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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황교안의 이율배반, 윤석열의 후회막급, 신수현 시인의 “돌멩이는 물이 없어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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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황교안의 이율배반, 윤석열의 후회막급, 신수현 시인의 “돌멩이는 물이 없어도 산다?”
  • 오시영
  • 승인 2019.12.20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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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세상의 모든 경계는 모호하다. 그러면서도 분명하다. 분명과 모호의 경계에 인간이 있다. 그런데 분명과 모호의 경계선이 유동적임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고정된 경계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경계선이 사람에게만 다가오면 모두 무너지는 까닭이다. 내게 분명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모호하고, 내게 모호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분명하다. 그것은 경계선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네 땅과 내 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분쟁의 중심부에는 이처럼 다른 경계의 꼭짓점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아무리 분명하다고 외쳐도 모호한 것이고, 모호하다고 외쳐도 분명한 것이다.

최근 들어 분명과 모호의 경계선을 부지런히 넘나드는 두 사람이 있다. 바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윤석열 검찰총장이다. 황교안 대표는 공안검사시절 국가보안법 해설서와 집회시위법 해설서를 출간한 적이 있다. 공안검사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신으로 존중(?)받던 시절인 1998년에 “국가보안법 해설”이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다시 2011년에 “국가보안법”이라는 책을 수정ㆍ보완하여 출간하였다. 객관적 입장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한 순수한 법률적 해석을 시도하였다고 소개되고 있으나, 상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2009년에는 “집회ㆍ시위법 해설”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에서 “야간의 집회ㆍ시위는 주간 집회ㆍ시위보다 질서 유지가 상대적으로 어렵고, 따라서 그만큼 공공의 안녕질서에 해를 끼칠 개연성이 높다.”며 야간집회ㆍ시위의 금지가 합헌이라며 긍정적 태도를 보였지만, 그다음 해 야간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던 집시법 제10조는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불합치판결을 받아 위헌임이 밝혀졌다. 시대에 뒤떨어진 헌법정신을 소유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집시법은 국가기관인 국회 100m 이내에서의 시위를 금지하는데, 황교안 대표는 지난 18일 지지자들과 함께 국회 경내로 무단 침입하여 패스트트랙 입법을 막아야 한다며 불법시위를 격렬히 전개하면서 “결국 어제 국회가 못 열렸죠? 국민의 힘이 막은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합시다. 자유 대한민국 살려냅시다. 부강한 우리나라 만듭시다. 같이 합시다.”라고 지지자들을 향해 외쳤다. 시위 참가자들이 일부 국회의원들의 국회 출입을 막고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침을 뱉거나 욕설을 퍼붓는 등 난장판 불법시위가 횡행하였다. 그 중심에 황교안 대표가 있었고, 그의 그러한 행동은 위 국가보안법이나 집시법 해설서에서 그렇게 비난하던 불법시위를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스스로 불법집회 및 시위를 저지르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요즘 점점 확신범이 되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평생 기독교의 교리적, 교조적 신앙생활에 깊이 빠져 교과서 같은, 바리새인 같은 신앙생활을 해온 데다가 수십 년 공안검사로 다져진 편협된 사고방식이 드디어 정치인으로 변신한 지금 구체적 행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면서까지 이루려고 한 인간에 대한 사랑 베풂이 결여되어 있어 문제이다. 그러니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복지정책을 확대하고, 무상교육과 무상의료의 범위를 확장하며, 어르신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들이 모두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적 행태로 인식되어 맹목적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본심은, 정책 방향의 본질은 모든 국민이 골고루 잘 사는, 그래서 공정과 공평이 일상화되어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이들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사회의 한정된 파이를 가지고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기 위한 재원마련을 위해 조금 더 많이 가진 이들이 양보하고 조금 적게 가져도(이미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 쓸 재력을 가졌으니까) 되지 않겠느냐는 순수한 마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황교안 대표에 관해 언급한 “황교안 2017”에 보면 황교안 대표가 어렸을 때 부친이 이북에서 내려와 고물상을 하여 경제적으로는 중하 정도의 생활을 하였는데, 본인 입으로 부친과 모친의 고향이나 출신 배경 등에 언급한 적이 없어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에게 수식어처럼 따라붙은 모범생이었다거나,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 점은 체제 순응의 규범력이 뛰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맹점이 바로 인간미가 없다는 점이다. 반면에 문재인 대통령의 학창시절을 언급한 기록들을 보면 고등학생 때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되어 혼이 나기도 하고, 학교 출석을 안 하고 수업을 빼먹기도 하는 등 불량학생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친구들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며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키워 왔음을 알 수 있다. 서로 기질이 완전히 다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불량학생처럼 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사람을 살리고 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고 동분서주하고 있고, 모범학생처럼 보이며 법대로 외쳐대며 모든 민주화를 갈망하던 시민들이 치를 떨던 국가보안법과 집시법에 대한 해설서를 내면서까지 두 강압적ㆍ폭력적 억압법들을 어떻게 잘 적용해야 하는지 그 적용 기술과 해석을 통한 완벽한 통제시스템을 구축하려 했던 황교안 대표는 정치인이 되더니 오히려 집시법을 대놓고 위반하는 불법집회의 선동자가 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 검찰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의 표창장 위조사건에 대해 조 장관의 청문회 날 소환조사 한 번 없는 위조사문서행사 등의 죄로 불구속으로 기소하더니, 그 후 추가수사를 통해 취득한 수사자료로 범죄일시와 장소, 범죄수법이 완전히 다른 공소사실로 공소장을 변경신청을 하였다가 재판부로부터 호된 질책과 함께 공소장변경불허결정을 받자, 별도로 공소를 제기하여 하나의 범죄 사실에 대하여 두 번의 공소제기라는 우리 사법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검찰권 남용의 잘못을 저질렀다. 공소장에는 공소사실, 즉 피고인의 범죄사실과 적용법조가 기재되어 있는데, 공소사실을 특정하는 것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과 재판부의 재판 범위를 특정하기 위한 형사소송법상의 대원칙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범죄에 대하여는 하나의 공소장만 있어야 하는데, 검찰이 범죄사실이 분명히 하나인 위조사문서행사 등의 죄에 대하여 두 개의 공소를 제기한 것은 동일한 피고인에 대하여 두 번 재판받게 하겠다는, 다시 말해 밉보인 국민을 괴롭히겠다는 인권 유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검찰은 두 번째 공소를 제기하면서 변명하기를, 첫 번째 공소사실이 기각되면 이를 항소하여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 공소장 변경 허용의 한계. 즉 동일한 범죄사실의 특정성을 어디까지 인정하여 공소장변경을 허용할 것인가의 기준을 잡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은 검찰권의 횡포일 뿐이다. 다시 말해 만일 항소심, 대법원에서 공소장 변경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판결이 나면 다시 1심에서 공소장변경을 허가하여 재판을 진행하면 되고, 만일 공소장 변경이 허용되지 않으면 그 범죄사실에 대하여는 다시 공소제기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검찰은 두 사건이 같은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판결의 일사부재리원칙, 즉 전문용어로 “동일한 범죄사실에 대한 기판력”으로 인하여 두 번째 공소제기가 허용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들 입으로 두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라고 해 놓고, 첫 번째 사건에 대하여 공소장 변경이 불허되면 결국 그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범죄사실)은 일시와 장소, 범행수법 등이 모두 틀려 무죄판결이 날 수밖에 없고, 무죄판결 난 사건에 대하여는 다시는 공소제기를 할 수 없는 것이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데, 현재 윤석열 검찰은 이를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위반하여 형사소송법과 국민 인권을 희롱하고 농락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검찰권의 남용으로, 직권남용의 전형적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법시험에서 아홉 번 실패한 것으로 알려진 윤석열 총장은 초임검사 시절부터 나이 어린 학교 후배들을 상관으로 모셔야 하는 조직생활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학교 선배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선배 기수 검사들을 후배 취급하면서 그들을 우습게 아는 습성이 키워졌을 것이다. 연장자 우대라는 한국사회의 장유유서 사상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을 사회에서 그렇게 키워진 보스 기질이 결국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후 아무런 제한 없이 검찰권을 행사하게 되다 보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검찰의 칼을 휘두르는 위험한 결정을 너무 쉽게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것이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자기가 검찰총장이 되어 최고의 검찰권 행사자가 되었는데, 뒤늦게 대학 후배인 조국 교수가 상관인 법무부장관으로 내정되자 그 새로 생긴 멍에를 견디기 힘들어하며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에 그의 임명을 거부해야겠다는 내부 의사가 형성되고, 구체적 제거행위로 조국 교수에 대한 엉뚱한 수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압박수단으로 정경심 교수를 무리하게 기소하게 되었는데, 조국 교수가 예상과 달리 사퇴를 하지 않고 임명되자, 자기의 소신이 명백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리한 수사가 계속 이어지는 현재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오해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검찰권의 행사가 모든 것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검찰지상주의에 함몰되어 살아온 황교안 대표와 윤석열 총장의 무리한 현재진행을 지켜보며, 이러다 정말 큰 탈 나겠다 우려스러운 것이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이럴 때 국민도 함께 열을 받으면 건강에 해로워서 마음을 추스르는 좋은 시를 읽으면 좋지 않을까? 등단 20년 만에 아껴 두었던 시를 모아 첫 시집을 출간한 신수현 시인의 “돌멩이는 물이 없어도 산다?”라는 시를 읽어보자. “냇가에 가면 물보다 돌들이 먼저 보인다/ 둥글고 모나고 크고 작고 검고 푸른 것들/ 지느러미를 달고 꼼지락거린다/ 요놈 요놈, 눈에 들어오는 것들/ 내 욕심대로 함부로 잡아 온 것들/ 책상 위 쟁반에 옹기종기 갇혀 있다/ 가끔 그것들을 보면 미안하다/ 보내 줘 보내 줘 헤엄치고 싶어/ 보채고 칭얼거리는 소리 들린다/ 푸석푸석한 형광등 불빛아래/ 정전기를 뿜어내는 컴퓨터 화면 속에/ 날아들고 날아가는 글자 글자들/ 제 생각만 읽으라는 전화기 속 목소리/ 책을 깔고 엎드려 낮잠 자는 일도/ 나무 위로 치솟는 새들의 날개짓도/ 만나는 바람마다 바꾸는 구름의 얼굴도/ 잃어버리고 자꾸 목이 잠겨드는 것/ 재잘거리던 소리 사라져 버린 것/ 숨 막히지 쟁반에 물을 채워 주기나 하면서/ 나도 그것들을 놓아 주지 못하고 있다/ 나도 돌멩이처럼 숨 쉬고 있다/ 햇살 끓는 계곡의 물속으로/ 지느러미를 달고 뛰놀 수는 없는 거지/ 마른침 삼키며 눈 깜박이며 물속 꿈꾸고 있다” (전문, ‘개밥바라기와 눈 맞추기’에 수록, 실천문학사, 2019).

특별한 해석이 없어도 독자들이 읽으면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시이다. “돌멩이는 물이 없어도 산다?”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모두 단단한 돌멩이가, 물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돌멩이가 물을 만나 어우러짐으로써 또 다른 생명력, 사랑을 갖는다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을 그대로 느끼게 된다. 육십이 넘은 시인의 눈에 비치는 모든 세상은 돌처럼 단단해 보여 답답해하다가도 그 속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을 생명, 변화를 찾아 “마른 침 삼키며 눈 깜박이며 물속 꿈꾸는 소녀”가 되는 순수한 영혼이 느껴지는 시라 할 수 있다.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의 마음속 사심 가득 찬 탐욕을 보며, 국가공권력의 정당한 행사를 주장하는 외관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의 첫 번째 판단이 정당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집착과 오기의 광기가 국가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되는 것을 지켜보며, 결국 탈이 나겠구나 싶을 뿐이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고, 계속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자니 더욱 살아날 길은 없고, 그냥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신수현 시인은 말한다, “나도 돌멩이처럼 숨 쉬고 있다.”라고. “사랑”마저 내 욕심대로 함부로 잡아 온 것들이라는 신수현 시인의 “사랑마저, 저 놓아주고 싶은 마음”이 되는 삶에 대한 존경심과 “나도 그것들을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 삶에 대한 연민과 미안함으로, 그래도 사랑하고 살았으면 한다. 너는 너대로 살고......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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