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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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
  • 법률저널
  • 승인 2006.01.2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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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설날 아침, 양극화의 칼날

 

설날이다. 어린 시절 설날이야말로 가장 가슴 설레는 날이었다. 어른들이야 사당에서 제사(차례)를 지내기 위한 음식장만과 손님맞이에, 해를 넘겨서는 안 된다며 품삯이나 외상빚 정산 등 빚잔치에 여념이 없었지만, 어린 아이들로서는 한대목하는 날이었으니 어찌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지 않을 수 있었으랴? 평소에 못먹어 본 맛있는 고기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었고, 잘 하면 새 옷도 한 벌 얻어 입을 수 있었다. 가슴 잔뜩 부풀었다가 때깔나는 겉옷이 아니고 내복이나 신발 정도를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을 때는 금방이라도 울음보를 터뜨릴 듯 했고, 친구들이 새 옷 입고 폼새 내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부모님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내복이나 신발로 귀착되었고, 형편이 좀 나으면 두툼하고 모양나는 외피를 선물 받았던 것이었으니 많은 자식을 키워야 했던 부모님의 설날 어깨는 더더욱 무거웠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아이들이야 설날이 따로 없고, 일년 내내 설날처럼 궁핍함을 모르고 풍요 속에서 살고 있으니 설날이 주는 기쁨이나 의미를 제대로 새기지 못하겠지만, 어린 시절 설날의 의미는 대단히 컸었다.


설날의 의미가 컸던 만큼 세수(歲首)ㆍ원단(元旦)ㆍ원일(元日)ㆍ신원(新元)이라고 하여 새로운 첫해의 으뜸일로 소중히 여겼고, 일년 한해를 근신하며 조심하는 첫날이라는 의미로 신일(愼日)이라고도 불렀다. 어머니께서는 설날이 되면 신발을 사주시고는 했다. 설날 아침에 그 신발을 신을 것을 생각하며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신발을 꺼내보고 또 꺼내보고 했었다. 어머니께서는 신발을 사주면서 만일 부모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설날 밤에 인가에 내려와 아이들의 신발을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모두 신고 가 버린다며 신을 잃어먹으면 일년 내내 재수가 좋지 않으니 신발을 소중히 보관하라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야광이라는 귀신이 무서운 생각에 "내 신발" 하고 외치며 댓돌 위의 신발을 방안에 들여놓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뒤이어 야광이라는 귀신은 머리가 미련해서 마루나 뜰에 체를 걸어두면 밤새 체의 구멍 수를 세느라 날 새는 줄 모르다가 새벽이 오면 물러가 신발을 가져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체를 마루벽에 걸어놓으시고는 했다.


체를 걸어 놓으시던 마음을 생각해본다. 체를 걸러 미세한 밀가루나 쌀가루를 걸러내고, 남은 굵은 것들을 다시 빻아 체를 걸으시던 어머니의 수고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것들이 모두 삶을 살아가는 정성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체의 그 촘촘한 구멍 사이로 야광신이 끼어들어 오지 못하도록 기도하는 염원, 매사에 정성이 최고라는 가르침을 그렇게 가르쳤다. 


또한 설날 아침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덕을 빌어주는 덕담이 유행했다. 요즈음 부자 되세요 라는 유행어처럼 그 시절에도 공부 잘 하라거나, 건강하라거나, 풍년농사지으라거나, 득남하라거나 등등 만나는 사람의 복을 빌어주는 덕담을 원 없이 하고 들을 수 있는 날이었다. 모두의 얼굴이 웃음꽃이 만발했고, 어린 우리들은 세뱃돈으로 평소 찾지 못했던 구멍가게 앞에서 폼을 잡을 수도 있었고, 먹고 싶었던 과자를 실컷 사서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들의 세밑은 춥고 배고프다. 세밑인데도 양극화 현상의 심화로 춥고 어두운 구석이 너무나 크고 깊다. 쪽방살이 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노숙자들이 추위에 떨고 있고, 독거노인들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절대빈곤층이 늘어나는 것만큼 세밑이 더욱 춥다. 예전에 있던 인정마저 메말라 버렸으니 추위가 더 심해진 듯도 싶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정부는 장기적으로 증세정책이 필요하다는 시정방침을 정한 듯하지만, 증세에 대한 국민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을 듯싶어 또 다른 갈등의 폭이 깊어지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지금 우리 국민들의 정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정부에 대해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눈이 와도 국가가 모두 치워줘야 하고, 가난한 국민들도 국가가 먹여 살려야 하고, 병도 치료해줘야 하고, 노후보장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국가는 재원이 있어야 하는데, 세금부담능력이 있는 국민층은 조세부담이 과하다고 엄살을 피우고 있다. 자영업자들이 신고한 소득수준이 월평균 42만원이라고 한다. 그들의 월평균 지출액 220만원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준이다. 이처럼 자신들의 소득을 감추고 낮추는 불법행위를 저지르면서도 모든 것을 국가 탓으로 돌리는 나쁜 심성이 우리에게는 있다. 우리는 이제 제발 나쁜 것은 나쁜 것이고, 잘못하고 있는 것은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집단참회의 기도를 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 모두들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고, 사회와 국가와 이웃이 잘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삿대질이니 난감해도 이보다 더 난감할 수는 없다.


세밑에 우리는 따스한 손길을 기다리는 가난한 이웃을 되돌아보고, 덕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체를 치는 정성으로 실천하는 모습으로 바뀌게 되기를 바란다. 모두들 설날 같이만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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