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그룹 ‘퀸’의 부활과 ‘프레디 머큐리’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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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그룹 ‘퀸’의 부활과 ‘프레디 머큐리’의 재림
  • 신희섭
  • 승인 2018.12.1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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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간만에 영화를 보았다. 간만에 와이프와 함께. 그리고 간만에 재미있게.

영화를 보면서 후반부에는 눈물을 흘렸다. 그럴 줄 알았지만 그 눈물의 의미는 좀 복잡했다. 마지막 엔딩장면인 ‘퀸’의 연주까지 보고 나왔는데 집에 갈 때도 영화의 감정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 『보헤미안 랩소디』에 대한 이야기이다. 2018년 12월 12일 기준으로 730만 명(영화진흥위원회기준)이나 이 영화를 보았다. 음악영화로 대단히 놀라운 성적을 보이고 있는 이 영화는 마동석의 『성난 황소』도 거칠게 밀어제쳤다. 10월 31일 같은 날 개봉한 『완벽한 타인』보다도 200만 명이 더 관람을 해 압승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134분이나 되는 이 긴 영화가 700만이 넘은 현재 시점에서도 예매율 1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적 돌풍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한 번 본 관객들이 screen X나 싱어롱 상영관과 같은 다른 상영관을 찾아서 영화를 중복관람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룹 ‘퀸’ 세대가 아닌 젊은 층을 유입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 구성의 힘, 프레디 머큐리의 드라마적인 삶, 요절한 천재의 기행...

‘퀸’이 주로 활동했던 미국과 영국에서 이 영화는 빵 터졌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 영화는 빵 터졌을 뿐 아니라 하나의 사회현상을 만들고 있다. 그룹 ‘퀸’ 재조명하는 프로그램들. 1985년 전설의 'Live Aid' 공연 방영. 수많은 광고음악. 레트로 패션.

물론 추억팔이와 상업주의라는 비판도 있다. 몇 년 전의 ‘세시봉 현상’때처럼. 하지만 이 영화 관람 층과 퀸에 열광하는 이들이 전 세대를 아우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런 해석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게다가 문화적 빈곤에 시달리는 40대와 50대를 위한 막대사탕은 다른 곳에도 많이 있다. 인문학, 라디오와 팟 캐스트, 커피, 맛 집, 먹방, 여행 등등.

이 영화가 사회적 현상을 만들고 있다. 그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현상은 정치적 현상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영화와 그에 따른 현상에 대해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인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1970-80년대 전설적인 록 그룹인 퀸은 부활했다. 또한 1991년 사망한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는 재림하였다. 왜 거의 30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이 영화는 이들을 부활시켜 한국을 들썩이게 하는가? 아니 정확히 질문하면 우리는 왜 그룹 ‘퀸’을 부활시켰고 프레디 머큐리를 다시 불러냈는가?

먼저 영화가 흥행한 이유 즉 우리가 영화에서 얻게 된 것을 생각해보자. 첫 번째 음악적 다양성 추구를 들 수 있다. 아이돌 일색인 한국 음악시장에서 변방으로 몰린 중장년층은 이 영화를 통해 과거 자신들의 20대를 회상한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초까지 다양한 음악이 있던 시절을 일깨우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몇 몇 군데서 들어 친숙해진 멜로디들로 인해 빨리 공감한다. 과거를 통한 ‘새로움의 확보’와 ‘다양성의 소환’.

두 번째는 ‘스토리’이다. 스토리가 음악을 재구성하게 한다. 영화를 통해 예전에 들었던 노래인 ‘보헤미안 랩소디’가 1975년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알게 되었다. 곡과 연결된 스토리의 힘은 강력하다. 스토리는 음악 자체를 달리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준다. 또한 음악을 다른 감각과 연결시킨다. 음악의 재구성과 강화작용.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곡을 위해 180번 이상을 녹음했다는 ‘퀸’의 완벽주의, 기존 틀을 깨는 천재성, 3분 이상의 음악을 만들지 않던 기존 관행에 대한 저항. 이런 이야기들이 ‘보헤미안 랩소디’에 들러붙어 이 곡을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뭐니 뭐니 해도 감동이 있다. 134분의 긴 상영시간은 오로지 마지막 Live Aid에서의 ‘퀸’과 프레디 머큐리를 조명한다. 당시 공연을 그대로 재현한 이 장면은 영화관 자체를 1985년으로 되돌린다. 여기서 영화 관객은 콘서트 관객이 된다. 그리고 뮤지션들에게 열광한다. 젊은 날 음악에 몰두한 4명의 영혼들. 그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그 날의 그 노래들에 빠져든다. 이 감동은 퀸과 프레디 머큐리를 다시 일상에서 소환한다. 또한 이 경험은 세대를 초월하는 공감을 만든다.

‘다양성’, ‘스토리’, ‘공감’. 영화가 던진 3가지 화두가 한국 사회를 고무시키고 있다. 또한 이 3가지는 정확히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사회 갈등의 원인과 갈등해결방안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사회갈등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사회갈등의 노출. 한국 정치에서는 더욱 그렇다. 급격한 사회변동과 걷어차인 ‘사다리’. 계층이동이 어렵고 세대 간의 단절된 한국 사회는 분노 조절에 실패하고 있다. 보라 얼마나 끔찍한 범죄들이 저질러지는지! 다양성이 없는 획일화된 가치 체계. 학교와 직장을 한 줄로 세우는 문화적 위계구조. ‘사회적 직업= 계급’ 혹은 ‘거주지=계급’의 등식. 삶은 퍽퍽하고 고단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런 상황은 많은 이들의 저항감을 불러일으킨다. 왜? 사회의 ‘다양성’은 무시되고. 고단하지만 묵묵히 걸어온 개인 삶의 ‘스토리’는 사라지며. 사람들 간의 ‘공감’은 한 쪽 구석으로 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존재감의 상실’.

그런데 영화 속의 그룹‘퀸’은 새로움을 추구하고 다양한 시도를 한다. 돌출적인 멤버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밴드를 탈퇴하고 다시 다른 팀원들과 재결합하면서 Live Aid 공연을 통해 화합한다. 여기서 스토리가 탄생한다. 그리고 전설이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린 퀸과 공감 한다.

영화는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음악을 통해 작은 위로를 던진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지금도 잘 살고 있다”고. 그래서 알았다 내가 왜 눈물이 났는지.

1991년 11월 24일. 프레디 머큐리가 죽었다. 그러나 다시 27년이 지나 그는 영화로 부활하였고 음악으로 재림하였다. 그룹 ‘퀸’과 함께. 정확히 말하자. 우리가 이들을 깨웠다. 우리 안의 아직 남아있는 다양성과 공감을 향한 열정이 이들을 부활하게 하였다. 왜? 퀸이 말하지 않았나! We are the Champion이라고.

CF. 지난 칼럼들을 좀 더 보기 편하게 보기 위해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주소는 blog.naver.com/heesup1990입니다. 블로그 이름은 “일상이 정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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