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발가벗겨지는 세상, 모두가 누드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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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발가벗겨지는 세상, 모두가 누드모델이다
  • 오시영
  • 승인 2018.10.1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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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추락하는 것들은 모두 무겁다. 무거운 것들은 힘이 세다. 힘이 센 것들은 스스로 땅바닥을 무너뜨리고, 제 선 곳을 절벽으로 만든다. 세상이치가 그렇다. 세상이치가 뭐 그리 고상하다거나 고품격이거나 한 것도 아니다. 그냥 반복되는 것들이면 세상이치인 것이다. 새털마저도 무거운 세상, 모두 추락하게 되어 있다. 추락이 반복되는 세상의 중심에는 언제나 탐욕이 있다. 결국 탐욕의 끝은 추락이다. 사립유치원들이 그 동안의 방만한 운영과 국고 지원금을 불법 사용한 행위들로 인해 된서리를 맞고 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자잘하고 소소한 불법행위들을 자행해 왔고, 그것이 그냥 만천하에 공표되어 버렸다. 그 동안 무얼 잘못했냐고 큰 소리 치며 잘못을 잘못이라 여기지 않던 자들이 자신들의 진면목이 공표되는 순간 모두들 쥐구멍으로 숨어 버렸다. 쥐구멍에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쥐구멍으로 숨고 말았다. 쥐구멍에도 볕들겠냐고,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모든 쥐구멍에는 볕이 들게 되어 있다. 어둠은 빛을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벌거벗는 자들이 넘쳐나는 세상, 나체들이 넘쳐나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다. 보아서 좋고 보여져서 좋다.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는 나체세상이야말로 평등의 세상이고, 거짓이 없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최초로 만든 에덴동산이 나체세상이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인간을 질책한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나체로 살아도 부끄럽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인간들이 스스로를 부끄럽다며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렸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죄를 두려워 떨며 스스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우거진 숲속에 숨고, 하나님께서 부르는 음성을 잘 듣지 않으려 하는 것에서부터 인간의 나체세상이 종결된 것이다.

필자의 시집 “여수”에 실려 있는 “누드모델”을 보자. “나는 원래 누드모델이었다// 불알 두 쪽 내놓고/ 세상 향해 오줌 갈겨도/ 모두들 예뻐하던/ 태생적/ 누드모델// 벌거벗은 게 나쁜가// 누드화가인 너/ 옷 벗은 나를/ 있는 그대로 그려 봐/ 뚫어지게 쳐다보는 너를/ 일곱 번까지는 용서하마// 싫으면/ 내가 너를 그려 줄까” (시집 ‘여수’에 수록, 황금알 간, 2012년). 이 세상은 누드모델로 가득하다. 모두 옷을 걸쳐 입고, 문화와 에티켓으로 치장한 겉모습만을 보여주지만, 모든 인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벌거벗기를 반복한다. 대중탕에 가면 돈 내고 들어가 모두 벌거벗고, 나를 보여주고 너를 보며 그냥 스치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지 않느냐고 야단이겠지만, 본질은 “너와 내가 발가벗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벌거벗은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느냐, 아니냐 라는 내심의 소리만이 문제될 뿐이다.

우리 모두는 언제부터인지 누드모델 앞에 선 누드화가인 양 스스로를 가식화하는데 익숙하다. 자신이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누드모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남의 벌거벗은 모습을 관찰하는 누드화가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남을 쳐다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자신의 발가벗긴 모습이 관찰되는 것은 무한대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태생적 누드모델이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게 그리도 나쁜가? 벌거벗은 자는 감출 게 없다. 감출 수 있는 게 없다.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게 드러난 세상에서 감추고 싶은 행위를 하지 않아야 옳은 데도 우리들 대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감출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감추고 싶은 행위를 반복해서 행하는 잘못을 반복하고 산다.

벌거벗은 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스스로 벗기도 하고, 억지로 벗겨지기도 하는 나체들이 횡행하는 대한민국은 나체천국이 되어 버렸다. 며칠 전 동덕여대에서 한 남자가 “나체쇼”를 스스로 촬영한 동영상을 올렸다가 정보통신망법위반(음란물 유포 및 건조물 침입)으로 체포되었다. 스물여덟의 젊은 청년의 뜨거워진 제 몸 식히기의 실패작이 아니었나 싶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타인 앞에서 발가벗기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것과 달리 보여주지 못해서 안달이 난 이 청년을 “에덴동산의 현재화를 도모한 영웅”이라고 해야 할지 “정신도착증 환자”라고 해야 할지 어이가 없을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자신의 신체 중요 부위에 점이 있음을 보았다며 자신과의 부도덕행위를 주장한 김부선씨의 주장에 대한 반증을 제시하겠다며 스스로 아주대병원에 가서 벌거벗은 채 신체검사를 받고 그 결과를 공포하는 일조차 발생하였다. 강제로 벗겨지고 스스로 벗는 나체의 세상을 진정 건강한 세상이라 해야 하는가 의문일 뿐이다.

디모데, 디모테오라는 본명(영세명)의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로마 교황청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미사”에 참석하였다. 교황청 국무총리 직을 수행하는 피에트로 파롤린 국무원장이 집전하는 성베드로대성당에서 진행된 특별미사에 참석한 후 문재인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첫째, 한반도 평화기원특별미사 집전에 감사하고, 둘째, 1968년 10월 6일 한국순교자 24인에 대한 복자서품을 시작으로 세계 4위에 달하는 103인의 순교성인을 배출한 국가로서의 자부심을 피력하고, 셋째, 한국 기독교 전파의 특수성(선교사들보다 성경이 먼저 전파되어 자생적으로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의미,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에 의하면 1816년 9월 4일과 5일(음 7월18일과 19일), 영국의 Alceste호(함장 Murry Maxwell)와 Lyra호(함장 Basil Hall)가 청나라 방문 후 비인현 마량진 앞바다를 지나다가 당시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의 검문을 받고 적의가 없음이 확인되어 떠나도록 허락받자 기념으로 건네 준 두 권의 책이 바로 성경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국 선장도 이러한 사실을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본국에 보고한 기록이 영국에 남아 있다)을 설명하고, 넷째, 한국 기독교의 대한민국 독립과 민주화에 대한 기여도를 높이 평가하고, 다섯째, 대통령 자신도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와 인권위원으로 활동해 왔음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음을 밝히고, 여섯째, 현재 한반도에서 진행 중인 남북화해와 비핵화, 평화체제로의 대전환과정을 설명한 후 교황청의 협력을 부탁하고, 일곱째, 가톨릭을 비롯한 유럽연합의 통합과정 존중과 그러한 선례를 본보기 삼아 “한반도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체결”을 통해 지구상 마지막 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데 교황청과 유럽연합이 협력해 줄 것을 부탁하고, 여덟 번째, 구약성경 시편 85편 10절(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을 인용하여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것입니다.”라며 한반도에 예수와 기독교의 “정의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소원함을 밝혔다.

디모데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의미로, 바울의 제자였다. 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태동되었지만, 기독교 교리의 완성은 바울을 통해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의 열두제자는 믿음이 강하고 예수로부터 직접 훈련을 받았지만 직업이 어부나 세리 등과 같이 학문적 체계가 약하였던 데 반하여 사도 바울(작은 자라는 뜻이다)은 청년 시절 사울(큰 자라는 뜻이다)이라는 이름일 때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내 처형하는 일을 자랑으로 여겼지만 회심한 후 사울로 개명하였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은 바울에 대하여 “가멜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운 바리새인으로 유태인이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멜리엘 문하라고 하면 당시로서는 최고 지성의 교육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고, 바리새인이라 하면 최고의 종교지도자임을 의미한다. 거기에 로마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으니 유태인 중 최상류층 인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예수를 핍박하던 바울이 예수를 만나 회심하게 되고, 그 이후 예수의 가르침을 체계화하여 신약성경에 나오는 “로마서”와 같이 “~서(편지)”로 끝나는 대부분의 신약성경을 씀으로써 신약체계를 정립하였다.

그러한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냈다는 디모데전서와 후서에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고 부를 정도로 사랑했던 제자가 디모데인데, 문재인 대통령이 가톨릭 영세를 받을 때 디모데라는 이름을 본명으로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성경 속 디모데는 믿음 좋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유복한 청년시절을 보냈지만, 바울을 만나 그의 시련(로마감옥에 수감되고 다른 종교집단들로부터 핍박을 많이 받다가 나중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에 동참하면서 새로운 자로 거듭난 뒤 바울의 2차 전도대회(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등지를 전도하고 다님)를 따라 나서 로마감옥에 갇히기도 하면서도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소심함도 있었지만(부끄러움을 잘 타는 소심한 성격으로 에베소교회에서 복음 전파를 두려워했다는 성경 기록도 있다), 그의 소심한 성격은 오히려 다른 사람과 더불어 협력하는 관계를 끌어내어 기독교 전파에 성공하였다. 그후 마지막에는 헬라의 디아나 여신을 우상으로 설파하다가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음으로써 순교하였다. 이처럼 디모데는 바울의 수제자이자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을만큼 성실하게 초기 기독교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였고, 바울이 걸어간 순교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놀라운 인내력과 성실함, 신앙심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세계 속 유일한 냉전체제의 희생이 되고 있는 남북 분단을 극복하고, 비핵화를 성사시켜, 남북 간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체제를 구축시킴으로써 평화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러시아의 협력을 구한 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도움을 구하면서 유럽연합의 전폭적 지지를 촉구한 뒤, 마지막으로 로마 교황청으로 달려가 종교적 영향력까지 총동원하려는 간절함을 실천하고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남북분단이라는 조국의 비극을 종식시키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예방한 자리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교황청의 지지를 호소하고, 북한을 방문해 달라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의사를 전달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의 사도”로 상징된다. 평화의 사도로 불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북한을 방문한다는 것은 한반도에 전쟁이 종식되었음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더 이상 군사적 적대행위를 계속한다거나 핵무기 개발을 통한 전쟁준비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천명을 보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전쟁의 종식, 정치적 외교적 평화체제의 도래, 종교적 평화체제의 구축은 점증적 평화체제로의 이행을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실증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러한 방북의사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외교적 압력이 될 것이고, 미국 공화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에 대한 무언의 압박감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동안 성역시 되던 사립유치원이 발가벗겨지고 있다. 사립유치원이 똘똘 뭉쳐 지역구에서 몇 표의 선거권 행사로 당락을 결정할 수 있다는 으름장 앞에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등 선거로 뽑히는 공직자들이 벌벌 떨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의 비위사실이 발가벗겨지고, 학부모의 분노가 하늘을 치솟자 기고만장하던 그들의 모습이 게눈처럼 사라졌다. 강제로 벗겨지는 자의 비극이다. 정치권의 비리척결로 치닫던 촛불정신이 이제 우리 내부의 생활비리척결로 옮겨가는 첫입구가 사립유치원부조리척결문제가 아닌가 싶다. 생활형 비리가 곳곳에 만연되어 있다. 국민 모두가 구정물 통에서 놀고 있었던 꼴이다. 누가 누구를 탓하기 전에 모두가 구정물 통에서 한통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비리가 있는 사립유치원 명단을 공개하였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되어 간다. 아주 작은 것, 사립유치원을 아주 작은 것이라고 생각했더니 아주 큰 것이었다. 전국의 모든 어린이가 관련되어 있고, 그들을 볼모로 학부모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음으로 양으로 불이익을 받아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유치원 경영자들의 배만 불려왔던 것이다. 모두가 발가벗은 세상에서는 감출 것이 없다. 예의와 문화, 에티켓과 체면에 감추어진 진면목을 모두 한 번쯤은 발가벗고 보여줘야 하는 세상이 올 모양이다. 깨끗이 씻자, 씻어서 남 주나, 씻자, 깨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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