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7)-민중이여 일어나라! - 기미독립선언서와 민족 대표 33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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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7)-민중이여 일어나라! - 기미독립선언서와 민족 대표 33인 (2)
  • 이유진
  • 승인 2017.08.1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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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이런 저런 해프닝(?)으로 민족 대표 33인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손병희 선생이 교주로 있던 ‘천도교’가 3·1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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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는 동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 실패 후, 가장 어려운 시기에 손병희 선생이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조직이 다시 재건되어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하자, 이용구 등 친일파가 일진회를 조직하여 조직을 흡수하려 했습니다. 손병희 선생은 조직에서 이들을 배제하고자 1905년 천도교로 교명을 개칭하고 동학의 성격을 계승하였죠.1)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과 ‘기미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최남선’도 천도교 소속이었습니다. 3·1운동 준비가 한창이던 1919년 1월, 대중화 · 일원화 · 비폭력 이렇게 세 가지를 원칙으로 내세운 것도 천교도 측이었습니다. 이 원칙은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삼장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국내외 민족 운동가들은 이때를 기회로 여겨 미국, 연해주, 국내 각지에서 독립운동과 관한 사항을 논의하고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다음해 고종이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민족의 억압된 감정은 일시에 폭발하게 되었죠.2)

3·1운동의 발상은 천도교의 권동진과 오세창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18년 말,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토론하던 두 사람이 전국적 독립시위를 하자는 의견을 냈고, 당시 천도교 간부였던 최린과 논의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도교가 단독으로 이를 실행하기에는 세력이 약하다고 생각하여, 당시 외국과 교섭이 가능한 기독교, 그리고 민족적 기반을 가진 불교계와 함께 일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3) 합의 끝에 천도교계의 손병희, 기독교계의 이승훈, 불교계의 한용운 등 종교계가 마음을 합쳐 단일 조직체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33인의 민족대표자가 선정되었죠. 민족을 위해 종교가 힘을 합쳤던, 아주 의미 있는 결단이었죠.

최린, 최남선 등의 협의하에 독립선언서 기초를 작성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최남선은 학자로 일생을 지낼 생각이라 독립운동의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으나, 선언문만은 자신이 짓겠다고 했습니다.4) 논의 끝에 최남선은 민족대표에서 빠지면서도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27일 천도교가 운영하는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은밀히 인쇄되었습니다.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2만 1000장이었고 민족대표들의 연고지인 서울, 평양, 정주, 원산, 의주 등 전국에 철도편으로 전달되었습니다.5) 또한 일부는 학생 대표들에게 전달되어 서울 전역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계획은 모두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되어 3월 1일 당일까지도 일본 관헌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치밀한 구상과 계획 끝에, 민족대표 29명(나머지 4명은 지방에 있었음)은 인사동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 모여 기미독립선언문 낭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후략]

선언의 낭독 후 민족대표들은 일본 경찰에 자수한 후 순순히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 사전 협의대로 파고다 공원 연단에서 학생단체가 또 독립선언을 낭독하였고, 전국에 배포된 기미독립 선언문을 바탕으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3·1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역사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민족대표 33인의 기미독립 선언으로 인해 3·1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수 있었다는 관점도 있고, 이들이 초기에 자수를 하고 운동 전선을 이탈했기 때문에 그들의 역할이 미미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이 민족 기반의 동학에서 출발했고, 그 준비 과정은 천도교를 중심으로 민족대표들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뒤 전국적 확산 과정이나 시위 과정 및 잔혹한 보복의 과정에서 이들이 얼마나 책임을 졌는가는 차치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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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사 통론, 변태섭, 삼영사
2) 3·1독립운동과 김덕원 의사, 박성수 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3) 위의 책
4) 3·1독립운동과 김덕원 의사, 박성수 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5) 3·1운동 새로 읽기, 3·1문화 재단 지음, 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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