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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조정인 시인의 “사과 얼마예요”, 집단위법의 명성교회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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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조정인 시인의 “사과 얼마예요”, 집단위법의 명성교회 사태
  • 오시영
  • 승인 2019.12.13 14: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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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전 숭실대 전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오시영
전 숭실대 전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집단의 위법이 횡행하는 사회는 썩은 사회이다. 집단의 위법이 허용되는 세상은 송곳이 아파하는 세상이다. 가시에 찔린 자들이 피를 흘리는데, 그 피가 누구의 피 인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그곳에 집단의 위법이 숨어 있다. 집단의 위법성 속에 최고의 핵심 알맹이는 꽁꽁 숨어 있다.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송곳의 길이가 길어도, 아무리 가시의 날카로움이 예리해도 그 핵심 알맹이에 접근할 수가 없다. 집단의 위법에 저항하는 개인이나 소수는 언제나 외롭다. 스스로 송곳이 되어 집단의 위법에 저항하는데 오히려 집단의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을 겪는다. 송곳이 스스로 아파하는 세상은 아직 올바른 사회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아파하는 송곳이 많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될 가능성이 많아진다. 까닭에 송곳은 스스로 닳아서 몽특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자기 속살을 찌르고, 집단의 위법을 찌른다. 그 송곳의 끝이 집단위법의 핵심 알맹이에 닿을 때까지 그 역할을 멈추지 않는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시점, 독자들에게 아주 좋은 시, “조정인 시인”의 “사과 얼마예요”라는 산문시를 소개한다. “사과는 사실 전적으로 서쪽입니다 사과 속에 화르르 넘어가는 석양, 석양에 물든 맛있는 책장들 산산이 부서지는 새 떼 산소통이 넘어지고 쏟아지는 바람 호루라기 소리 길게, 길게 풀리는 붕대 그리고 구토, 촛불이 타오르는 유리창 당신의 우는 얼굴이 엎질러집니다 시럽이 흐르는 접시들은 누가 난장으로 던집니까 안개의 표정으로 몽롱해지는, 긴 손가락 사이 담배 연기 욕조 속의 정사는 어땠습니까 여자의 검정 유두에 묻은 흰 구름이 정오를 지나갑니다 뒹굴뒹굴 북회귀선을 넘어가는 태양의 휠체어 인류라는 무정형의 얼굴에 던져진 원죄의 돌멩이 퍽! 칼날이 지나가는 북반구 당신은 여전히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를 선호합니까? 사과 아닌 사과도 없지만 사과인 사과는 더욱 없지요 서쪽 아닌 서쪽도 없지만 서쪽인 서쪽은 더욱 없는 것처럼 봉쇄된 우물…… 적막이지요 온몸이 커튼인 깜깜한 밤이 저기 옵니다 덜컥이는 틀니 아니, 사과 얼마죠?” (전문, 시집 ‘사과 얼마예요’에 수록, 민음사, 2019, 산문시에는 마침표가 없다. 마침표가 붙여지는 순간 그 시는 죽어버리고 산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독자의 상상은 자유이지만, 저 사과라는 상징어를 “독자”라고 치환해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낯선 타인이라고 치환해도 좋고, 사랑하는 어머니라고 상상해도 좋습니다. “사과는 사실 전적으로 서쪽”이라는 의미에서 “한 인생”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서쪽은 해가 지는 곳, 그러면서도 해가 뜨는 곳이죠. 우리가 바라보는 서쪽은 해가 지는 곳이지만, 그 지는 쪽에 존재하는 또 다른 우리는 그 해를 뜨는 해로 바라보겠죠. 결국 사과가 바라보는 아니 사과 자체가 지향하고 나아가는 서쪽은 한 인생이 온 몸으로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한 삶이 되지 않겠어요? “석양에 물든 맛있는 책장들”에서 “책장들=사과=한 인생”으로 치환하면 사과 속에 화르르 넘어가는 석양(한 주기의 삶)을 통해 한 인생이 얼마나 깊은 맛이 들 것인지 가히 상상이 되지 않나요? 그러기에 한 인생은 맛있는 책장들이 되고, 그 책장 속 책들에 쓰인 수많은 이야기들 – 소설이 되었든 철학이 되었든, 시가 되었든 – 이 되어 나오지 않을까요. 그래서 조정인 시인은 “석양에 물든 맛있는 책장들”이라는 상징을 통해 붉은 석양빛만큼 붉은 사과를, 아니 세월 따라 농익은 한 인간을 상상해 내며 “사과도 맛있겠고, 인생도 참 맛있겠다”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싶어지는 것이죠.

“산산이 부서지는 새 떼”라는 표현을 통해 조정인 시인은 그렇게 맛있는 책장들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새 떼처럼 흩어지는 허망함이 있다는 거죠. 하늘을 나는 새떼들의 일사불란함, 같은 목적지를 향해 군무지어 날아가는 결집력을 멀리서 바라보면 놀랍지만, “총소리 한 방”에 산산이 흩어지는 그 무망함이 우리 인생 아니겠느냐는 것이죠. “산소통이 넘어지고 쏟아지는 바람 호루라기 소리 길게”, 이 부분에서 마무리되는 한 인생이 보입니다. 산소호흡기를 꽂고 누워 있는 환자의 모습, 하지만 단순한 호흡이 아닌 “호루라기 소리”를 느끼는, 환자의 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에서조차 한 인생의 투쟁의 모습, 한 인간의 가치평가가 이루어지는 현실이 느껴지지 않나요? 조정인 시인이 가진 아주 탁월한 시적 표현력이지요.

“길게 풀리는 붕대 그리고 구토.” 부분은 산소 호흡기의 긴 생명력을 두루마리 붕대를 통해 더욱 강조하면서, 결국은 구토, 한 인간의 잘못된 삶은 오물을 쏟아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치열한 경종이 숨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 않으신가요? “촛불이 타오르는 유리창 당신의 우는 얼굴이 엎질러집니다”라는 부분은 그냥 문장 그대로 느끼셔도 될 것 같아요. “시럽이 흐르는 접시들은 누가 난장으로 던집니까.”라는 부분 역시 한 삶의 종결예정자 뒤에서 펼쳐지는 살아남은 자들의 탐욕의 쌈박질이 느껴지지 않으세요. 상속을 누가 많이 받겠다는 등 추한 우리의 모습이 비쳐져 오지 않으신가요? 마실 때는 너무나 맛있는 시럽이 들어간 카페라떼지만, 마신 후 버려지는 카페라테 일회용 잔처럼 지저분한 것도 없잖아요?

“안개의 표정으로 몽롱해지는, 긴 손가락 사이 담배 연기 욕조 속의 정사는 어땠습니까 여자의 검정 유두에 묻은 흰 구름이 정오를 지나갑니다.”라는 부분에서 사과의 한 인생도 화려함과 황홀했을 한 때를 상상하게 됩니다. 조정인 시인의 언어마술의 참맛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시럽이 첨가된 달콤한 카페라테의 거품 인 하얀 우유의 섞임을 통해 카페라떼의 맛있어 보이는, 입맛 다시게 되는 그 모양을 통해 젊었을 적 한 여성의 안개 같은 몽롱한 모습을 유추케 하고, 뭔가 모르게 황홀감을 안기는 여인의 긴 손가락 사이의 담배 연기(이 역시 라테의 맛 속에서 함께 상상된다) 속에서 라떼를 마실 때의 첫 느낌을 욕조 속의 정사로 환치해내는 능력이, 아니 그 반대의 상상력이 아주 뛰어나지 않나요?

하지만 그것도 한때, “뒹굴뒹굴 북회귀선을 넘어가는 태양의 휠체어 인류라는 무정형의 얼굴에 던져진 원죄의 돌멩이 퍽! 칼날이 지나가는 북반구 당신은 여전히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를 선호합니까?”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사과를 베어 먹기도 하고, 스스로 베어 먹히기도 하는 이중적 삶의 모습을 관찰하게 됩니다. 북회귀선(Tropic of Cancer)은 태양이 더 이상 북쪽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지구의 마지노선이다. 하짓날, 태양이 남중할 때 고도가 90도가 되는 위도선을 연결한 선이다. 북위 23° 26′ 부근으로 매년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 때문에 1년에 15미터 정도 남쪽으로 이동하지만,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 인간에게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우리가 유일하게 태양의 침입을 거부할 수 있는 끝선이다. 북회귀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가 암(癌)과 같은 Cancer라는 것도 신기하지 않으세요? 물론 Cancer가 암이라는 뜻도 있지만, 별자리 중 6월 22일부터 7월 22일까지를 뜻하는 게자리(CANCER)를 말하며, 하짓날(6월 22일)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조정인 시인은 이처럼 이중적 상징어를 통해 중의적 뜻을 잘 표현해 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조정인 시인은 이처럼 암으로 죽어가는 한 인간의 순간순간을 “태양마저 넘지 못하는 북회귀선을 넘어가는 숭고한 역사”로 바라보며 “원죄의 돌멩이 퍽!”이라는 한 문장을 통해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 “너는 죄로 인해 정녕 죽으리라”를 생각나게 한다. “사과 아닌 사과도 없지만 사과인 사과는 더욱 없지요 서쪽 아닌 서쪽도 없지만 서쪽인 서쪽은 더욱 없는 것처럼 봉쇄된 우물…… 적막이지요.” 이 문장을 통해 닥치는 대로 살아온 한 인생을 인생이라 한다면 그것도 다 인생이지만, 제대로 사람답게 살았냐는 질문 앞에 그 누구도 그랬다고 자신하지 못하는 불완전인간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봉쇄된 우물, 죽음 앞에서 모두 할 말 잃은 적막일 수밖에.

마지막 문장에서 조정인 시인은 “온몸이 커튼인 깜깜한 밤이 저기 옵니다 덜컥이는 틀니 아니, 사과 얼마죠?”라고 묻습니다. “온몸이 커튼인 깜깜한 밤”, 바로 우리가 맞닥뜨릴 죽음을 바라보며, 틀니밖에 남지 않은 초라한 삶의 종착역에서 묻습니다. “사과 얼마죠?”라고. 그런데 조정인 시인은 제목을 “사과 얼마예요”라고 대답형 문장으로 삼았다. 시의 마지막 문구에서는 “사과 얼마죠?”라고, “사과 얼마에요?”라고 물으면서 시의 제목은 “사과 얼마예요”라고 아예 대답해 버리고 있는 특이함을 보인다. “이 사과 얼마에요?”라고 물으면 상인은 “이 사과 100원이에요.”라거나, 줄여서 “이 사과 100원예요”라고 답한다. 제목과 마지막 문장 구조 속에 질문과 대답의 묘한 맛을 장치한 시인의 언어적 기교를 보며 빙긋 웃지 않을 수 없다. “사과”라는 상징어를 통해 “죽음 앞에 겸손해야 할 인간”의 모습을 깊이 성찰케 하는 참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들께서는 어떻게 시 감상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이처럼 한 인생은 사과 하나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욕심에 사로 잡힌 집단의 위법은 여러 사람의 동조자가 필요하다. 가장 큰 핵심 알맹이를 보호하는 집단의 두께는 견고하다. 송곳이 찌르다 스스로 부러진다. 한국 최대 교회 중의 하나인 명성교회 사태가 또 다른 분기점을 맞고 있다.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몇 몇 현재적 힘을 가진 집단의 위법행위에 둘러 쌓여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은 2014년 12월 8일 “은퇴하는 목사의 직계비속(며느리나 사위 포함)을 그 해당 교회의 위임목사로 청빙할 수 없다.”는 내용의 총회헌법(정치 제28조 제6항 제1호)을 개정하였다. 위 총회헌법은 엄격한 개정절차에 의해 개정되지 않는 한 통합 교단 소속 구성원(목사, 장로, 집사, 권사, 일반 신도)은 이를 위반할 수 없고, 이를 위반하게 되면 권징(징계)하도록 되어 있다(권징 제3조 제2항).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는 2015년말에 70세 정년으로 은퇴하였고, 명성교회 위임목사 자리는 결원이 되었다. 그런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서울동남노회(노회는 경기도 같은 도에 해당)에서 김삼환 목사의 아들인 김하나 목사의 명성교회 위임목사 청빙을 승인함으로서 총회헌법을 위반하였다. 이에 대해 소송이 제기되었고, 총회재판국에서는 8대7로 위 청빙승인이 유효하다고 판결함으로써 총회재판국마저 위 총회헌법을 위반하였다. 이에 분노한 총회대의원들이 2018년도 정기총회에서 총회재판국원(15명) 전원을 해임하고 다시 재판국원을 뽑아 위 위법판결을 재심사하도록 회부하였다(총회는 헌법 해석에 대한 전권을 가진다, 총회헌법 정치 제87조 제4항). 다시 결성된 총회재판국은 2019년 8월 5일 “서울동남노회의 명성교회 김하나 위임목사 청빙승인은 무효”라고 판결하였다. 위 무효판결이 나자 명성교회 김삼환 원로목사 등이 총회 지도부(초록이 동색이다)를 움직여 “7인의 명성교회 수습전권위원회”를 구성한 뒤 “명성교회가 총회 재판국의 재심판결(위 청빙승인 무효 판결)을 수용”하고 “명성교회 위임목사 청빙은 2021년 1월 1일 이후에 할 수 있도록 하되 김하나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할 경우 서울동남노회는 2017년 11월 12일에 행한 위임식으로 모든 절차를 갈음한다.”라는 모순된 화해조항을 만든 뒤 2019년 9월 26일 104회 정기총회 마지막 날(3박4일간 진행되며 마지막 날은 총대들이 지쳐서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에 토론 없이 다수결로 통과시켰다.

첫 번째 화해조항인 “재심판결 수용”으로 “서울동남노회의 명성교회 김하나 위임목사 청빙승인은 무효”가 되었다. 따라서 무효의 법원리에 의해 “소급해서 그 효력이 소멸”되어 아예 청빙 승인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위 모든 절차를 갈음한다”는 세 번째 화해조항은 “무효인 서울동남노회의 승인”으로 “위임목사 승인을 인정”하는 것으로 또 다른 헌법위반이다(노회 청빙 승인 없는 위임목사는 무효, 총회헌법 정치 제29조 제1항).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는 이들을 향해 총회 지도부는 “왜 자꾸 분쟁을 일으켜 교회를 욕 먹이는가?”라고 공격한다. 이처럼 적반하장이 있을까? 자기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될 것을, 자기들이 잘못을 저질러놓고 왜 잘못을 저지르느냐고 물으니 왜 자꾸 분쟁을 일으키느냐고 후안무치한 신경질을 내는 것이다.

조정인 시인은 ”사과 얼마예요“에서 묻고 대답한다. “온몸이 커튼인 깜깜한 밤”을 곧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당신 사과는 얼마에요? 얼마예요. 집단위법의 시대, 그래도 누군가는 송곳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버려질 뿐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버려질 뿐이라고.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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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홍어박멸 2019-12-15 20:55:01
어디 가서도 자랑스럽게 고향 못밝히는 홍어야
개독 믿는거 자체가 병신인데
무슨 개독새끼 주제에 같은 개독을 나무라는거야 ㅋㅋㅋㅋㅋㅋㅋ
할튼 내로남불은 전라디언의 미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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