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1)-이제 망한 나라는 잊고, 새 나라 조선을 따르라_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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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1)-이제 망한 나라는 잊고, 새 나라 조선을 따르라_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이유진
  • 승인 2017.04.25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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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악장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습니다. 첫 장의 “육룡(六龍)이 나르샤~”라는 도입부는 이제 드라마 제목으로 더 익숙하죠. 여기서 ‘육룡’은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추존왕을 포함한 여섯 임금을 뜻합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용(龍)은 역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지만, 기틀을 마련해준 것은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와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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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목조(穆祖)’인 이안사에게는 흥미로운 사연이 있습니다. 전라도 전주가 본관이었는데, 스무 살에 관기와 사랑에 빠져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관기는 나라의 재산이라 큰 벌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죠. 여하튼 그 무리와 함께 삼척현(삼척시)에서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가는 듯 했으나, 전주에서 그를 추포하려 했던 사또가 삼척현에 신임 사또로 부임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아 그는 다시 짐을 꾸렸습니다. 다음 행선지는 당시 양계(兩界) 중 하나인 동계 국경지역이었습니다. 국경은 본래 살기 척박하고 외적을 막아야 하기에 위험한 곳이죠. 실록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사를 따라나선 이가 170여 가구에 달했다고 합니다. 전주 시절부터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이었는지, 논밭을 잃고 떠도는 유랑민들이 더 합류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가 우두머리의 자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낮선 땅에 도착한 이안사는 따라온 170여 호를 기반으로 주변 고려인을 규합해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당시 일대에는 몽고군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안사를 눈여겨보던 몽골군은 그에게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당시 고려는 최씨 정권이 강화로 천도하여 몽고에 대항하고 있었지만, 몽고군을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안사 자신도 고려에서는 도망자 신세였고요. 그는 고심 끝에 항복을 택했고, 그 대가로 몽고로부터 벼슬을 받았습니다. 고려의 도망자가 중원의 새 패자인 원제국의 관리가 된 것이죠. 주변의 실력자와 술자리도 하고, 정략 결혼도 하며 그는 동북면의 실세로 성장하였습니다.1)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추존왕 ‘환조(桓祖)’입니다. 증조부 이안사 후로 몽고 이름을 쓰던 원제국의 관료이자, 당시 동북면 지역의 실세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원제국의 유력한 세력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대로 안주하기에는 시대가 또 변하고 있었습니다. 원제국이 기울고 있었던 것이죠. 이자춘은 이러한 정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러 고민 끝에 그는 증조부 이안사에 이어 가운을 건 도박을 감행하기로 합니다. 이자춘은 아들 이성계와 함께 은밀히 고려 조정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고려의 왕은 공민왕이었습니다.

그는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고, 외부적으로 친명정책을 통해 원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자 했습니다. 이 둘이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민왕은 쌍성총관부가 있는 동북면 지역을 공격했고, 동북면 안에서는 이자춘과 이성계가 움직여 고려는 옛땅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자춘은 공신이 되었고요. 동북면의 유일한 패권자가 된 이자춘은 아들 이성계와 함께 개경으로 가게 됩니다. 원에 투항했던 반역자 집안에서 왕이 직접 하사한 집에 사는 공신의 가문으로 거듭난 것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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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1개국, 박시백, 휴머니스트
2) 위의 책
 

칼럼을 쓰다 보니, 제가 전주 이씨인데 약간 부끄럽네요. 어떻게든 조국에 이익이 되는 일을 하면서 자신도 성공했다 할 만한 지위를 얻었다는 점에서 끝내주는 처세라 봐야 할지, 비열한 기회주의적 행위라 봐야 할지요. 만약 이안사가 도망자 신세로 원에 투항하지 않고 고려에 남아 있었다면, 일국의 죄인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이자춘이 그대로 원제국의 관료로 만족했다면, 망국의 관료이자 고려의 반역자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를 읽는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였던 것이죠. 그들은 운명을 개척했고, 자손이 나라를 세우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정말 전주 이씨 자손인 저는 그렇게 생각하렵니다.

 

2006년 서울시 9급
※ 다음 중 <용비어천가>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한문으로 된 본가에 국역시를 덧붙이고 국문의 주해를 단 체제이다.
②세종 27년인 1445년에 완성되었고, 주해와 간행은 세종 29년인 1447년에 이루어졌다.
③전체의 구성은 서사[開國頌], 본사[史蹟讚], 결사[戒王訓]의 총 12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④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작품이다.
⑤최초의 국문 악장이다.

정답> ①
해설> 한글로 된 본가에 한역시(漢譯詩)를 덧붙이고 한문의 주해(註解)를 단 체재로 이루어졌다.
오답해설>
② 완성은 세종 27년(1445년)에, 주해와 간행은 세종 29년(1447년)에 이루어졌다.
③ 전체의 구성은 1장․2장의 ‘서사[序詞:開國頌(조선 창업의 정당성과 조선의 무궁한 발전 기원)]’, 3~109장의 ‘본사[本詞:史蹟讚(육조의 사적 찬양)]’, 110~125장의 ‘결사[結詞:戒王訓(후대 왕에 대한 권계)]’로 이루어져 있다.
④⑤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작품이자 최초의 국문 악장이며, 15세기 중세 국어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2014년 경찰직 2차
※ 조선 초기에 특별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민족 문화인 한글의 창제와 사용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한글 창제가 요청된 것은 민본 사상이 발달하면서 백성들이 배우기 쉬운 문자를 만들어 국가의 통치 이념을 백성들에게 직접 전달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② 서리들이 행정 실무에 이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채용에 한글을 시험으로 치르게 하였다.
③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서 왕실 조상의 덕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편찬하였다.
④ 부처님의 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은 한글로 간행될 수 없었다.

정답> ④
해설> “석보상절”은 세종의 명을 받아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어머니 소헌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을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최초의 책이다. 이에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가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와 더불어 한글로 표기된 한국 최고(最古)의 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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