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박하사탕’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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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박하사탕’을 찾아서
  • 최용성
  • 승인 2001.09.13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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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을 보셨습니까. 영혼을 뒤흔드는 영화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2000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는 그토록 절망에 빠져 목숨을 버릴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영화는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그의 절규를  뒤로 한 채 흐트러진 모자이크 조각을 맞추어가듯이 시간여행을 떠나 답을 찾아갑니다. 그 여행이 거쳐가는 곳은 90년대와 80년대 어딘가에 있었을 우리에게  낯익은 공간입니다. 그런 점만 보면 그 시공간에서 청춘을 보냈을 이른바 ‘386 세대’는 공감하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겠지만, 신세대에게는 이제 아무도 사먹지 않는 박하사탕같이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일부의 감상법이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박하사탕’은 결코 ‘386세대’를 위한 영화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울림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시간에 구속된 인간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역사는 무엇인가. 조금 소박하게 다시 표현하자면 이런 물음입니다. 지금 당신은 누구이고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과거는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영화 속의 주인공 김영호처럼 극단적인 삶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부정하고 싶은 과거와, 잠시만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시절이 함께 있을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해도 과거는 그대로이고 바꿀 수 없습니다.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과거는 엎지른 물처럼 다시 담을 수가 없습니다. 주변세계와 다른 인간들, 자신이 만들어온 과거의 굴레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시간의 인과율에 사로잡힌 인간의 운명입니다. 과거를 망각하려는 몸부림도,  돌아가려는 염원도 모두 부질없습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시간의 그물망은 지독할 정도로 촘촘하여 김영호라는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옭아매고 욱죄어듭니다.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현재는 지나간 시간의 결과일 뿐이라는, 당연하지만 아주 무시무시한 통찰.

 

진정한 미래는 현재와 과거로부터

 

인간존재가 시간에 구속된다는 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궁극적인 답은 저도 모릅니다. 다만 개인적 차원에서는 바로 지금이 과거의 산물이라는 것, 나의 지금이 나의 미래를 이룬다는 성찰을 하면서 살아가는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말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주위에서 사랑이나 우정, 심미적 추구, 존재에 대한 성찰, 선행 등을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일단 성공하고나서 나중에 보자는 식입니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없는 일은 실은 앞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가늠해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 충실하려면, 진정으로 미래를 내다 보려면 우리가 먼저  눈을 두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곧 어제가 될 오늘을 포함한 과거가 아닐까요. 개인이 과거의 아픔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려면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 따라야 함은 상식에 속하지 않습니까. 단순한 예를 들어볼까요. 시험에 실패한 사람이 다음에 합격하기 위하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선 자신의 실패원인을 분석하는 데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을  바로 보는 것으로 끝납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나옵니다. 이것은 업무나 사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컨대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그것이 현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은 물론이고 미래를 더 좋게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문제는 이 당연한 이야기가 개인의 이익과 무관해보이는―오히려 더 중요할 수도 있는데, 무관해보일 뿐입니다―역사적·사회적인 차원에 오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성실하게 살아감으로써 좋은 미래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역사적·사회적 영역에서는 과거를 쉽게 잊고―아니면 잊어버리려고 몸부림치고―시간의 존재구속성에 대한 통찰을 포기하는 현실을 한 번 보십시오. 이런 기이한 현상은 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영화는 1980년 5월의 광주로 돌아가고, 그때  비로소 청산되지 않은 학살의 과거를 잊어버린채 파시즘, 물질만능의 신자유주의 시대로 바쁘게 진입하며 과거를 잊고 살아가기로 작정한 듯한 우리 시대의 천박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학살자들, 고문기술자들, 독재의 주구들이 지역감정을 등에 업고 아직도 행세하는  사회, ‘조선일보’처럼 1980년의 광주가 피로 물들 때 학살자를 찬양하기 바빴던 신문이 여전히 1등인 사회, 독재체제의 확립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21세기의 주역으로 자처하는 사회, 독재와  맞서 싸웠던 사람들이 독재자들이 만든 정당의 후신에 당당하게 들어가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사회. 이게 정상이라고 당신은 생각하십니까. 그 수혜자들 말고는 아무도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과거를 성찰하지도, 심판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망각의 댓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망각의 댓가가 이처럼 심각한데도 이제 과거를 말해 무엇하냐고 자포자기하고마는 집단심리적 태도가 형성되는 원인은 어디 있을까. 친일파나 독재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경험에서 냉소적인 태도가 생겨났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는 역설적으로 나름의 역사적 성찰, 과거에 대한 생각은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실은 역사허무주의나 정치냉소주의를 부르짖으며 자신들에게 불리한 과거 망각의 담론―냉전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잊지말자’라고 하면서  친일·독재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반복하는  기막힌 이중성을 상기해보십시오―을  확대재생산해내는 주류 언론의 치밀한 작동 기제가 그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수는 없겠습니까. 그로부터 이익을 보는 것은 심판받아야 할 과거를 가진 자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망각하고 역사를 외면할 때 우리는 방향을 잃고 김영호처럼 파멸의 길로 가고, 그들의 지위는 영속화될 것입니다.  

낙천·낙선운동의 의미

 

낙천·낙선운동이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그 법적 쟁점이나 정당성 유무를 이 자리에서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잊어서는 낙천·낙선운동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해야겠습니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허무를 말하는 주류 언론의 목소리는 정치인들의 과거를 냉철히 가려 심판할 기준은 전혀 제시하지 않으면서 모든 정치인을 같게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실은 매우 정치적인 언술입니다. 선거철만 되면 국민의 심판 운운하지만, 심판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정치는 결국 국민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고, 역사를 망각하고 있는 국민이 제대로 심판해내 건강한 정치를 만들어낼리 만무한 것입니다. 낙천·낙선 운동은 망각의 늪에 빠진 역사를 건져 올리려는, 작지만 큰 시도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조선일보로서는 ‘음모론’을 확대재생산하여 그 운동을 훼손하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늘 그러했듯이 정공법으로 대응하지 않고 약한 부분―지역감정―을 파고 들어 뒤통수를 때리는 수법은 여전합니다. 언제까지 당할 참입니까. 
‘박하사탕’의 김영호는 진실을 망각하려고 몸부림치면서 한국사회가 걸어간 파시즘과 천민자본주의의 길을 충실히 따라갔지만, 과거의 진실을 외면하고 도피한 댓가로 결국 파멸에 이릅니다. 그 점에서 김영호의 삶은 우리 사회의 축도(縮圖)입니다. 시간여행을 통하여 김영호의 본래 모습을 찾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를 병들게 한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지금 우리는 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잃어버린 ‘박하사탕’을 누가 빼앗아갔는지 발견하고 찾아나설 때 희망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당신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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