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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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 노범석
  • 승인 2017.08.0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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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국사 노범석 교수의 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조선왕조 연산군 때의 “잃어버린 2년”,
드라마 <왕과 나>와 영화 <간신>

연산군은 조선시대 폭군의 전형으로 평가되었다. 후대 왕들이 신하들과 대립하는 상황에 처하면 신하들이 “전하께서는 제2의 연산군이 되시려는 겁니까” 하면서 압박할 정도로 조선왕조 당대에 폭군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16세기에 이언적-이황-이이로 이어지는 성학군주론도 조선에서 제2의 연산군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림들의 공통적인 문제의식이 빚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보통 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울 때도 연산군 시기를 자세하게 배우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교과서에서는 사림의 정치적 성장을 다루는 부분에서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언급되었다가 바로 중종반정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폭군 연산군의 모습은 재위 후반기인 갑자사화 이후 2년간에 벌어진 상황이다. 조선 전기의 내시 김처선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연산군(배우 정태우)을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갑자사화는 성종 때 폐비윤씨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성종 때 간택후궁으로 입궐한 그녀는 성종과 그의 어머니 인수대비의 총애를 받아 전 왕비인 공혜왕후가 죽은 뒤 2년 후 중전이 되었다. 그녀를 총애한 이후는 무엇보다 임신중이었다는 것. 간택을 받았을 때부터 임신 6개월이었기 때문에 4개월 후 연산군을 낳고는 위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그러나 질투심이 많았던 그녀는 다른 후궁들과 분란을 일삼았는데, 중전이 된 지 1년도 채 안되어 방 안에서 주술을 써놓은 부적과 독극물을 묻힌 곶감이 성종에게 발각되어 폐출당할 위기에 처하는데,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한 대신들의 반대로 처벌을 면한다.

그러나 분란이 계속되어 2년 후 폐위되었다가 사사(飼死)되었다. 야사에서는 손톱으로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냈다거나 식사 도중 화를 참지 못해 국그릇을 엎어 왕의 옷을 더럽혔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궁중 밖에서도 그녀의 질투심에 대한 소문이 만연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문제는 이때 세자였던 연산군은 어머니가 죽은 원인을 몰랐다는 것.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폐비 윤씨가 피 묻은 적삼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기면서 자신의 원통함을 알려달라고 했고, 인수대비가 죽자 신씨는 궁궐 나인들을 통해서 폐비 윤씨의 죽음과 적삼을 알렸고 자순대비를 친어머니로 알던 연산군은 슬퍼한 뒤 시정기를 찾아서 대신들과 관련자를 죽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야사로 전해지는 내용일 뿐, 실제 연산군이 외할머니를 만난 기록이 없다. 실록에서는 임사홍과 만난 기록만 있다. 그리고 갑자사화 당시 인수대비는 엄연히 살아 있었으며, 연산군이 직접 인수대비에게 패악질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피 묻은 적삼 이야기는 야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야기의 내용이 너무 강렬하였고, 박종화의 역사소설 <금삼의 피>에 등장한 이후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 이야기는 훗날 드라마 <장녹수>, <왕과 나> 등 연산군 시기를 다룬 사극에서 단골로 나온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몰래 임사홍의 집에 들려 친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말을 듣게 된다. 연산군은 이를 알게 된 날, 바로 자기 손으로 아버지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살해하여 산야에 버렸다.

 

영화 <간신>에서는 이 장면을 각색하여 임사홍(배우 천호진)이 연산군(배우 김강우)에게 피 묻은 적삼을 건내 주는 장면이 나온다. 임사홍과 그의 아들 임승재(배우 주지훈)은 이를 계기로 연산군의 총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극 후반부에 숨겨진 반전이 드러난다. 극에서 폐비 윤씨는 자기가 죽은 후 연산군이 자신의 복수를 해주려고 폭군이 될 것을 걱정하여 자신의 어머니에게 유품을 모두 태워 달라고 부탁한다.

실제 임사홍 부자는 폐비 윤씨의 어머니께 이 말과 함께 폐비 윤씨의 빈 상자를 전달받는다. 그러나 권력에 눈이 먼 임사홍은 자신 때문에 독을 먹고 죽은 아내의 피 묻은 적삼을 폐비 윤씨의 것으로 속여 연산군에게 건내었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반전이 있었으니, 연산군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연산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임사홍의 거짓말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역사학자들 중에서는 연산군이 이미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실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자신의 아버지인 성종의 󰡔행장록󰡕을 보고 왕의 장인 중에 윤기견이라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윤호를 잘못 적은 것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이에 신하 중 한 명이 “윤기견은 폐비 윤씨의 아버지”라 답하였고, 왕은 폐비 윤씨에 대해 어찌되었는지 되물어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듣게 된다. 그날 연산군은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견에서는 연산군의 갑자사화가 평소 자신이 추구하였던 왕권 강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이 갑자사화 이후 일으킨 갖은 악행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갑자사화 후 중종반정 때까지의 2년간의 행적은 실로 조선의 국운을 기울게 할 정도였다. 왕실과 궁중의 재정을 담당하는 내수사에 대한 신하들의 감독 권한을 없애 버린 내수사 직계제가 실시되었으며, 공납의 불산과세가 심화된 것도 이때였다. 실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역사를 비춰봤을 때 “잃어버린 2년”이라고 부를 만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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