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3)-유교적 가부장제에 갇힌 조선 시대의 여성_황진이(黃眞伊)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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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3)-유교적 가부장제에 갇힌 조선 시대의 여성_황진이(黃眞伊)는 시인이다
  • 이유진
  • 승인 2017.05.08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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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청산 속에 흐르는 푸른 시냇물(서경덕)아, 빨리 흘러간다고 자랑 마라.
한번 넓은 바다에 다다르면 다시 청산으로 돌아오기 어려우니
밝은 달(황진이)이 산에 가득 차 있으니 쉬어 감이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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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엄하기 이를 데 없어 여자를 멀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성 높은 기생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도 일소에 붙였던 ‘벽계수’였다고 하죠. 하지만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고, ‘앗차!’ 하는 순간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황진이의 외모가 아니라 뛰어난 시작(詩作) 재주로 인해 대쪽 같은 선비의 명성에 먹칠을 한 셈이죠. 벽계수는 이 일로 집에 돌아와 자신의 실수를 곱씹으며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그 뒤 두 사람은 특별한 관계가 되었고요. 중종 대에서 명종 대까지 생존했다 알려진 ‘황진이’의 시조에 관한 일화로, 영조 때 구수훈의 이순록(二旬錄)에 전하는 이야기입니다.1) 당시 조선에서는 남녀가 밖에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정철은 ‘훈민가(訓民歌)’를 통해서도 알 수 있죠.

간나희 가는 길흘 사나희 에도듯이,
사나희 녜는 길흘 계집이 치도듯이,
제 남진 제 계집 하니어든 일홈 묻디 마오려.

아낙네 가는 길을 사나이가 돌아가듯이
사나이 가는 길을 아낙네가 돌아가듯이
제 남편 제 아낙이 아니거든 이름을 묻지 말아라.

이렇게 남녀가 유별했던 조선과 달리, 고려 사회는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습니다. 특히 가정에서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거나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양변(兩邊)’적 또는 ‘공계(共系)’적 친족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려는 자신의 부계(父系)와 모계(母系), 그리고 그가 결혼한 남성이라면 처가(妻家)의 계통까지도 고려해서 집안을 파악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안을 동시에 살핀다는 측면을 ‘양변적’이라고 하고, 한 남성이 결혼을 하면 처가의 일원으로 파악하는 것을 ‘공계적’이라고 합니다.2) 실제로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외손들이 제사를 지내는 외손봉사(外孫奉祀)가 행해지고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형제가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없어도 따로 양자를 들이는 풍습은 없었습니다. 제사의 권한이 이처럼 동등했기 때문에 재산 분할에 있어서도 남녀의 차별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출생 순서나 집안에 기여한 공적에 따라 차이가 날 뿐이었습니다. 여성도 어느 정도 자신의 경제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동등하거나 때로는 강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정에 의해 재가(再嫁)하는 것에도 큰 거부감이 없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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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수의 시조에 역사가 살아있다. 이정자, 국학자료원
2)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 강명관, 휴머니스트
 

1392년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진사대부가 조선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남성을 우위에 두는 유교적 가부장제를 남녀와 가정의 질서로 여겼습니다. 고려의 친족제도와 남녀의 비교적 평등한 관계는 하루빨리 개혁해야 할 고려의 잔재로 생각했죠. 따라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여성이 개가할 경우 불이익을 주는 법을 넣어 여성의 재가(再嫁)를 금하였습니다. 또한 여자가 집밖에서 제사를 지낼 경우 장 100대를 쳤습니다.3)

사대부들은 ‘절부’, ‘열녀’라는 미명으로 여성의 사회적 자유를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개가하지 않은 여성을 절부(節婦)로, 또 개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자기 신체의 일부 혹은 전체를 희생해 표현하는 여성을 열녀(烈女)라 부르며 미화했습니다.4) 이로 인해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성들은 자유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밖을 나가서도 안 되고 다른 남성들과 감정을 공유해서도 안 되는, 오직 한명의 지아비만을 바라봐야 하는 일부종사(一夫從事)의 역할을 강요당했죠.

‘기생(妓生)’들은 비록 사회적 신분은 낮았으나, 사회적 분위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었죠. 이들은 기녀이기 이전에 종합 예술인들이었습니다. 춤, 악기, 노래 그리고 시가까지 배울 수 있었고 빼어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기녀들의 풍부한 예술적 식견은 사대부들과 대화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그들의 말벗이 되었던 것입니다.5) ‘황진이’를 비롯한 기생들은 시대의 구속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살았던 예술가였던 것입니다.

2014 사회복지직 9급
※ 다음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족보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족보의 기재 방식을 설명한 것이다. 이 족보가 편찬되었을 무렵의 가족 제도에 대한 추론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①ㄱ, ㄴ ②ㄱ, ㄹ ③ㄴ, ㄷ ④ㄷ, ㄹ

  정답> ④
  오답 풀이>
  ㄱ. 서울의 문과 응시 금지를 비롯한 적서에 대한 차별은 성종 때 “경국대전”에 기록되었다.
  ㄴ. 친영은 조선 후기에 일반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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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위의 책
  4) 위의 책
  5) 고시조, 우리 역사의 돋보기,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기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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