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이은경의 Heal the World- ‘다름’과 ‘틀림’의 사이
상태바
[LAW & JUSTICE] 이은경의 Heal the World- ‘다름’과 ‘틀림’의 사이
  • 이은경
  • 승인 2018.10.29 12: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은경 변호사
법무법인 산지
前 한국여성변호사회장

※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요새 인터넷 매체엔 퍼 나르는 글들이 꽤 많다. 최근 눈에 들어온 ‘다름’과 ‘틀림’이란 글도 호평 받았던 소재 중 하나다. 요지인즉, “+” 표지를 보고, 수학자는 덧셈을, 목사는 십자가를, 경찰은 사거리를 생각한단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기 입장이란 게 있기 때문에 틀린 게 아니고 다를 뿐이라는 거다. 여기에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고 이해의 대상이란 말도 덧붙인다. 일견 수긍할만하다. 인간은 분명 천성도 다르거니와, 환경과 관계의 변수 속에서 다양한 모습을 띠기 마련이다.

헌데 이 듣기 좋은 말도 한 가지 함정이 있다. 그건 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다름’이란 게 분명 존재한다는 점이다. ‘다름’을 존중한다는 게 예컨대, 폭력, 음란의 취향까지 수용할 순 없는 거 아닌가. 부득불 ‘다름’은 ‘옳음’과 ‘틀림’, ‘놔둠’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다. 이 영역을 기준 짓는 게 바로 ‘법’이고, 이를 준수하라는 공동체 약속이 ‘법의 지배’다.

그럼, ‘다름’과 ‘틀림’의 사이는 누가 경계를 짓는가, 그 많은 ‘다름’ 가운데 ‘옳음’, ‘틀림’, ‘놔둠’의 영역을 무얼 기준으로, 어떻게 구분할 건가. 우리에게 남겨진 어려운 숙제다. 과연 법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먼저, ‘다름’으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마약 중독자를 격리하는 건 중독의 전파가능성을 막으려는 걸게다. 물론, ‘자신’에 대한 피해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한강다리 앞에서 투신을 시도한다면,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멈추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두 기준을 적절히 작동케 하는 게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이다. 자신에게 돌아올 피해를 거절하려는 마음, 바로 ‘이기심’은 자연발생적인 인간의 기본품성이다. 헌데 공동체를 붙들어주는 ‘이타심’ 또한 이기심만큼이나 자연스런 성품 아닌가. 누군가 곤궁에 처하고 죽어가는 걸 그냥 지나치는 건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그렇다. ‘법’은 수많은 ‘다름’이 어우러진 공동체로부터 ‘옳음’을 지지하고, ‘틀림’을 제거키 위해 ‘이기심’과 ‘이타심’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곤 한다.

한편, ‘놔둠’의 영역도 무척 중요하다. 이는 수많은 이익충돌영역 중 옳음과 틀림을 기준 짓기 어려운 부분을 개인 판단에 맡겨 놓은 영역이다. 공동체의 다양성과 유동성을 보장하고, 첨예한 갈등을 완충해 주기도 한다. 예컨대, ‘간통’이 형법상 놔둠의 영역으로 이동한지도 3년이 지났다. 물론 가족법은 여전히 틀림의 영역에 있다. 일부일처제를 수호하려는 공동체적 합의가 아직 굳건하기 때문이다. 최근 낙태, 동성애, 생명복제 등을 ‘옳음’, ‘틀림’, ‘놔둠’의 어느 영역에 둘 건지 논란이 분분하다. 우리 국민들 사이에 진지하고 활발한 토론이 필요하다.

‘다름’과 ‘틀림’의 맥락과 비슷한 게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차이’를 ‘차별’과 대칭 짓는 구조다. 국가인권위의 캐치프레이즈는 ‘차이를 인정하면 차별 없는 세상이 보인다’는 것이다. 허나, ‘차이’를 인정하란 게 모든 ‘다름’을 조건 없이 수용하란 건 결코 아니다. ‘차이’를 불러오는 서로 다른 모습 중 수용과 거절의 기준을 미리 고정치 말고, 다양한 변화를 꿈꾸어 보란 거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공동체 구성원의 변화에 반응하여 평화롭게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바로 ‘기준’의 변화가능성이 핵심인 거다. ‘차이’를 초래한 ‘다름’이 과연 ‘옳음’과 ‘틀림’, 그리고 ‘놔둠’의 영역 어디인지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공동체가 건강한 사회인 것이다.

결국 ‘다름’과 ‘틀림’을 구별 짓는 건, 구성원들의 열띤 토론이 빚어낸 참다운 합의다. 바로 양심, 신앙,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 이유다. 헌데, 요새 이 자유들이 점점 위축되고 있다. ‘다름’의 영역들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활발하게 토론할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논쟁 자체가 부담스럽단 이유도 크다. ‘다름’을 토론하고 비판하는 게 인권 프레임에 갇혀버리기 때문은 아닌지 무척 우려스럽다. 각자의 양심대로 공동체의 문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 이를 통해 기준이 달라질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사회. 그게 바로 ‘다름’을 바라보는 진정한 속뜻일 텐데 말이다.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