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사법부의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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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사법부의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
  • 오시영
  • 승인 2018.05.1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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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속도와 방향은 삶의 쌍두마차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방향이 우선이다. 방향이 맞아야 속도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방향이 잘못되면 속도가 빠를수록 목적지로부터 이탈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생에 있어 목적지란 없을 수도 있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 도착한 곳이 인생의 목적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설정한 방향대로 직선으로 날아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꼬불꼬불한 길을 가다 도착한 쉼터가 결국 목적지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최종 목적지가 아닐지라도 방향은 정해져야 한다. 방향을 정하지 않으면 정지, 멈추어 서서 무한 침묵의 진공상태에 빠지게 된다. 까닭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작위와 무작위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 모두는 목적지, 즉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물론 방향이 정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속도다. 우리는 속도 하면 빠름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느린 속도가 빠른 속도를 이길 때도 있다. 빠른 속도는 추월을 허용한다. 추월은 목적지에 짧은 시간으로 도착할 수도 있지만, 목적지를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느림이 의미를 갖는 순간이다.

속도와 방향에 꾸준함을 더한다. 가장 완벽한 실행은 올바른 방향에 올바른 속도로 꾸준함이 더해질 때 이루어진다. 꾸준함은 끈기일 수도 있고, 집념일 수도 있다. 촛불정신은 우리 모두를 “꾸준함의 광장”으로 나오게 했다. 만일 촛불혁명이 한두 번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오늘과 같은 변화된 대한민국을 결코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번으로 안 되니 두 번, 두 번으로 안 되니 세 번 해서 꾸준함을 보여 촛불저항이 승리할 수 있었다. 구약성경 여호수아 6장에는 “여리고성 함락”이라는 신기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에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 끝에 정착지로 정한 곳이 여리고성 근처이다. 여리고성을 넘어야만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땅에의 정착이 가능할 수 있었다.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죽고 난 후 그를 승계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이 너무 견고하여 정복할 수 없다며 두려움과 좌절감에 빠져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니 “이스라엘 백성이 매일 한 번씩 6일 동안 성을 돌고, 일곱째 날에는 한꺼번에 일곱 번을 돌면서 나팔을 불고 백성들이 한 목소리로 함성을 지르라.”는 음성이 들려 그대로 했더니 마침내 그 단단한 여리고성이 무너져 정복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다.

필자의 논리적 사고로는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촛불혁명을 보면서 저 성경의 기록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으니 수십 년 신앙생활보다 촛불저항의 현실성이 더 가르침에서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장정이 70만 명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고, 가축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무리가 하루에 한 번씩 침묵으로 그 성 주변을 돌다가, 일곱째 날에 한꺼번에 일곱 번을 돌면서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질러대니 두려움의 대상이던 여리고성과 그 병사들이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꾸준함에 두려움을 느끼고 무너져 내렸던 것은 아닐까 싶다. 6일 동안 침묵하며 성 주변을 돌던 무리가 마지막날 한꺼번에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질러대니 질려버린 것이다. 꾸준함은 그래서 무섭다. 약자가 죽을힘을 다 해 한 번 빨딱 하는 저항은 강자들이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다 말겠거니 싶기 때문이다. 엄청난 자본력과 권력을 가진 강자는 그러한 한 번의 저항 정도는 거뜬히 물리칠 힘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피해도 경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불독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강자도, 어떠한 제도도 무서워하기 마련이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 광고회사 직원과 미팅 도중 광고회사 직원들이 원하는 광고 콘셉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물 컵을 집어던지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뿜어댄 행위가 폭행죄와 업무집행방해죄 성립 가능성이 높은데, 폭행죄가 반의사불벌죄여서 피해자들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의사를 표시했기 때문에 폭행죄에 대해서는 아예 공소권이 없어 처벌할 수 없고, 업무집행방해죄는 그 광고 업무가 자신의 업무이기도 하여 자신의 업무를 자신이 방해할 수 있는가 여부를 놓고 법리상 다툴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이 적합하지 않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대한민국 사법부는 여전히 1960년대의 후진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아주 적은 재물을 훔친 절도범의 경우에도 징역형 등의 무거운 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수백억 원의 횡령이나 배임 또는 다단계사기피해 등과 같은 경우 석방되는 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먹으로 한 대 사람을 때린 것은 무거운 형이 선고되는데 반해 평생 잊혀지지 않을 욕설이나 저주성 막말을 듣고 평생 심리적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는 범죄에 대해서는 물리적 외형력이 없었다는 이유로 아주 경미한 형이 선고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뚜렷한 범죄 피해자가 존재하는 경우는 엄하게 처벌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피해자인 경우에는 원성을 들을 일이 적으므로 가벼운 형을 선고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사법부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성의 요람이자 사법정의를 확립하는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가 생기는 범죄, 정신과 영혼을 갉아먹는 언어폭력 범죄 등을 엄히 처벌하는 새로운 인식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물리적 행위 형태에 매몰되어 있을 것인지 사법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조현민의 폭행은 대한항공이라는 어마무시한 재벌의 압력이 가세된 폭력이다. 그리고 재벌기업을 등에 업고 힘이 약한 광고업체에 대해 광고 계약을 깨 버리겠다는 협박이기도 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그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영혼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면서도 말도 꺼내지 못했고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겁을 먹었다. 대한항공 익명의 직원이 그러한 범죄행위에 대한 녹음파일을 공론화하였기에 세상에 저렇게 못된 범죄가 알려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범죄행위가 오랜 기간 반복 누적되어 왔음에도 일회성 범죄로 처리해 버린 것도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현민이 집어 던진 유리컵은 “위험한 물건”에 해당되고, 이러한 위험한 물건으로 가한 폭행은 단순폭행죄가 아닌 특수폭행죄(형법 제261조)에 해당한다. 단순폭행죄(형법 제260조)는 반의사불벌죄이지만, 특수폭행죄는 반의사불벌죄가 아니다. 그리고 형량도 단순폭행죄보다 높다. 특수폭행죄의 행위 형식은 반드시 피해자를 위험한 물건으로 직격으로 가해하지 않더라도, 유리컵을 집어던져 맞지 않는 경우에도 성립한다. 사법부는 조현민에 대한 영장기각을 하면서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을 보았던 것이다.

사법부는 조현민의 행위를 단순히 물이 든 유리컵 하나 집어 던진 정도로, 매너리즘에 빠진 사법 판단을 내리고 말았지만, 법조인으로 오랫동안 인권 변호를 맡아 왔던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엄청난 범죄행위로 인식이 된 모양이다. 한 현상을 바로보고 느끼는 강도가 완전 달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4일 수석·보좌관회의 도중 “몰카범죄와 데이트폭력 등의 범죄에 대해 강력한 대처”를 요구했다. 문 대통령은 “몰카범죄, 데이트폭력 등은 여성의 삶을 파괴하는 악성 범죄”라고 정의한 후 “우리 수사당국의 수사 관행이 조금 느슨하고, 단속하더라도 처벌이 강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며 사법부의 후진적 인식을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수사기관들이 조금 더 중대한 위법행위라는 인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수사기관이 지나치게 방만하게 사건을 취급하다 보니 그러한 폭력 문제가 일상화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사법부는 새로운 각성이 필요하다. 현재 가장 사회적 개혁이 늦은 기관이 검찰과 법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강고한 권력의 카르텔 안에 안주하였고, 칼자루를 휘두르기만 했을 뿐 칼을 직접 맞는 것으로부터는 멀리 피해 있었다. 그 한 예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항소심 재판장이었던 정형식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에 대한 청와대의 민원사항 접수사실의 통지에 대한 사법부의 반응이다. 법률은, 법률해석은 사회적 변화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사회변화에 따라 간통죄가 폐지되고 혼인빙자간음죄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사법적 해석의 정당성을 검찰과 법원만이 독점하던 시대도 지났다. 법관과 검사가 될 수 있는 변호사 자격이 있는 사람만도 3만 명에 이른다. 그 변호사들 중에는 전직 법관과 검사도 많고, 형법 또는 민법 등 분야별로 현직 판검사보다 더 뛰어난 법률해석능력을 가진 이들도 많다. 나아가 대법원종합법률정보망 검색을 통해,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의 검색을 통해 전 국민이 사건별 판례를 검색하고 종합적 결론을 토론하는 집단지성이 발휘되고 있다. 어찌 보면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검찰과 사법부라는 보호받는 좁은 우물 안에 갇혀 자기들끼리만의 리그에서 세상의 변화를 미처 관조하지 못하는 후진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청와대는 정형식 부장에 대한 민원 접수사실을 아주 조심스럽게 통지하였다. 청와대 게시판에 20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그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판결이 국민의 법 감정에 맞지 않다면서 그렇게 비상식적인 판결을 내리는 과정에 문제점은 없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청원에 동의하였고, 그러한 청원이 있었음을 알려 준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한 청와대의 민원처리에 대한 결과 통지는 정형식 부장판사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안에 공통적으로 대응해 온 일련의 일관된 조치였을 뿐이다. 그런데 사법부는 이러한 통지를 받았으면 우선 겸허히 그러한 국민적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반성하고 살펴보겠다는 사과를 먼저 하는 것이 옳다. 무조건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하였다고 발끈할 일이 아닌 것이다. 청와대가 단독으로 그러한 결정을 통지하였다면 법관의 독립성 침해를 문제 삼아 당연히 항의할 일이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청와대 게시판에 20만 명이 넘게 청원하였고, 청원의 결과를 전달한 것에 불과한데도, 다시 말해 국민들이 집단으로 사법부에 항의한 것이지 행정부가 항의한 것이 아님에도 “법관의 독립이라는 낡은 외투”를 내세워 방어막을 치는 것은 봄이 와 버린 세상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변명일 뿐이다.

법관의 독립은 무엇보다도 지켜져야 한다. 그것은 외압의 금지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앞서 물리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의 심각성이 변하고 있듯이 현대적 의미의 법관의 독립은 “양심의 독립”이 더 큰 의미를 갖기에 이르렀다. 과연 정형식 부장판사가 “판사로서의 양심”에 부합한 판결을 내렸는지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과 내부자들의 비판이 있어야 한다. 법관의 독립이 무소불위의 권한 행사를 용인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지 않는가? 사법부 독립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법관들 자신이다. 그들이 개인적 양심이라고 내세우는 양심이 자본에 물들어 있다면, 재벌의 양육에 훈치되어 있다면, 권력에 순치되어 있다면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양심은 객관적 양심이어야 한다. 많은 국민들이 동의하고 인정하는 양심이어야 한다.

문 대통령이 지적하였듯 “옛날에 살인, 강도, 밀수나 방화 같은 강력범죄가 있었다면 시대가 변하면서 이제는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몰카범죄 등이 강력범죄”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래서 “과거에는 있을 수 있는 범죄로 인식해 처벌의 강도가 낮았던 것을 이제는 엄하게 처벌”해야 하는 시대적 변화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법부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지각생이었음을 반성하고, 새로운 현대적 범죄의 중요도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사소한 물컵 던지기 범죄가 일파만파가 되어 수백억 원의 탈루상속세 범죄, 관세위반, 비자금조성 등 수많은 대형범죄사실의 단초가 되고 있다.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으면 자신이 업신여김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지 않은가? 그대는 사람인가? 나도 사람이다. 우리 모두 사람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사법부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판결을 내리는 양심적 법관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이가 어찌 법관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묻고 묻는다. 그게 방향이고 속도이고 꾸준함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일이다. 그들의 정의로운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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