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장영민 교수의 법철학 산책- 죽음과 소녀, 정의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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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장영민 교수의 법철학 산책- 죽음과 소녀, 정의와 진실
  • 장영민
  • 승인 2018.11.22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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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민 교수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죽음과 소녀’는 슈베르트의 가곡으로, 현악 사중주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슈베르트는 자신의 삶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속에서 이 곡을 썼다. ‘죽음’과 ‘소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어구이지만, 그 안타까움 때문에 자주 예술적 소재가 된다. 황순원의 ‘소나기’ 그리고 조동진의 ‘제비꽃’이 그 예이다. 이 ‘어울리지 않음’을 더 역설적으로 만든 것은 에드바르드 뭉크와 에곤 쉴레의 그림이다. 죽음이 소녀에게 엄습한 것이 아니라, 소녀가 오히려 죽음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왜일까?

아르헨티나의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은 같은 이름의 희곡 ‘죽음과 소녀’에서, 우리도 겪은 바 있는 상황 하나를 아프게 극화하면서 그 이유를 시사해 준다. 반체제 운동을 하던 두 젊은 남녀가 있었다. 남자는 요행히 피신하여 살아남아 변호사가 되었다. 여자는 붙잡혀서 고문을 당하였다. 여자는 끝까지 불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을 관리하던 의사인 것 같은 누군가에게 성적 유린을 당했다. 눈이 가려진 채로,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가 흐르는 어느 공간에서.

지금 두 사람은 중년의 부부가 되었고, 나라는 민주화되었다. 남자는 오늘 밤 과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게 되어 있다. 여자는 그때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죽음과 소녀’를 들으면 경련을 일으키게 되었고, 사람만나기를 꺼려하여 부부는 외딴 해안가 절벽 근처에 살고 있다. 그런데 남자가 귀가하는 길에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근처에 사는 어떤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집에 오게 된다. 그리고 그 도와 준 사람은 잊고 가져간 타이어를 가져다주러 부부의 집에 찾아온다.

여자는 도움을 주러 온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직감적으로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죽음의 놀이’를 한 ‘그 자’임을 직감한다(죽음의 ‘놀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여자를 악기삼아 죽음의 ‘연주’를 한”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남편과 그 자가 집에서 포도주 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에 몰래 나와서 그 자의 차를 해안절벽에서 바다 속으로 떨어뜨려 버린다. 그 자가 도주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차 안에서는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카세트 테이프가 발견된다. 집에 돌아 온 여자는 포도주에 곯아 떨어져 있는 그 자를 힘겹게 의자에 묶어 놓는다. 잠에서 깬 남자는 벌어진 상황에 놀란다. 바로 ‘그 자’라는 여자의 말에 반신반의하는 남자는 변호사답게, ‘목소리,’ 그의 체취 그리고 그의 사소한 말버릇과 같은 정도의 증거로는 이 자를 부죄(負罪)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자는 이 자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나? 정의를 구현하는데 이런 저런 (특히 ‘법적 안정성’에서 비롯되는) 장애 때문에 사법(司法)이 무력화된 경우, 사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이 상황에서도 여자는 나름의 정의를 세우려고 발버둥을 친다. ‘같은 것을 같게 하라’는 정의의 명령에 따라. 지금은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이 자에 대하여.

여자가 정의의 실현으로 생각한 것은 무엇일까? 첫째 안은 남자가 ‘그 자’를 강간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하다. 그래서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막대걸레의 자루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현실성이 없다. ‘같은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폭행에 그치는 것일 뿐이다.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최종 대안으로 “그저 진실을 말해 줄 것”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부부는 의사에게 당시의 사정을 진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녹화되고 있는 의사의 진술은 일종의 환자 관리보고서와 같은 중립적인 의학적 기술로 채워진다. 결국 두 부부는 이 자를 절벽에서 떨어뜨려 버리기로 하고 해안가 절벽으로 데리고 간다. 죽음을 마주하게 된 ‘그 자’는 비로소 속마음을 털어 놓기 시작한다.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지배했던 그 상황을. 이 상황을 자신은 은밀하게 즐겼음을. 여자를 발가벗긴 채 형광등 밑 테이블에 뉘어 놓았었음을. 14번의 강간을 하였음을. 고문 후 오르가즘이 가능한지를 궁금해 하며.

모든 말을 들은 과거사위원회 위원장은 이 자를 절벽에서 밀어버리려고 달려든다. 그러나 위원장은 끝내 그 자를 밀지 못한다. 잠시 후 여자는 그에게 다가가서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대신에 손을 묶은 포승을 풀어 준다.

여자는 이제 ‘죽음과 소녀’를 들어도 경련을 일으키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 복수, 응보, 징벌? 여자는 그에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네 손을 다오. 아름답고 사랑스런 소녀여! 편안해 지거라. 내 품에서 편히 잠들거라.” 슈베르트가 가곡 ‘죽음과 소녀’를 쓰는데 영감을 준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의 시귀이다. 여자는 죽음이 아니라 진실을 붙들고 편안해 진 것일까?

‘같은 것은 같게 하라’는 정의의 요구가 (여러 장애로 인하여) 실현될 수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진실’을 ‘법가치’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법가치가 아니라고 말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바로 (진, 선, 미,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궁극적인 가치들에 대한 다짐에 터잡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는 서로 넘나들면서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정의의 가치가 실현되지 못하는 곳에서도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지지대로서 진실이라는 이름의 거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른 모든 삼라만상과는 달리, 오로지 인간만이 가치(들)에 대한 다짐 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포기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기를, 인간의 삶이기를 그치는 것이다.

도르프만의 ‘죽음과 소녀’는 페미니스트들이 즐겨 주제로 삼는 작품이지만, 뜻밖에도 이 작품은 정의와 진실의 호환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정의가 가치들 중 최고의 가치가 아님도 보여 준다. “아직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는데?”라는 물음도 제기된다. 그러나 예수님도 말씀 하신다. “밭에 자라는 가라지를 어쩔까요?”라는 질문에 “그냥 놓아두어라”라고. 인간이 정의를 완벽하게 세우는 데는 라드브루흐의 말처럼 너무도 명백한 한계가 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완벽한 정의는 ‘죽음’ 뿐이라는 말도 있다. 이것만이 모든 인간에게 완벽하게 평등하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오히려 정의에 대한 진실의 무게를 육중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또 미국식 형사사법에 대한 야유도 보내고 있다. ‘죽음의 연주’를 한 의사의 이름은 ‘미란다’이다. 미란다 의사는 미란다 원칙에 반하여 진술을 강요받았고, 그 진술은 녹화되었다. 이것은 증거능력이 있는가? 사인이 (위법하게) 획득한 증거는 수사기관이 획득한 것과는 달리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있는가? 이 작품은 이 모든 문제제기가 부질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국가(형사)사법이 움직이고 있는 차원이 절대가치인 진, 선, 미에 비하여 얼마나 인위적인 것으로서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인지를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제도 속에서는 절대가치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인가? 제도를 벗어나 이러한 절대가치 앞에 나설 때라야만 인간의 인간에 대한 용서, 인간의 인간에 의한 구원은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를 늘 잊고 사는 평범한 우리의 삶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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