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엄상익의 변론 문학 -허망한 인생 (진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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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엄상익의 변론 문학 -허망한 인생 (진정서)
  • 엄상익
  • 승인 2018.09.2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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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소설가

※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 1.
존경하는 교도소장님

진정을 올리는 저는 지난 삼십년간 뒷골목에서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리고 변호사업을 해 온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 세월동안 수많은 여러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운명이라는 게 이렇게 허망할 수도 있구나 하고 느끼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 그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수인번호 188번의 허기천입니다.
그는 젊은 날 26년을 세상의 나그네로 떠돌았습니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와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지금 감옥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삶의 시간 대부분을 그냥 흘려버렸다고 보여 집니다. 어떻게 보면 소설 속의 장발장 보다 더 캄캄한 터널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변호사였던 저는 지금도 그가 왜 평생을 그런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그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그는 파렴치한 사기꾼이 아닙니다. 깊은 참회를 한 올곧은 양심의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를 만났을 때부터 재판의 경과까지 좀 더 사정을 자세하게 말씀드린 후 한 가지를 요청하려고 합니다.

# 2.
26년만의 귀향

2016년 말경, 찬바람이 불던 12월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허기천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필리핀에서 불법체류자로 수용소에 있다가 한국으로 송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지금 중랑경찰서에 잡혀 있다면서 도와달라고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한 밤 중에 저는 아내가 운전하는 카니발을 타고 한강다리를 넘어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전에 있던 경찰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경찰서는 도심의 외곽으로 이전해 있었습니다.
밤늦게 경찰서에 도착했습니다. 파란 수은등이 비치는 텅 빈 경찰서 수사과 구석에서 초라한 모습의 노인이 조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26년 만에 보는 허기천 이었습니다. 그는 변호사인 저의 법과대학 동기였습니다. 대학시절 그의 할아버지가 시주를 해서 건축한 강원도 깊은 산골의 절에서 함께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책 보따리와 이불보따리를 지고 경기도 광주의 골짜기에서, 또 청평의 눈 덮인 강가에서 한 철을 보내면서 법서를 읽기도 한 사이였습니다.
그렇게 살던 그가 사업을 시작하고 몇 년 후 부도가 나 세상을 떠도는 고독한 도망자가 된 것입니다. 그를 보면서 떠오르는 비슷한 다른 사건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고시공부를 하던 한 사람이 경미한 사건으로 조사를 받게 됐습니다. 벌금 정도로 간단히 해결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겁을 먹은 그는 일생을 도피생활로 보냈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서민아파트의 경비를 보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 냄비에 라면을 끓이는 모습이었습니다.

허기천의 운명이 그와 비슷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부도가 날 것 같으니까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굶으면서, 험한 노동을 하면서, 사회의 밑바닥에서 삼십대 말부터 육십대 중반까지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육십 대가 훌쩍 넘어 불법체류자로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한국으로 송환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의 인생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설렁탕 한 그릇 사먹을 돈이라도 있어?”
제가 물었습니다.
“있지. 만 원짜리 두 장 있어.”
그가 씩 웃어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슬퍼보였습니다. 제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범죄내용이 뭐야?”
그가 도망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나도 전혀 몰라. 자금을 관리 했던 동생이 알지”
“사장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솔직히 나는 유럽을 다니면서 수출하는 물품의 오더를 받는 데만 전념했어. 회사 내부의 일은 동생이 다 알아서 했어.”

그는 원래 그런 성격이었습니다.
며칠 후 그의 동생이 저의 법률사무소로 찾아왔습니다. 핏기가 없는 하얀 얼굴에 곧 쓰러질 듯 허약해 보였습니다. 허기천의 동생은 먼저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원래 심장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일찍 죽을 몸인데 부자 할아버지가 수술을 받게 해 줘서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몇 번의 심장수술을 하고 또 뇌수술로 머리의 일부분 뼈도 드러냈어요. 그래서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녀요. 집안에서 제 구실을 못한 놈이죠. 그렇지만 장남인 형은 집안에서 대접받는 장손이었어요. 공부도 잘하고 해서 온 집안이 떠받들었어요. 법대를 가고 고시공부를 해서 집안에서는 뭔가 해 낼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눈이 무섭게 생겼다고 남들이 눈 값 할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됐네요. 형이 도망자가 되어 평생을 비참하게 살았어요. 거기서 사흘을 굶기도 했다고 그래요. 제가 징역을 다 살고 나와서 이십 년 전에 필리핀으로 갔어요. 형에게 한국으로 돌아가 자수해 징역을 살고 다시 출발하라고 권했어요. 막상 닥치니까 감옥도 견딜만 하더라구요. 그런데 형은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는 그 사이 기소장 내용과 예전의 수사기록을 읽었다. 그걸 확인해 보기 위해 그의 동생에게 물었다.
“기소된 내용을 보면 물품을 선적하지 않고 선하증권을 만들어 은행에 네고해서 돈을 빼었다고 하던데?”
검사는 선하증권위조와 사기죄로 기소했습니다. “그 시절은 더러 그런 경우가 있어요. 컨테이너를 배에 적재하고 출항하는데 이삼일 시간이 있었어요. 생산이 지체되는 경우 먼저 선하증권을 발급받고 선적은 하루나 이틀 후에 하는 거죠. 공장에서 아무리 열심히 작업을 해도 시간을 맞출 수 없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런 때는 먼저 선하증권을 받고 그 뒤에 선적을 하는 거죠. 그때 자금담당인 제가 선하증권을 받아 은행에 네고해서 수출대금을 받았어요. 그때 형이 유럽에 오더를 받으러 갔었죠.”

대학생 시절 보았던 홍천의 그 형제의 집이 떠올랐습니다. 과수원이 있고 시골극장을 소유하고 있던 시골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지금 어떻게 사세요?”
“형이 담보로 넣었던 과수원이고 임야고 밭이고 모두 남의 것이 됐어요. 원래는 할아버지가 고생하면서 일구신 재산이었죠. 지금 치매를 앓으시는 어머니와 몸이 성치 않은 팔십대인 아버지를 제가 모시고 반지하방에서 살고 있어요. 동사무소에서 주는 노인들 지원금으로 먹고 살아요. 형이 잡혀서 돌아오는 바람에 저까지 다시 공범으로 기소가 됐는데 감옥에 다시 들어가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누가 돌보나 막막한 심정입니다.”

# 3.
사 업

1983년경 공군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허기천은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군 생활을 미군과 함께 한 그는 유창한 영어회화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무역회사를 하는 친구가 바이어들과 상담을 하는데 통역을 해 달라고 연락을 했습니다. 그게 계기가 되어 그는 사업가로 인생의 궤도가 수정되었습니다.
1984년경입니다. 허기천은 집안에서 자금을 받아 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허름한 건물 지하실 35평을 빌렸습니다. 벽에 선반을 매달고 여기저기 조립기구를 배치한 봉제공장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동네아줌마들을 30명가량 불러다 카 스피커와 카 스테레오 부품을 조립하게 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유럽의 판매상 주소록을 보면서 영문으로 된 상품 안내 편지를 썼습니다. 얼마 후 그는 샘플을 가방에 넣고 유럽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파리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다니면서 현대판 장돌뱅이가 되어 자동차 소품을 파는 현지 상점을 찾아다녔습니다.
1986년 3월경 프랑크푸르트의 카 스테레오 가게에서 첫 거래가 트였습니다. 사십대 쯤의 독일인 점포 주인에게 샘플을 보여주면서 손짓 몸짓까지 더해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제품의 사양설명서를 뒤적여 보던 독일인이 가격을 물었습니다.
“스피커 한 페어에 8불을 주면 수출하겠습니다.”
스피커 한 페어 당 자재 값만 6불 50센트였습니다. 거기에 인건비, 운송비등을 생각해서 책정한 가격이었습니다. 남을 게 없었습니다.
“한 컨테이너를 6불로 가격을 내려주면 두 컨테이너 주문하죠.”
독일인이 싱긋 웃으면서 제안했습니다. 그 가격이면 자재 값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6불 50센트면 자재 값도 되지 않지만 두 컨테이너를 수입한다면 그 가격에 해 주겠습니다.”

그렇게 사업이 시작됐습니다. 이어서 오스트리아의 카 스피커 판매상한테서도 주문을 받았습니다. 행운이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귀국해서 자재업체를 불러 주문받은 판매금액을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자재업체에서는 계속 거래를 해 준다면 카 스피커 한 페어 당 자재비를 4불80센트까지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진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카 스피커를 한 컨테이너에 찰 만큼 조립생산 하는데 처음에는 2주일이 걸렸습니다. 차츰 조립기술이 숙련됨에 따라 4일 만에 한 컨테이너 양의 카 스피커가 생산됐습니다. 2년이 되면서 수출액은 550만 불이 되고 그 다음해에는 750만 불이 됐습니다. 그는 서울 공릉동에 200평 공장을 빌려 카 스피커를 생산하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집안의 소유인 홍천의 임야와 과수원 그리고 전답을 담보로 제공하고 은행융자를 받았습니다.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 것 같이 잘 나갔습니다.

대학동기로 고시공부를 같이 하던 저는 1986년 봄경 서소문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절에서 고시공부를 같이 하던, 대학교수가 된 김영호 그리고 허기천과 더러 만나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사업가가 된 허기천은 기운차고 호기로운 모습이었습니다. 무역을 하면서 국내외 정세에 눈이 띄어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반국민은 해외에 나가기가 힘들던 시절이었습니다. 나간다고 하더라도 안기부에서 반공교육을 받아야 출국이 허가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허기천은 유럽의 전역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자신의 공장에서 만든 제품들을 팔았습니다. 여유가 생기면서 그는 대학시절 은사나 친한 친구인 김 교수에게 유럽여행을 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그의 사업은 급격하게 번창해 갔습니다. 그가 고향인 강원도 홍천에 대형 공장을 짓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얘기 했습니다. 고향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꿈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순항을 하던 그가 작은 암초에 걸렸습니다. 대형공장을 지으려고 건설업자에게 거액의 약속어음을 줬는데 그 업자가 어음을 돌리고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 어음의 지급기일이 다가오자 자금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불행은 3박자로 온다고 합니다. 수출하던 카 스피커가 덤핑판정을 받고 무거운 관세가 부과됐습니다. 수출길이 막힌 것입니다. 갑자기 세무조사팀이 닥쳤습니다. 부도사태가 다가오는 걸 본 그는 다급한 김에 돈 몇 백 달러만 가지고 필리핀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담보로 제공된 집안의 부동산들이 경매가 됐습니다. 집안 부동산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를 위해 연대보증을 섰던 친구인 김 교수의 아파트도 경매로 날아가고 그 후 이십여 년 동안 월급의 반액만 수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경제부 기자인 친구를 통해 대출을 부탁했던 저도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았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 후 26년 동안 그의 소식은 끊겨 있었습니다.

# 4.
재 판

서울북부법원 602호 법정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삼십년 전에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그를 위한 증거나 정상참작 자료는 없었습니다. 당시 관계자들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세대가 바뀌어 그 시절의 무역업자 상황을 알 리가 없는 삼십대의 젊은 여검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검사가 공소장을 보면서 주신문을 시작했습니다.
“선적이 되지도 않았는데 선적된 것처럼 허위의 선하증권을 꾸미셨죠?”
“자금과 경리담당인 동생이 그랬을 겁니다. 사실 국내 일은 동생에게 도장과 위임장을 전부 맡겨놓고 저는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서 오더 받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피고인은 사장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사장이 그런 일을 모른다고 하면서 경리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되는 건가요?”
“-------”
허기천은 더 이상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허위의 선하증권을 거래은행에 넣고 돈을 빼냈지요.”
“그렇습니다.”
“피고인으로 인해서 부품을 납품한 업자들이 돈을 받지 못한 사실 인정하시죠? 그건 사기죄를 범한 거죠?”
“다 인정합니다.”
“선하증권을 작성한 해상운송알선업체의 대표이사 및 직원과 잘 알고 있었죠? 그래서 허위의 선하증권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거 아닌가요?”
“해상운송알선업체의 사장이나 직원은 제가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인데도 은행에 사기를 해서 거액을 빼내는 수단인 가짜 선하증권을 만들어줬다는 얘기인가요?”
“진짜 모릅니다. 자금은 동생이 담당해 왔습니다.”
“선적도 되지 않은 채 선하증권이 발급된 사실을 몰랐다고 하는 겁니까?”
“독일에 가 있었으니까 몰랐습니다. 공소장에 나오는 사실들은 사실 모르겠습니다.”
“당좌수표를 들고 사채업자에게 찾아가 지급기일이 된 어음을 당좌수표하고 바꾸어 달라고 한 사실은 인정하시죠?”
“그 어음은 홍천의 공장을 지어달라고 준 어음이었습니다. 건설업자가 공장은 짓지 않고 그 어음을 사채업자에게 할인을 한 거였습니다. 결국 그 자금 때문에 부도가 났는데 경리를 맡았던 동생이 제 당좌수표를 떼 가지고 가서 바꾼 겁니다. 저는 같이 가지 않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알지 못합니다. 저를 부도나게 한 건설업자는 인도로 도망을 가서 공장을 하면서 잘 산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은행과 사회에 큰 피해를 끼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검사가 그를 다그쳤습니다.
“은행에 담보로 들어갔던 집안의 부동산이 다 경매로 넘어갔습니다. 경매신청이 안 된 땅들도 다 채권자에게 넘겼습니다. 보증보험의 빚에 대해서는 제 연대보증을 섰던 친구의 집이 경매되고 이십 년간 월급을 압류 당했습니다. 배상은 다 된 셈입니다. 저는 입이 있어도 피해를 입힌 친구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제품 오더를 받기 위해 베를린으로 떠났는데 자금을 담당하던 동생이 친구인 김 교수를 찾아가서 보증을 서 달라고 하는 걸 알았다면 제가 당연히 말렸을 겁니다. 그런 위험에 왜 빠뜨리겠습니까. 동생한테 도장도 맡기고 모든 걸 맡겼는데 제가 몰라서 챙기지 못했습니다. 우리 형제의 철저히 챙기지 못하는 그런 점이 오늘 이런 신세가 되게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장이 모든 걸 동생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자세가 옳다고 보시는 건가요?”

젊은 여검사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보였습니다. 그의 말을 전부 거짓말로 인식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유일한 증인이 다시 같이 기소된 동생뿐이었습니다. 불구속 기소된 동생은 다시 감옥으로 갈까봐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동생은 일개 경리직원에 불과한 자신이 무얼 알겠느냐는 진술을 했습니다. 형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법정에서 부인하는 것 같이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지막에 재판장은 검사에게 구형을 하라고 했습니다.
“징역 11년에 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기행위를 하고 악질적인 해외도피를 한 사업가에게 내려진 구형입니다.
“지금 얼마라고 하셨습니까?”
변호사였던 저는 놀라서 검사에게 되물었습니다.
“징역 11년입니다.”
검사는 사무적으로 냉랭하게 말했습니다.
“변론 하시죠”
재판장의 명령이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변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본 변호인은 피고인을 대학 1학년 입학식 때 처음 봤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홍천의 부자 집 손자로 패기만만한 얼굴로 법대생 모임의 사회를 보았습니다. 유신반대 데모가 한창이던 대학시절 휴교령이 내려지고 그의 할아버지가 시주를 했다는 절에서 같이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촛불 아래서 형법총론을 읽는 그에게는 정의감이 가득 찬 것 같았습니다. 사회의식이 강했던 그는 많은 것을 알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사법시험 준비과정에서 운명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친구로서 옆에서 지켜 볼 때 그는 장사꾼이 아니었습니다. 원칙과 양심을 지키는 사업가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대에는 군인 대신 상품이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인식이었습니다. 그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지금까지 그에 대해 남아있는 독특한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귀국하는 공항에서 검색대 앞에서 열린 그의 여행 가방 안에는 컵라면 하나만 들어있는 광경이었습니다. 피고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해외 세일즈에 몰입하는 그는 국내의 자금 문제는 모두 동생에게 맡긴 게 사실이라고 보입니다. 할아버지가 자본을 대준 회사는 가족경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가끔 회사에 나와서 경리부장등 직원들의 근무태도를 살피기도 했습니다. 장남이라 사장이 된 피고인은 해외 세일즈를 맡았습니다. 사장의 도장과 명판은 모두 경리를 담당한 동생에게 맡겼습니다. 유럽의 출장에서 돌아온 허기천은 부도가 닥친 걸 비로소 알았습니다. 여기서 그의 나약함이 일부 드러납니다. 그는 필리핀으로 갑니다. 치밀하지 못한 그는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도 챙기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도망자로 그는 십년이 지나고 이십년이 지나고 노인이 되어 돌아와 구속이 됐습니다.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대학시절의 인연으로 제가 변호를 맡았습니다. 재판 도중 그의 가족한테서 전화 한통 걸려오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에서 핵심 쟁점은 피고인이 사장으로서 동생과의 공모성입니다. 피고인은 정말 몰랐다고 하고 있습니다. 동생은 어정쩡하게 진술을 했습니다. 형과 동생의 진술이 다른 것입니다. 자금을 맡았던 동생은 애초에 능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만기가 돌아올 어음이 바로 이삼일 전인데도 자금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고 보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또 나중에 주어도 될 공사비는 지급하고 부도의 위험에 대비할 자금은 남겨놓지 않았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경우였습니다. 치밀하지 못한 실수가 연속되고 있었습니다. 형과 동생의 진술 중 누구의 말을 믿느냐가 이사건 재판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허위의 유가증권 문제입니다. 선적을 하지 않고 선하증권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의문입니다. 실제로 선적되지 않았다면 운송회사 직원은 당장 항의를 하고 문제를 제기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은행은 수출대금을 지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선적이 되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이 시점에서 그걸 입증할 방법이 없는 실정입니다.”
변호사였던 저의 말은 먹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법원은 허기천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습니다.

# 5.
참 회

오후 3시의 태양이 오금역 주변에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저는 구치소를 가는 길을 몰라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죄송하지만요, 성동구치소로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형사사건을 맡아본 지 오래되었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철조망과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블록담이 보였습니다. 그 뒤로 눈에 익은 우중충한 구치소의 회색건물이 보였습니다. 오랜만에 들어간 구치소의 철문 옆에는 경비교도대원 대신에 출입카드를 인식하는 전자기기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유리박스로 된 접견실에서 허기천을 만났습니다. 갈색의 수인복을 입은 그의 얼굴은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고 볼이 홀쭉했습니다.
“지내기가 어때?”
위로하는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신체검사를 했는데 혈압이 높고 당이 있으니까 바로 병동에 배치하더라구. 그런데 같은 병동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믿는 사람이야. 나한테 성경을 주면서 같이 읽고 기도하자는 거야. 그래서 그 사람들을 따라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 그런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야. 감옥에 들어와서 그런지 조금만 읽어도 거기에 나오는 게 바로 나의 얘기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그 성경 속의 말들이 살아서 나한테로 튀어나오는 것 같아. 법원에 소환되어 갈 때였어.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읽는데 그 속에서 ‘흔들리지 말라’라는 말이 튀어나와 내 심장으로 쑥 들어오는 거야. 그래서 그런지 재판을 받아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어. 성경이 살아서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이상해.”

절망으로 가장 어두운 시절 그에게 빛이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습니다.
“맞아, 일제시대 오산학교를 설립한 이승훈 선생은 감옥 안에서 신약을 백 번 이상 읽었고 구약도 마흔 일곱 번 읽었어. 어려서 머슴 살 때 경험을 살려서 감옥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남들이 싫어하는 똥통을 청소하고 빈 시간이면 간수들이 주는 재료로 봉투 만들기나 새끼 꼬기를 열심히 했다고 하더라구. 그렇게 감옥을 살다가 석방될 때쯤이 되니까 새로운 맑은 영혼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해. 간디 자서전에서 본 건데, 간디나 그 제자들은 정식 수행처인 아슈람보다 감옥 안이 더 좋은 수행 장소였다고 해. 거기서 성경도 읽고 바가바드기타도 읽었지.”
“이제 그럭저럭 적응이 되어가는 것 같아. 병동에 있다가 방을 옮겼는데 같은 방에 있는 다섯 명이 모두 육십이 넘었어. 내가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데 나보다 위인 사람은 횡령죄로 들어오고 나같이 사기가 한명 더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폭력 그리고 또 한사람은 음주운전이야. 같이 잘 지내고 있어.”
그의 일상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면 방을 청소해. 그런 다음 감방에 있는 모두가 성경을 펴들고 예배를 봐. 전부 믿는 사람들이야. 그리고 아침을 먹지. 그 다음은 책을 보든지 하다가 오후 한시가 되면 한 시간 운동을 할 수 있어. 그리고 오후에 다시 책을 보고 저녁이면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는 거지.”
“밥이나 반찬은 먹을 만해?”
“우리끼리 ‘박근혜 대통령도 이 밥을 드시는데 뭘’ 하고 서로 위로해. 먹을 만 해. 그리고 저녁에 틀어주는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이 방송을 서울구치소에 계시는 박근혜 대통령도 보시는데 우리는 그저 감사하고 봐야지’ 하고 위로를 받아.”
그가 씩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는 도망자생활을 할 때보다 차라리 마음이 편한 것 같았습니다. 그가 말을 계속했습니다.
“오늘 네가 올 줄 알았어.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데 오늘 네가 온다고 내면에서 누가 가르쳐 주는 거야. 그런 느낌이 오는데 교도관이 와서 변호사 접견이라고 대기하라고 하는 거야. 요새 그렇게 내면에서 내게 가르쳐 주는 존재가 있어. 감옥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이 오히려 마음이 정화되고 즐거운 것 같아. 틈이 나면 오히려 남을 위로해 주기 시작했어. 어제 옆방에 나같이 필리핀으로 도망갔다가 잡혀와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중형이 선고됐어. 다른 구치소로 이감을 가는데 운동시간에 내가 만나 위로를 해줬어.”

그에게 성령이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성령이 흘러오면 우리의 영혼은 필라멘트같이 환히 빛을 발하고 마음이 밝아진다고 합니다. 말하는 그가 연신 하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눈물은 슬픔도 원망도 아닌 기쁨의 눈물 같았습니다. 그 때 저에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내가 시키는 거 한번 해보지 않을래?”
“뭐?”
“성경속의 시편 23편을 천 번을 써 봐.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몰라.”
그 소리는 예전에 모 부장판사로부터 들었던 얘기였습니다. 지방의 고등학교에 다녔던 그는 어느 날 담임선생으로부터 시편 23편을 천 번 쓰면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했더니 그 고등학교가 생긴 이래로 처음으로 서울법대에 합격을 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사법연수원을 다닐 때 역시 시편 23편을 천 번을 쓰게 했더니 연수원을 수석졸업하고 판사가 되어 서울에 근무하게 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간절히 염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미신 같은 얘기지만 종교란 그런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키는 대로 할게”
그가 순순히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 하얀 공책에 그가 성경속의 시편 23편을 또박또박 단정한 글씨로 천 번을 써서 보내 왔습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쓴 것입니다. 다음번 그를 봤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 속에서 기쁨이 올라오는 것 같아. 이제 이 감옥 생활도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고 이미 인생을 다 허비했는데 더 이상 삶에 아무 미련이 없어. ‘새벽기도’라는 작은 잡지를 다른 사람이 주길래 봤어. 시편 23편에 대한 해석이 나와 있는데 그 중에 주의 지팡이와 채찍이 나를 지켜주신다는 말이 있잖아? 그게 바른 길로 가지 않을 때 하나님이 지팡이와 채찍을 사용해서 안전한 곳에 가게 해서 보호하신다는 뜻이래. 엄 변호사 네가 쓰라고 해서 시편23편을 천 번 쓰면서도 그 걸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주님은 채찍을 써서 나를 이 감옥에 들어오게 하시고 이 안에서 나를 만나주신거야. 친구가 이렇게 무료변호해 주는 것에 대해 그동안 감사인사가 없었어. 미안해. 정말 고마워.”
그의 몸은 고목같이 늙어가지만 영혼은 이제 파릇한 연두색 새싹을 틔우며 살아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소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판이 확정되면 따뜻한 남쪽의 교도소로 갔으면 좋겠어.”

# 6.
청 원

존경하는 교도소장님.
얼마 전 교도소로 면회를 갔던 허기천의 동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형이 버섯을 재배하는 교육을 받고 싶은데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이를 먹었지만 교도소 안에서 형이 계속 공부를 하게 청원을 해 달라는 얘기였습니다. 그 청원을 드리기 위해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됐습니다. 판사가 가진 법의 저울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법은 그를 해외로 도피한 파렴치범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친구이자 담당 변호사였던 저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순간의 어리석음과 두려움으로 허망한 인생을 보낸 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의 변호사였던 제가 보기에 허기천은 감옥 안에 있지만 그 양심은 바깥세상의 누구보다도 깨끗하다고 확신을 합니다. 만약 판사들이 그의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면 그는 무죄가 선고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죄는 오히려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처럼 세월을 낭비한 죄가 더 클 것입니다. 노인이 된 지금이라도 그에게 다시 한 번 작은 삶의 보람을 주실 수는 없는지요? 그가 버섯을 재배하고 식물을 키울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공부하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교도소의 교육여건이 어떤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필요하시다면 제가 조금의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 삼십년 간 법의 밥을 먹으면서 정읍 방장산 기슭에 임야를 조금 사 두었습니다. 그 지역은 산삼이나 버섯이 심어져 있습니다. 버섯재배나 그 교육장이 없다면 교도소에서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의사가 있습니다. 또한 제 주변에는 친구인 치과의사가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하기도 합니다. 인적 자원도 보낼 수 있습니다. 저의 청원에 교도소장님의 좋은 화답이 있기를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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