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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 아픈 엄지발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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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 아픈 엄지발톱 이야기
  • 신희섭
  • 승인 2018.01.26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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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베리타스법학원 전임

엄지발톱이 아파본 적이 있는가? 정확히는 엄지발가락 끝이 아픈 것이다. 엄지발톱과 살이 만나는 부분에 염증이 생기면 발이 빨갛게 부어오른다. 이것 때문에 걷기 불편할 때도 있고 걷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발톱을 잘 못 잘랐거나 작은 신발 때문에 생기게 되는 이런 증상을 가진 발톱을 내향성 발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증상을 내향성조갑증이라고 한다. 두 번이나 이것 때문에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발톱의 반을 잘라내고 나면 엄청난 고통이 뒤따른다. 그리고 한 가지를 배우게 된다. 별 쓸모없어 보이던 발톱도 몸의 중심을 잡는데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몸이 움직이는데 발톱이라는 작은 부분이 중요하다는 것도.

세상사도 동일한 듯하다. 항상 문제는 사소해 보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6천만이 사망한 인류 최대 비극인 2차 세계대전이 그렇다.

2차 대전은 전형적인 억지(deterrence)의 실패사례이다. 억지란 도발하거나 공격을 계획한 국가에게 공포심 즉 도발한 뒤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 도발과 공격을 단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2차 대전은 히틀러를 억지하는데 실패하여 벌어진 전쟁이다. 그를 억지할 수 있는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히틀러는 계획된 전쟁범죄자이다. 그는 독일의 천년왕국을 위해 전쟁을 공언하였다. 1933년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던 바이마르공화국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치룬 뒤, 당시 독일의 사회혼란을 해결해줄 것을 기대한 정치지도자들과 시민들의 열광 속에서 히틀러는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이후 히틀러는 의회에 불을 질러 자신의 정치적 모태인 민주주의를 살해하였다. 1935년 3월 16일 1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에겐 족쇄였던 베르사이유 조약을 파괴하는 재군비를 선택하고 징집을 선포하였다. 해군보유, 공군보유로 기존의 국제제재를 비웃었다.

이 과정들에서 단합된 국제제재가 이루어졌다면 독일의 팽창은 억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가장 강력한 국가인 미국은 유럽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또한 현실적으로 국제제재를 주도해야 했을 리더인 영국은 독일에 제재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 독일은 소련 지원하에 이미 공군을 육성 중이었는데 1935년 영국은 이 비행훈련을 참관하기까지 했다. 영국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합의해 만든 독일의 공군보유금지 규정을 스스로 어긴 것이다. 히틀러를 관리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가지고.

2차 대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여러 번의 히틀러를 억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크게 보면 2차 대전을 억지할 수 있었다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1936년 독일의 라인란트(라인강 연안지역)에 대한 군대 파견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의 강경대응이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1938년 뮌헨회담 당시 독일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가 강경조치를 취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입장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그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당시로 돌아가 보자.

1936년 히틀러는 1925년 로카르노 조약(독일의 스트레제만 수상이 제안했던 라인란트에 자발적으로 무장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3개 대대 1500여명에 불과한 소규모 군대를 라인란트에 진주하게 한다. 진주에 대한 명분은 1935년 프랑스가 소련과 동맹을 체결했고 이것이 먼저 로카르노 조약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히틀러는 “독일은 결코 평화를 깨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양면전술을 구사했다. 자신은 현상타파를 원하는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로카르노조약을 준수할 것이라며 군축회담을 제안한다. 전형적인 기만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영국사회는 바로 이 평화공세 미끼를 물었다.

1936년 히틀러의 라인란트 진주는 군사적으로 엄청난 모험이었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칫 하면 군부 내의 쿠테타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객관적인 힘의 관점에서 볼 때 히틀러의 행동은 자살과도 같은 것이었다. 육군전력에서 프랑스는 76개의 육군사단이 있었고 프랑스의 동맹국가인 벨기에도 21개 사단이 있었다. 반면에 1935년 재군비를 시작한 독일은 고작 32개의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해군력과 공군력은 비교가능한 입장이 아니었다. 실제 히틀러도 “라인란트 진군이후 48시간이 가장 조마조마한 상황이었다. 만약 프랑스군이 진격해왔으면 우리는 도망쳐야 했을 것이다. 우리의 군사력으로는 경미한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후에 진술했을 정도였다.

프랑스의 압도적인 군사력 우세라는 객관적 상황에서 볼 때 프랑스는 독일을 충분히 혼자서도 억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군대의 일부만이라도 라인란트에 파병했다면 독일군대는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실제 당시 블롬베르크 독일 국방장관은 프랑스군이 반격을 하면 철수할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반격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영국에 긴급히 외무장관 에티앤느 플란당을 보내 공동대응을 강구한다. 하지만 이미 평화공세의 미끼를 문 영국은 플란당 장관을 잘 만나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만난 자리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원할 생각이 없고 독일이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해주었다. 이렇게 시간은 지나갔고 프랑스는 반격의 시기를 놓쳤다. 프랑스의 우유부단함과 동맹국 영국의 배신은 결국 독일군대의 라인란트 진주를 기정사실화 해주었다. 독일이 가장 약할 때 가장 손쉬운 억지조차 실패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히틀러는 한 가지를 몸소 체험한다. 민주주의 국가 영국과 프랑스는 겁을 주면 달아난다는 교훈. 이후 브레이크가 없는 상태에서 독일은 2차 대전으로 질주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고서야 영국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독일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깨었다. 또한 초지일관으로 질서를 파괴해온 히틀러에서 “환몽(disenchantment)”하였다.

비극은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최근 문재인정부의 외교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많다. 한국은 현재 다양한 의제에 싸여있다. 한미동맹내부 의견조율과 한미 FTA재협상문제와 세이프가드문제, 중국과의 사드문제, 북한 핵문제와 올림픽선수단 문제, 일본과의 위안부협상문제들.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협력의 강화문제 등등. 게다가 주변 국가들 지도자 모두 스트롱맨들이다. 그러니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상대적약소국은 그래야 한다. 이런 상황을 헤쳐가려면 친구와 적을 정확히 구분하고 작은 일부터 관리하는 원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의 지도교수님이신 강성학 교수님께서는 『죽어도 사는 사람 : 불멸의 링컨 유산』에서 한국의 현재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갈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바보는 직접 경험으로만 배우는 법”이라고 일갈하셨다. 발톱이 아파본 사람은 발톱이 작지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 모든 이들이 발톱을 뽑아봐야 발톱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필요도 없으며 배워서도 안 된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의 외교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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