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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가 무심히 넘겼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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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가 무심히 넘겼던 것들
  • 송기춘
  • 승인 2019.08.23 1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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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춘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송기춘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얼마 전 어떤 이를 만나 한 면이 온통 한자로 쓰인 명함을 받았다. 필자야 한자 또는 한문 교육을 충실하게 받은 세대이니 한자를 읽는 데 어려움은 없었지만, 오래 전 겪은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느지막이 대학에 자리잡고 나름 국제적인 쓸모가 있을 명함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한 쪽은 한자로, 다른 한 쪽은 영어로 표기한 명함을 가지고 다녔다. 동아시아 지역이 한자문화권이니 중국과 일본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영어는 국제어이니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중국이나 일본 학자를 만날 경우 한자이름을 알려주는 편리함도 있었다.

그러다가 국가인권위원회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하였다가 거기에서 만난 분들에게 이 명함을 드리면서 매우 어색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분들이 한자를 읽지 못하는 것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이었으면 오히려 쉬웠을 글자가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어렵게 되는 경우였다. 나에게는 매우 쉽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던 것이다. 사실 지금 필자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헌법전을 읽어보라 하면 읽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한민국헌법이라는 규범이 한자로 쓰여 있기 때문에, 법전에 수록된 대로 조문을 보아야 할 경우 한자를 알지 못하면 헌법전을 읽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드러내기 창피한 일이지만, 어떤 경우는 2~3주 정도의 시간을 주고 한자 시험을 보기도 한다. 물론 읽는 것 만이다. 쓰라고 하면 아마 글자를 쓰기보다는 그림을 그릴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자는 사용에 저항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런 실정에서 한자를 사용한 명함을 주고받는 것은 의사소통에 중대한 걸림돌이 된다. 나아가 지식의 정도에 따라 차별적 취급을 받는 결과가 되는 일도 예상할 수 있다. 오래 전 문제가 되었던 ‘살색’이라는 표현을 수정한 것이 ‘연주황(軟朱黃)’이었는데, 이조차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어린이들이 제기한 진정을 받아들여 차별이라고 판정한 바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 사람마다 가장 애용하거나 만족도가 높은 앱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 그것은 코레일 앱이다. 철도를 많이 이용하다 보니 서울이나 철도를 이용해야 하는 도시에 갈 때 필수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특히 주말과 같이 차표를 구하기가 어려운 때에도 수시로 코레일 앱에 들어가서 불쑥 ‘뜨는’ 차표를 ‘낚아채는’ 일은 쾌감마저 있다. 그래서 일주일에도 한 두 번씩 서울을 오르내리지만, 필요한 때 차표를 구하지 못한 경우는 ktx가 개통된 지 15년이 된 지금까지 거의 없다. 역에서 표를 사기 위해 기다란 줄에 서서 기다려 본 적도 별로 없다.

그러다가 얼마 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다. 왜 기차표 사는 줄에는 노인이 많은가라는 제목이었을 것이다. 기사 내용까지 살펴보지 않았어도 문득 나도 너무 무심히 살고 있지 않은가 되묻게 되었다. 헌법적 논의에서 정보격차의 문제를 얘기했을 뿐, 내가 그 격차의 이익을 누리고 있었음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지금은 ‘전설 따라 삼천리’ 격의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1990년대 초반에 철도청이 마케팅이라는 걸 한답시고 멤버십카드를 발급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금세 할당된 수량이 동이 나서 뒤늦게 신청한 사람들은 회원 가입을 할 수가 없었다. 회원의 경우는 철도예약에서 우선권을 주었고, 이것은 특히 명절 귀향 차표를 사는 데 매우 유용했으니 회원 아닌 사람들이 느끼는 차별은 매우 큰 것이었다. 철도청이 한 동안 회원 가입을 받지 않아 회원이 아닌 사람들은 회원들이 흘린 ‘찌꺼기’나 주워야 한다고 자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회원에 가입하고 나서는 회원 아닌 이들이 회원제로 인하여 어떠한 피해를 입고 있을지 생각해보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우리들은 자기중심의 사고에 익숙하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과 형편과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는 것은 균형감각을 갖춘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자기중심의 언어는 때로는 권력관계에 바탕을 둘 때 폭력적일 수 있다. 설명의무를 다한답시고 상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묶인 내용을 상대에게 안기는 것이 설명의무를 다하는 것일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내용과 형식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송기춘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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