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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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 노범석
  • 승인 2017.05.1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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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국사 노범석 교수의 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개혁이 좌절된 정치적 아웃사이더의 비극, 드라마 <신돈>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는 고려왕이 한 분 더 모셔져 있다. 공민왕이다. 물론 정전과 영녕전에 모셔져 있지는 않고, 정문 주변에 따로 사당을 세워 모셔놓았다. 공민왕 신당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함께 있는 영정이 모셔져 있다.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렸던 드라마 <신돈>에서 전체적으로 꿰뚫는 테마는 ‘타락’이라 볼 수 있다. 망해가는 고려를 살리기 위해 수차례 개혁을 시도한 공민왕은 매번 권문세족의 반대와 전란으로 개혁이 좌절되면서 자신을 도와 준 김용, 조일신, 정세운, 안도치 등의 신하들을 하나 둘 잃는다. 이들은 원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시절 공민왕을 수행하였던 신하들이며, 훗날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측근 세력으로 보필한다. 신돈도 이 무렵 노국대장공주의 소개로 공민왕과 교류하였다.

가장 먼저 공민왕의 곁을 떠난 이는 조일신이다. 그는 원나라에 있었던 시절 공민왕에게 고려인이라는 자각을 세워 준 인물로. 고려 반원세력의 핵심이었다. 명예욕이 강했던 그는 고려의 기상을 세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고 싶어하였고, 이에 공민왕 즉위 초 기철을 중심으로 한 친원파와 기싸움을 하다 암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기씨 세력의 암살은 실패하였고, 명분이 부족했던 자신의 정변이 지탄을 받을까 두려워 같이 공모하였던 무리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웠고, 행궁을 습격하여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하였다.

공민왕은 일찍이 조일신이 욕심이 많은 인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버리지 못해 괴로워하였으며, 끝내 조일신 암살을 명하면서도 “조일신을 죽이지 마라. 조일신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수치를 배웠겠느냐”고 울며 절규하였다. 원에 있었던 시절 철이 없던 공민왕이 기황후를 뵈러 가야 할 상황이었는데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자 조일신이 공민왕에게 찬물 한 바가지를 퍼부은 적이 있었다. 원에서부터 함께 뜻을 모았던 동료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괴로워하는 공민왕의 모습은 이후에도 계속 반복된다.

조일신을 처리한 후 기철 일파가 만만치 않았음을 깨달은 공민왕은 이후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여 ‘병신정변’을 일으킨다. 기철 일파를 숙청하였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으며, 쌍성 총관부를 수복하는 등 반원 자주 개혁 정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가면서 개혁 정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정세운은 이때 홍건적의 격퇴하면서 공을 세웠고, 김용은 이를 시기하였다.
 

 

개경 수복 이후 흥왕사에서 정무를 보던 당시 김용은 권문세족들과 연합하여 정변을 모의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공민왕의 가짜 편치를 써서 안우와 이방실에게 보내 정세운을 죽인다. 이후 안우에게 정세운을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고는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김림, 이방실, 김득배 등을 모조리 죽였다. 자신의 죄상이 폭로될까 두려웠던 김용은 원나라에 있던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하였고, 부하를 시켜 흥왕사의 행궁에 있던 공민왕을 시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안도치를 왕으로 오인하여 살해함으로써 공민왕의 암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김용은 입장을 바꾸어 흥왕사의 변에 가담한 자들을 토벌하여 심문도 안 하고 즉각 살해하면서 음모의 누설을 또 다시 막았다.

흥왕사의 변이 평정된 뒤 김용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잡혀온 반란군을 아무 심문도 하지 않고 즉결 처형시킨 사실 때문에 주변에서 의심을 받았다. 이후 모든 사실이 발각되었지만 공민왕은 김용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는 그를 밀양으로 유배 보낸다. 이후 사건의 전모가 확정되어 경주에서 처형당하였지만, 공민왕은 죽을 때까지 김용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않았다. 흥왕사의 변은 공민왕의 조력자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면서 싸우다 공멸한 사건으로, 이를 통해 공민왕은 또 다시 좌절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노국대장공주도 아들을 낳다가 사망하게 된다. 이에 공민왕은 정치에 뜻을 잃은 채 실의에 빠지게 되었고 서서히 암군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래도 개혁에 대한 의지가 남아 있었던 공민왕은 집권 초기에 교류하였던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전권을 위임하면서 자신의 개혁 정책을 잇게 한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토지개혁을 시도하였고, “공자는 천하 만세의 스승”이라 말하며 홍건적의 난 때 불탔던 성균관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신돈은 정치적으로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에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얻지 못해 점차 정계에서 고립되어갔다. 그가 부활시킨 성균관을 통해 정계에 진출한 신진사대부들도 승려 출신인 주제에 부패하고 탐욕하다는 이유로 신돈을 반대하였다. 그를 지지해주는 자는 오직 공민왕 과 민중들뿐이었다. 정치적 고립을 타개하고자 신돈은 자신의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공민왕과의 반목이 더 심해져갔다. 결국 신하들의 간언에 의해 신돈은 역모죄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1371년 수원에서 처형되었다.

공민왕은 마지막으로 남은 조력자 신돈마저 자기 손으로 죽이면서 끝내 고독하고 잔혹하게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직전 공민왕은 아들 모니노를 데리고 정전으로 나와 신돈, 노국공주, 안도치, 정세운, 김용, 조일신의 환영을 보며 신명나게 춤을 추었다. 모두 공민왕이 원에 있던 시절 생사고락을 같이 한 동료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때문에 죽거나 자신이 직접 죽인 자들이다. 드라마 <신돈>은 기이한 스토리 전개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공민왕의 생애를 비극적으로 연출해 낸 수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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