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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7 / 이영섭 선생-모범법학자, 법관 그리고 ‘오욕과 회한’의 대법원장
이시윤  |  desk@l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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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11  16:3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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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전 감사원장, 전 헌법재판관

이영섭 선생은 1919년 출생하여 2000년에 서거하였다. 선생은 명문 경기중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의 예과와 법학문학부를 수학, 졸업을 하였다. 일본국 고등문관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고, 실무시험에서도 발군의 성적으로 경성지방법원판사(소위 경판, 京判)로서 법조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뒤 동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였다가 6‧25사변 때 좌익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법관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던 것인데, 바로 학계에 투신하며 소송법학자로서 대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 제정된 우리 민사소송법의 제정에 참여함은 물론 같은 해 신민사소송법(上)을 저술하고 이어서 (下)권인 강제집행법을 발간하여 우리나라 민사소송법 학계의 제1세대를 대표하는 소송법 권위자로 부상하였다. 그의 학문적인 접근방법은 우리보다 일찍이 독일법을 수계한 일본 민사소송법을 완전히 소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난해한 소송법을 쉽게 풀이하는 것이었다. 우리 소송법 특유의 독창적인 제도에 대하여서는 능숙한 영어‧독일어 실력을 구사하면서 개척자적인 창의성의 발휘는 후학의 귀감이 아닐 수 없었다. 문학적 소양도 보이셨다. 소송법 개정에도 많이 관여하고,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장으로 몸을 학계에 담으면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의 출강으로 법학교육에 기여함은 물론 적지 않은 제자를 육성하였다. 소송법 학자로서 일가(一家)를 이루는 과정에서 5‧16 군사정변 때에 구성된 조진만 코트(court)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최연소 대법원 판사였던 것으로 18년간 계속 최고법관의 영예를 누리다가 드디어는 사법부의 수장자리인 대법원장에 오르기는 하였다.

모범 소송법학자로서, 또 모범 법관으로서 그의 인간상을 그려본다.

   

첫째로 그분만큼 70년 우리 법조사에서 부지런하고 성실하셨던 분을 경험한 바 없다. 서양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처럼 주어진 과제를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신속히 처리하는 것이 생활신조였던 것 같다. 틈틈이 취급하였던 사건을 토대로 민사소송법연습 문제를 만들어 고시계 월간잡지에 투고를 하고 뒤에 집대성하여 <민사소송법 연습> 책도 재직 중에 출간하였다.

대법원 재직 중에는 상고 사건을 법정처리기간인 5개월 내에 마치는 유일한 대법관이었다. 소송법학자로서 절차의 신속이라는 소송법 이념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세계에 유례없는 1심 5개월, 2심 5개월(처음에는 4개월), 3심 5개월(처음에는 3개월), 합계 1년 반 내에 끝내는 판결 선고기간 제도를 우리가 두었는데 이의 실천은 물론, 상고이유서가 20일 기간 내에 제출되면 답변서 제출기간 10일이 경과하기 전에 상고심 판결을 마치는 부지런함을 보이셨다. 그러나 그분 주심의 상고심판결이 졸속이라는 세평은 없었다.

둘째로 이영섭 선생은 남의 말을 들어주려는 겸손한 품성을 지녔다. 사람은 자기 말을 하려하지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공자는 자기 말만을 하려는 자를 우자(愚者, 어리석은 사람),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을 현자(賢者)라 하였는데 법조인 특히 법관은 현자의 입장에서 남의 말을 들어야 하며 ‘묻는 말에만 답변하라’는 식으로 자기 말을 앞세우면 안 된다. ‘due process' 즉 적법절차는 듣는 것, 聽訟(청송)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재판에서 당사자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아니라면 재판관의 자질에서 부적격이다. 선생은 법관 자질의 천성을 지니셨다.

셋째로 선생은 고독한 삶을 사셨다. 필자에게 사법관은 매우 외로운 직책이라는 점을 자주 강조하셨다. 사사로운 정으로 누구를 보아줄 수 없기 때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친구, 일가친척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 홀로 남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필자가 재판연구관으로 모셔 보았지만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거의 저녁 약속도 없이 근무시간이 끝나면 곧장 댁으로 퇴근하는 것이 일상생활이셨다. 가정에서도 무료할 때면 시내버스 출발점에서 탑승하였다가 종착역까지 가서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소일을 하신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법관시절에도 도시락, 퇴직 후 변호사 때도 도시락은 기본으로 도시락의 고고한 인생이었다. 지연‧혈연‧학연‧직연‧종연‧군연 등 6가지 연(緣)을 중요시하며 친구, 일가친척을 보아주는 ‘마당발’이다 보면 법조계의 고질적 병폐인 ‘전관예우’,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병폐시정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셨다. 그는 출퇴근 시간 등 시간 지키기에 너무나 철저하여 칸트 같았다는 말을 들었다.

선생은 기질적으로 신속‧공정의 법관상이었다. 그는 1957년 미국 하버드 대학 옌친연구소에서 미국 소송법을 1년간 연구하였다. 그 성과를 교과서에 반영하였는데, 미국 연방 민사소송규칙 제1조의 ‘이 규칙은 모든 소송이 공평하고 신속하며, 경제적인 처리를 확보하도록 해석‧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의 소개였다. 이것은 독일법만을 금과옥조로 삼던 학계의 풍토를 영미법도 중요하다는 것으로 인식을 전환시킨 것이다. 6‧25사변 인천상륙의 포연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게 민사소송법 책만을 정독하였다는 말을 사모님으로부터 들은 바 있는데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와 같은 인생관을 가진 분이기도 하다.

신속처리에 데카르트, 규율지키기에 칸트, 안정감에 스피노자와 같았던 이영섭은 드디어 법관의 ‘꽃 중의 꽃’인 대법원장에 1978년 말 민복기 대법원장 후임으로 지명되었다.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등의 경력을 가진 외부인사가 지명되는 전례를 깨고 내부의 대법원판사 출신 인사가 사법부의 수장이 되는 파격적인 인사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전직 대법원장과 달리 학자‧법관 출신이어서 카리스마가 붙은 대법원장이 아니었던 것은 난세에서 취약점이 되었다.

지명 당시에 일찍이 총무처장관이었다가 민 대법원장에 의해 법원행정처장으로 기용된 서일교 씨를 교체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법원장에 취임할 수밖에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서일교 씨가 당시 대통령 법률특보였던 신직수 씨와 교섭하여 대통령으로 하여금 피지명자인 이 대법원장과의 면담자리에서 ‘재판은 새 대법원장이 맡고 사법행정 관계는 서일교 처장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법원장의 보좌역인 법원행정처장을 그 수족으로 부릴 수 없는 파행적인 대법원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도 검찰청 모 간부를 만나니 ‘대법원장이 이영섭 씨인지 서일교 씨인지 분간 못하겠다’는 촌평을 들은 바 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선생이 대법원장에 취임한 것은 1979년 3월이었는데, 그 해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직무대행에 취임하는 우리 헌정사의 격변기였다. 이때에 마침 민관식 씨가 국회의장 직무대행을 맡았는데 우연히도 두 사람(최규하, 민관식)이 선생과 경기중학교 동기동창이었던 것으로 이 ‘경기 3인방’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모두 장악했다고 하여 크게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고 그 해 12‧12사태로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가 등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최규하 대행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퇴하고, 민관식 의장대행은 국회가 해산되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로 대체되면서 그 자리가 자동소멸 되었다. 이제 경기중학의 전성시대는 가고 선생만이 실권 없는 사법부의 수장으로 외로이 남아 신군부의 폭정시대에 역사적 시련을 겪어야 했다.

대표적인 한 사건은 법조비리소탕 명분의 소위 실비사건이었다.(졸저 <민사소송법입문-역사, 사례와 함께>, 114면 이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3권을 장악하던 때의 일이다. 이는 사회의 엘리트층이라고 할 판사‧검사‧변호사를 길들이는 이른바 ‘군기잡기’용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집행도 문제없고 피고 측 국가의 법정 방어력도 허술하여 ‘노다지’라는 말이 돌았고, 성공보수금을 두둑이 받으며 법조계에 돈을 뿌려 물을 흐린다는 소문이 있던 국가배상사건 대리변호사를 중심으로 20명 정도의 변호사를 서빙고 보안사령부로 연행하여 물고를 내는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변호사들이 판검사들에게 직접 대접하는 대신에 판검사실에 종종 ‘실비’라는 명목으로 서로가 큰 부담없는 10만 원 내외의 점심‧저녁 값 등 식사비를 사무실 총무에게 조용히 놓고 가 판검사들은 이것으로 식사비 등을 해결하는 것이 확산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을 취조하여 ‘법조계의 고질적인 비리 척결’에 착수한다는 명분으로 나선 것이다.

보안사에 끌려간 이 변호사들이 실비제공 상황을 순순히 자백할 리 만무하므로 옷을 전부 벗기고 담요를 몸에 감아 묶는 ‘담요말이’를 한 끝에 2층 계단에서 발로 차서 계단을 구르게 한 뒤 혼비백산의 상태에서 실비를 바친 판검사의 이름을 대라는 식의 조사를 시작하였다. 누구에게 실비를 제공했는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날 것이니, 판검사 인사배치표를 제시하면서 제공받은 자와 제공액수를 말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보안사에서는 이렇게 강요된 자백에 기한 결과를 토대로 실비를 받은 판검사 이름, 받은 횟수와 액수를 종합하여 통계표를 만들어 대법원장과 법무부장관에게 일방적으로 각각 통보하여 판검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도록 하였다. 비록 비리척결의 목적은 좋았으나 그 과정에서 사법부는 행정부의 1개 부처처럼 다루어지고 사법부의 자율적 인사권의 독립이 무시당한 큰 수모였던 것이다.

또한 이 당시에 이영섭 사법부가 국보위 세력에 의해 당한 또 다른 수모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의 입법관련사건이다. 법원행정처가 서민주택 임차인의 법적 보호를 위하여 주택임대차보호법안을 성안하여 한참 입법추진 중에 있다는 엉터리 기사가 동아일보 사회면에 톱기사로 보도가 나갔다. 국보위 측은 이 기사에 놀라 법원행정처장에 대고 “이 비상시에 무슨 자격으로 입법을 하며 서민들에게 생색을 내려고 하느냐”며 일갈하여 엄중 경고한 사건이 났다. 이것은 법원행정처로서는 생각조차 해본 일 없는 황당한 일로써 조사해 보니 동아일보 출입기자와 김 모 서울지법부장이 합작하여 벌린 해프닝에 불과했고, 그렇게 진상보고 하여 겨우 법원 측이 면책된 일이 있었다.(졸저 <민사집행법(개정 제7판)>, 275면 주5) 이것은 법원행정처에 대한 호통이었지만 사실상 대법원장의 지위는 안중에도 없는 엄포였다.

이보다 더 쇼킹한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주범인 김재규 사건과 관련한 일이다. 이 사건의 상고심에서 내란이냐 단순살인이냐가 쟁점이 되었는데, 내란으로 본 유태흥 대법원판사 주도의 다수의견에 양병호 대법원판사 등은 단순살인으로 소수의견을 냈다. 대법원 판결이 나고 난 뒤에 신군부가 대법원을 길들이는 작업(?)의 일환으로 소수의견의 양 대법관을 서빙고의 보안사로 끌고 가서 심한 고문을 하여 입에서 침이 질질 흐를 정도의 욕을 당하게 하였다. 양 대법관은 일찍이 김대중 내란예비음모사건에서 친정부 성향의 제1심 재판장에 대한 기피신청 재항고사건에서 기피신청이 이유 있다는 취지의 소신재판을 한 반체제 법관으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보안사가 차제에 더 심한 손보기(?)를 한 것 같다.(앞의 <민사소송법입문> 63면 이하) 이때를 전후하여 전두환 장군이 권총을 차고 이 대법원장을 찾아와서 위협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어떻든 김재규 사건의 상고심 전원합의체 판결의 재판장이기도 했던 선생에게 재판 후에 벌어진 이 일련의 사태는 엄청난 충격이었으며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되었다.

선생은 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중도하차로 취임 2년 남짓한 시점인 1981년 4월, 신군부 측 인사로 평가받은 유태흥 씨에게 승계하고선 법원을 쓸쓸하게 떠나야 했다. 그는 사법부를 떠나면서 고별사에서 “사법부가 정부의 한 부처로 저평가되고, 회한과 오욕의 나날을 보냈다.”고 술회하였다. 2백 자 원고지 2페이지에 손수 쓴 이 고별사는 인구에 크게 회자되었다. 이어 기자회견을 통해 “다시 태어나도 법관의 길은 안 간다.”고 모 신문에서 말한 것도 화제가 되었다.

이는 대법원장이라는 영광의 자리까지 지낸 분의 오만이라는 악평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 신군부 시대의 사법권 탄압에 대한 처절한 항변이자 비탄으로, 얌전한 분이 한 품고 한 뼈 있는 한 마디였다. 훗날 자신이 당한 것처럼 이런 사법부 굴종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선 안 된다는 희원이었다.

퇴임 후 광주고등법원으로 전근하면서 인사드리려 찾아뵈었더니 비운의 대법원장이었던 선생이 외롭게 앉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군은 찾아올 줄 알았다”고 말씀하셨다. ‘오욕과 회한’에 함축된 뜻을 알고자 하였으나 선생은 침묵은 금이요, 응변은 은인지 끝내 밝히려 하지 않았다. 자서전도 없다.

김명수 새 대법원장은 민주화로 인해 오욕은 없겠지만 회한이 남지 않는 대법원장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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