해야 하고,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치장해야 한다며 자기 소명에 충실하며 세상을 차가운 겨울에서 따뜻한 봄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21대 총선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14일간, 선거열전이 전국을 강타할 것이다. 20대 총선과 다른 양상의 선거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코로나19사태가 그 전환의 변곡점을 가르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왁자지껄 소란을 피우던 선거운동방식이 사라지고, 유튜브나 인터넷 온라인 매체를 이용해 선거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밀히 찾아가는 고급화된 선거운동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자신을 알리는 방식이 전자화되며 이름 석 자 알리면 되던 허세의 시대에서 알찬 콘텐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진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거짓을 주장하면 곧바로 진실로 박살을 내고, 이미지를 아무리 포장하려 해도 과거의 행적이 그대로 켜켜이 쌓여 진실을 보여주는 선거판이 도래하고 있다. 마스크, 코로나는 우리 모두에게 마스크를 강요하지만, 선거판에서는 가면 아닌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선거는 시대의 변환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코로나사태는 정치권에도 커다란 변혁을 요구하지만, 교육계와 종교계에도 커다란 관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코로나사태로 인해 개학이 전면적으로 연기되고, 일부 학부형들의 요구와 학사 일정상 어쩔 수 없이 교육부와 교육청은 4월 9일에 고등학교 및 중학교 3학년들의 개학을 시작으로 점차적으로 개학의 범위를 넓혀가기로 결정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개학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할 것인지 여부이다. 만에 하나 아무리 방역에 철저를 기한다 하더라도 활동량이 어른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청소년들의 수많은 접촉과정을 통해 코로나 감염 학생이 발생하게 된다면 이는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학부형들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집안에 혼자 방치해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학교로 등교시키자니 또 다른 감염의 위험에 무방비 노출이 되어, 어느 쪽이 현명한 선택인지 헷갈리기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필자는 이번 기회를 통해 무엇보다도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 어린이집에서부터 대학까지, 대학입학이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아이들을 일사분란하게 학교와 학원으로 내몰아온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이 과연 옳은 방법이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아이들은 코로나사태로 인해 개학이 늦어짐에 따라 학사일정에 차질이 빚어져 학습진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간 동안 그래도 아이들이 공부에 찌들지 않고 어느 정도 자유로운 여가활동을 할 수 있었음은 어느 때 아이들이 가져보지 못한 자유였지 않을까 하는 반가운 생각마저 든다.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조금은 여유롭게 살아도 되는 세상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악착같이 살도록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 왔는지 우리 모두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종교계도 이번 기회에 “신의 본질”에 대한 자기 성찰의 시점(視點)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던 예배의 획일화 내지 습관적 예배 태도에서 한 발 나아가 종교의 본질이 무엇이고, 존재론적 신의 본성을 어떻게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인지라는 근원적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반복적, 습관적 예배의 단절에서 오는 금단현상을 두려워해 방역행정의 일환으로 내려진 종교집회의 자제를 종교 탄압이라는 비상식적 프레임으로 반전을 꾀하다가 오히려 사회적 역풍을 맞고 있는 형국이다. 반복적, 습관적 예배에 참석해 오던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예배적 공백기간을 통해 “참으로 편하다”라는 생각들을 많이 할 것이다. 예배참석횟수가 줄고, 기도하는 시간이 줄고, 사회에 봉사하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기다 보니 육체적 피로도가 풀리면서 참으로 편하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실재로 그렇게 말하는 일부 신자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으니,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종교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19사태는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문제를, 신앙의 문제를, 신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과학문명의 발달 속에서 신천지교회와 같은, 맹목적 종교집단이 기승을 부리는 이상현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지엽적 문제에서부터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각 종교지도자들은 종래의 종교시스템 안에 안주하며 코로나19사태가 진정되면 도로 예전의 종교시스템으로 복원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면 큰 오산에 빠질 공산이 크다. 급격한 종교의 추락현상이 머지않아 현실화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신의 존재가 코로나19사태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는 현상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종교계가 이러한 종교의 교세 추락을 멈추기 위하여 신도들을 집단으로 모아 예배드리기를 강행하게 되면 그 안에서 다시 집단적 감염상황이 발생하여 다시 종교가 사회로부터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1347년에 발병하여 1351년까지 이어졌다는 유럽의 흑사병 유행은 유럽 인구 3분의 1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흑사병으로 인한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럽인들은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가톨릭성당에 모여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고, 이 회집을 통해 오히려 집단감염이 이루어져 흑사병이 창궐하는 모순된 결과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종교 중심지의 하층민인 농노들이 감염을 피해 유럽 중세 도시에서 도망치게 되고, 이로 인해 중세시대의 장원경제가 붕괴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원래 흑사병은 지금의 코로나19처럼 중국에서 발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흑사병이 몽골제국이 다져놓은 동서교역로를 통해 전 세계로 퍼짐으로써 중국, 인도, 이집트 등지에서도 유럽 못지않은 흑사병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결국 유럽의 흑사병은 유럽의 가톨릭 종교계를 황폐화시켰고, 그런 와중에 신의 존재가 무력화되면서 “인본주의사상”이 발원하면서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하였다 하겠다. 거기에 과학문명의 발달, 즉 항해술의 발달로 신대륙이 발견되고, 지동설의 등장으로 종교계의 중심축이었던 천동설이 무너지면서 종교의 권위가 추락하고, 종이와 인쇄술의 발달로 지식습득의 보편화가 가능하게 되면서 특권계급만의 교육이 일반화되면서 르네상스, 문예부흥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종교계가 급락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번 코로나19사태는 중세 흑사병 창궐 이래 현대 종교계에 가장 커다란 위험으로 기능하게 될 공산이 크다. 이미 신의 무소불위, 전지전능의 역할을 IT가 대신하는 세상이 되었다. 거대 슈퍼컴퓨터시대를 맞이하며 모든 데이터가 자료화되면서, 신이 기록한 원죄의 살생부가, 심판기록책이 구글의 백테이터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동력을 상실하게 된 종교의 본질적 권위가 어떠한 방법으로 회복되어 침몰한 인류의 영성을 다시 불러 일으켜 세울 것인가 하는 근본적 고민을 종교지도자들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흑사병의 후유증과 르네상스의 번창 속에서 인본주의에 사로잡힌 인간의 교만이 극에 달할 때 독일 사제 마르틴 루터는 16세기 초에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의 종교개혁 반박문을 게시하여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그를 이어 칼뱅은 유럽 각지로 종교개혁의 전파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가톨릭 교계의 치부를 드러내고, 종교의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며 새로운 교리의 정립을 통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치관을 창출해 내는데 앞장섬으로써 죽어가던 종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첨병 역할을 수행하였고, 그렇게 다시 재정립된 종교는 사회적 등불이 되어 도덕과 윤리, 사회적 가치 척도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로세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 교계, 특히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계는 코로나19사태를 통해 어떻게 종교가 거듭날 수 있을 것인지 새롭게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현대사회에 어울리는 종교적 가치체계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 진지하게 토론하고 연구하고 기도하여야 한다. 21대 총선을 통해 정치계에는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선거제도가 바뀌고 코로나사태를 진정시키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치지도자들의 덕목이 어떠해야 하며, 어떠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지 국민들이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반대만을 위한 반대가 최선의 길인지, 아니면 밤잠을 설쳐가면서까지 방역과 치료에 매진하며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고, 한 사람이라도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진력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 국민들이 점차 보고 듣고 깨닫고 있다.

이번 코로나19사태 극복과정을 통해 우리사회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으로 예상된다. 극복 전후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허구에 가득찼거나 실속 없는 거대 담론의 추구에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고, 진정한 이웃이, 친구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것이고, 무분별한 소비패턴이 지양되고 실질적인 가치 추구의 가치기준이 새롭게 정립될 것이다. 그러면서 소소한 행복들이 모여 진정한 거대 담론을 만들어내는, 귀납법이 아닌 연역법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다. 학교 교육 역시 온라인 중심의 새로운 교육체계가 보편화되는 계기가 될 것이고, EBS 같은 교육기자재의 활용범위가 확대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모이지 않는 종교, 예배드리지 않는 예배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예배당 없는 일인 목사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예를 들어 김동호 은퇴목사님 같은 설교 유튜브의 일상화 같은 종교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것이다. 종교지도자의 행함에 본받을 점이 있고, 말씀에 진정성이 있으면 신앙을 갈망하는 수많은 이들이 그러한 개별 유튜브 설교에 빠져들 것이다. 이럴 때 기존의 방식에, 기존의 권위주의에 안식하게 되면 흑사병 이후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를 통해 종교가 함몰하듯, 그래서 다시 종교개혁 시대를 맞이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교세 분열의 발단이 되어 세속의 국가권력 앞에 종교가 무릎꿇는 카놋사의 굴욕 같은 중세 유럽의 역사가 그대로 현대사회에서 되풀이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코로나(corona)에는 왕관(crown)이라는 뜻과 페르마타(fermata)라는 뜻이 있다. 왕관, 왕의 권위, 즉 세상의 부와 권력을 함께 누리는 왕의 절대권적 의미가 숨어 있는가 하면, 음악에서 늘임표 또는 쉼이라는 의미도 숨어 있다. 음표나 쉼표 위에서는 늘임표로 쓰이는 페르마타가 세로줄 위에서는 쉼이라는 명령 부호로 쓰인다. 문학에서는 반전(反轉)쯤으로 사용되는 표현기법이다. 코로나가 이렇게 음악이나 문학에서 극적인 “늘임과 쉼” 또는 “반전”의 복합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실제 코로나19사태는 우리에게 기존의 가치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체계의 정립의 물꼬를 트고 있다. 이 변화의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어떠한 가치기준을 세워 나갈 것인지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그 바로 눈앞에 21대 총선거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촛불혁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대통령 정권 교체 3년만에 입법부에 대한 새로운 시대의 첫 문을 열려고 한다. 지난 3년 간 진행되어 온 촛불혁명의 기운을 품어 온 문재인 정권이 옳았는지 아니면 무능하고 과욕이었을 뿐인지를 국민이 심판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어느 쪽이 승리할지 알지 못하지만, 뚜껑이 열리는 날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제시될 것이다. 빛으로 나아갈지 어두움으로 나아갈지 정해질 것이다. 코로나는 반전이다, 늘임이다, 쉬어감이다. 놀라운 변화이다. 코로나19사태의 모든 피해자들에게 반전의 기쁨이 넘쳤으면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참이지만, 그래도 나가서 꽃향기를 맡으라. 기쁠 것이다. 기뻐야 몸도 건강해지고 마음도 건강해지고, 사회도 건강해지지 않겠는가.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학장 / 변호사 / 시인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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