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4)-전봉준- 녹두꽃이 피고 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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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4)-전봉준- 녹두꽃이 피고 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이유진
  • 승인 2017.07.31 11:2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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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학

새야 새야 녹두새야 /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장수 울고 간다

전래 민요인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중, 가장 유력한 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청나라 군사들과 일본군들이 푸른 군복을 입어서 ‘파랑새’라 하였고, 어릴 적부터 체구가 작아 녹두(綠豆)라 불렸던 전봉준 장군을 ‘녹두밭’이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랑새가 녹두밭에 앉아 녹두꽃이 떨어지면 울게 되는 ‘청포장수’는 백성들이라는 해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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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현지답사를 다닌 몇 안 되는 역사가였던 ‘기쿠지 겐조’가 전봉준을 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1920년대 고부 읍내 노인들의 증언을 취합한 것입니다.

“체구는 작았지만 코는 크고 귀도 크며 눈빛은 형형하여 그와 한번 만나면 그 당당한 위풍에 압도될 정도였다. 평생 과묵하여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집에서는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으며 아내를 사랑하여 집안은 항상 화기가 돌았다. 그는 마을의 어린이를 모아 천자문과 소학을 가르쳤는데 사방으로부터 찾아오는 손님이 줄을 이었다. 마을 사람이 오면 반드시 툇마루에 나와 인도했고 그 집안의 경중, 신분의 고하를 차별하지 않았다. 변란 전에는 왕래하는 손님이 잇달아 왕복했고, 그도 또한 무주 방면으로 나다녔다.”1)

앞부분에서는 전봉준의 사람됨을 알 수 있고, 뒷부분에서는 그가 이미 전부터 동학 북부 접주(동학의 지도자)들과 거사를 모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2) 이들은 모두 조선이 처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개항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상황을 지켜보며, 마침내 민중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죠.

전라도는 호남평야를 끼고 있는 조선의 대표적 곡창지대였습니다. 때문에 탐관오리들은 자연스럽게 이곳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양민의 재산을 마음대로 수탈했습니다. 또한 농번기에 농사에 집중해야 할 농민들에게 아버지의 동상을 세우게 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죠. 이에 농민들의 불만은 점점 커졌습니다. 이듬해인 1893년에는 물세를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만석보 밑에 다시 보(洑)를 축조해 불법적으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당시 전봉준도 고부에 살고 있었습니다. 전봉준은 농민 대표와 함께 농민들의 어려움을 호소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더 이상의 횡포를 참을 수 없었던 전봉준은 동학교도를 이끌고 1894년 2월 고부관아를 공격했습니다. 이것이 고부 봉기였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3)

관아를 습격한 전봉준과 동학교도들은 무기와 곡식을 탈취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관리들을 붙잡아 응징했습니다. 곧 전봉준과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농민군이 결성되었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조정에서는 이용태를 고부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이용태는 농민군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며 이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관군과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척왜(斥倭)·척양(斥洋), 부패한 지배 계급 타파 등의 강령을 내세우고 농민군이 모였습니다. 1차 봉기에서 관군과 대결하여 승리한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다시 한 번 관군을 압도하며 결정적인 승리를 하였습니다. 이후 부안, 정읍, 고창 등을 장악하고 전라도의 큰 관아인 전주성까지 점령했죠.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조정에서는 농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습니다. 한심하게도 자국민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에 의존한 것이죠. 이에 일본도 청나라와 맺은 텐진 조약(동시 파병)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나라는 외국 군대에 의해 더욱 위태로워졌습니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외세가 나라에서 물러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였고 정부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따라 동학이 우세한 지역에 집강소가 마련되어 농민군들이 폐정개혁에 따라 스스로 자치를 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패한 지배 계급의 폭정은 끊이지 않았고, 파병 구실을 잃은 일본군은 오히려 경복궁을 점령하여 강제적으로 조선의 개혁을 외치며 정치 간섭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갑오개혁입니다.

이에 반외세의 기치를 든 전봉준 중심의 남도 병력 12만, 손병희 중심의 북도 병력 10만이 모여 2차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중남부 전역과 함경남도, 평안남도를 아우르며 항쟁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특히 공주 우금치에서는 관군, 일본군의 연합군과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농민군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결국 금구 전투를 끝으로 동학군은 궤멸하고 말았습니다. 전봉준은 재봉기를 준비했지만, 현상금을 노린 부하의 배신으로 관군에 체포되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일본을 도와 갑오개혁을 진행한 박영효와 서광범을 준열히 꾸짖었다는 그는 1895년 손화중 등과 함께 교형에 처해졌습니다.4)

전봉준의 이름은 아직도 많은 민요와 노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학군의 잔여 세력은 활빈당 등 의병세력으로 활동하다 정미의병에 합류하면서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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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봉준, 혁명의 기록, 이이화, 생각정원
2) 위의 책
3) 시로 쓰는 한국 근대사, 신현수, 작은 숲
4)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20 망국, 박시백,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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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이분? 2017-08-01 21:09:05
이유진쌤 종로학원에서 ㅆㅐㅁ 강의 잘 듣고 있습니다
진짜 공무원시험 강의도 하시네요

재판실체 2017-07-31 14:20:48
연속하여 보시면 재판의 실체를 아실수 있습니다.1)1월25일 박대통령 정규재주필 대담. 2)2월2일김평우변호사님께서 동일매체(정규재TV)에 박대통령님 직후 출연,정주필님과 대담. 탄핵을 탄핵한다는 책을 저술했다고 소개하심.2월16일 박대통령측으로부터 변호인단에 선임됨.

재판실체 2017-07-31 14:20:05
연속하여 보시면 재판의 실체를 아실수 있습니다.3)유튜브검색어:5월8일 자유한국당 부산역 유세(맨앞 김평우변호사님 연설부분).4)유튜브검색어:5월5일 김평우변호사 조갑제대표 대담.5)구글검색어:헌법재판소(박 대통령 탄핵 영상중 2월22일,27일 김평우변호사님 변론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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