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범 변호사의 법정이야기(75) - 영혼 없는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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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범 변호사의 법정이야기(75) - 영혼 없는 재판
  • 신종범
  • 승인 2017.03.31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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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범 
법률사무소 누림 변호사 
sjb629@hanmail.net       
http://blog.naver.com/sjb629  

상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다가 의문이나 불만이 있으면 콜센터를 이용하게 된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문의를 할 수 있지만, 빨리 답변을 듣고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상담원과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믿음이 가고 심적으로 더 안정이 되는 것 같아 전화번호를 누르게 된다. 하지만, 전화를 걸더라도 바로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우리를 맞아주는 것은 ‘반갑습니다’ 라고는 하지만 전혀 반가움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녹음된 기계음이다.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그 후로 오랫동안 여러 과정을 거치는 수고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렇게 연결된 상담원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행여나 연결이 끊길까봐 조마조마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상담원은 녹음된 기계음과 달리 말을 들어주고 대꾸를 해주니 답답함이 덜 하다. 그런데, 사람인 상담원과 이야기를 하는데도 전혀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지 않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그런 상담원은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불만에 연신 ‘죄송합니다’를 쏟아 내지만 전혀 죄송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문의에 대한 답변은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만 같다. 상담원은 ‘네, 네, 고객님’을 연발하지만 그에게 난 그저 성가신 불만꾼일 뿐이다. 사람 사이의 대화이지만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영혼 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이럴바엔 차라리 홈페이지를 방문하거나 그냥 기계음을 들었어야 했다.

최근에 공판 기일에 형사법정에 간 일이 있다. 단독사건이었는데, 비교적 젊은 여자 판사분이다. 경험상 당사자들에게 재판 과정을 잘 이해시키면서 이야기도 충분히 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고 법정에 들어갔다. 의뢰 받은 사건 시간 보다 조금 일찍 참석하였기에 앞 사건들을 지켜 보았다. 그런데, 경험이 항상 들어 맞는 것은 아니다. 판사는 기록을 뒤적이면서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로 재판을 진행한다. 피고인이 알아 들었는지 상관없이 진술거부권 고지 등 절차를 이어간다. 피고인은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한 듯 한데 물어보지도 못하고 주위만 두리번 거린다. 판사는 피고인은 물론 검사나 변호인이 이야기할 때도 쳐다보지 않는다. 공판은 요식행위일 뿐 판사는 판결문에 담을 기록에만 관심이 있는 듯 했다. 변호인의 침 튀기는 변론도, 나이 많은 피고인의 회한이 담긴 눈물 어린 최후 진술도 그 재판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였다. 필자가 의뢰 받은 사건은 공소사실을 전부 인정하는 터라 양형을 위해 감성적 변론이 필요했지만, 변론요지서를 잘 검토해 달라고 하고는 짧게 변론을 마쳤다. 어차피 서면으로 볼테니 심기를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재판 당사자와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형사법정의 모습이었다. 민사법정에서도 가끔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 ‘소장, 답변서 진술하고 ...’, ‘증거에 대한 의견은 ...’ , ‘... 석명을 구합니다’ 등 판사는 빠르게 재판을 진행하는데 대리인이 없는 당사자들은 판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판사는 다음 기일을 지정하거나 변론을 종결하고 기다리고 있는 다음 사건을 호명하기에 바쁘다. 사람이 하는 재판이지만 소통이 없는 ‘영혼 없는 재판’인 것이다. 이럴바엔 차라리 인공지능 로봇이 하는 재판을 받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전관예우 등 형평에 반하는 판결이 나오지는 않을테니 더 안심도 될 듯하다.

우리는 공무원이 민원인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쉽게 일처리를 하면서 철밥통만을 지키려고 할 때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고 말하곤 한다. 법원 공무원인 판사가 당사자들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당사자들에겐 생사가 달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건을 쌓여있는 업무로만 생각하고 재판을 할 때 그 재판은 ‘영혼 없는 재판’이 되고 만다. ‘영혼 없는 재판’을 받는 피고인은 재판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다짐을 할 기회를 가질 수 없고, 중한 재판 결과는 자신에 대한 부당한 형벌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영혼 없는 재판’을 받는 민사나 행정 사건의 당사자 또한 재판을 통해 치유되는 과정을 갖지 못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재판 결과는 자신에 대한 또 하나의 억울한 처분이라고 느낄 뿐이다. 매우 드물게 접하게 되는 감동적인 재판을 보면, 판사가 당사자들의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하면서 소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재판의 결과에는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사건에 갇혀 있는 판사들에게 사명감만을 내세우며 그런 재판을 원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밖에 없다. 판사로서의 소명의식과 함께 법관 증원 등 제도적 개선도 함께 이루어져야 비로소 ‘영혼 있는 재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상품이나 서비스의 조그마한 하자를 해결하기 위해서 상담원과 통화하려고도 그렇게 전화버튼을 누르게 되는데 생사가 달린 것처럼 느껴지는 중요한 재판에서 제대로 소통이 되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오늘도 ‘영혼 있는 재판’을 기대하며 법정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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