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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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 노범석
  • 승인 2017.03.2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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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국사 노범석 교수의 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시대적 상황이 갈라서게 만든 부자관계, 드라마 <추노>와 <삼총사>

인조 대를 배경으로 한 팩션 드라마 <추노>에서는 훈련원 소속 관노비인 절뚝이가 등장한다. 그는 절름발이라 평소 같은 소속 노비들에게 멸시와 폭력을 당해왔다. 그러다 훈련원의 관노비들이 기회를 틈타 탈출하려고 시도하다가 순찰 도는 무관들에게 발각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이때 절뚝이가 이가 빠진 대도를 들고 와 구출한 후 같이 탈주한다.

그의 정체는 훈련원 교관 송태하(배우 오지호)로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왕족의 장례 기간을 3년에서 3일로 줄인 것에 항소하였다가 조정에서 찍혀 군량미를 착복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훈련원 관노로 목숨을 부지하였다.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면서 절름발이가 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는 송태하의 연기로, 이후 소현세자의 마지막 혈육인 석견을 지키라는 밀지를 받고 훈련원을 탈주한다.

드라마에서 송태하가 밀지를 읽을 때 잠시나마 소현세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는 편지를 쓰면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데, 이는 당시 실록에 기록되었던 내용을 토대로 각색된 것이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가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종래에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한 것이라고 봐왔으나, 소현세자의 기록들을 토대로 봤을 때 최근에는 의료사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청에게 항복한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게 된다. 이때 왕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도 같이 청에 끌려가게 되는데, 훗날 조선의 간청과 몸값 지불 등을 통해 백성들을 다시 돌려받게 되는데 이를 “속환”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속환으로 돌아온 남자들은 별 문제가 없었던 반면 여자들은 정절을 잃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갖은 멸시와 학대, 문중으로부터의 추방이나 이혼 등을 당해 비참한 삶을 살게 되어 크나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오늘날 이들을 “환향녀”라 부르며 “화냥년”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는 말이 상식처럼 퍼져 있지만 사실 이는 근거가 전혀 없다.

애초에 “환향녀”라는 말은 어느 역사서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용어이며, 학계에서는 “화냥년”이 창기를 뜻하는 중국어 “화낭(花娘)”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중국의 심양에서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때 거주한 관소를 심양관이라고 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아직 명나라가 건재하였기 때문에 청은 심양관에 있는 왕자들을 미끼로 조선이 명을 돕지 못하고 조선을 길들이고자 하였다.

인조가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청은 “조선왕은 너의 세자를 잊었느냐? 너의 아들도 잊었느냐? 짐을 잊었는가?”라며 협박장을 보내는가 하면,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은 “조선 왕을 끌어내고 소현을 세웠으면 나았을 거”라 운운하는 등 인조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잦았다.

아버지가 조선에서 시달림을 당하고 있을 때 소현세자는 심양관에서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를 능숙하게 처리하였다.

특히 명나라와의 밀교 문제 등에서 원만하게 해결하였는데, 임경업과 최명길 등이 비밀리에 명에 외교문서를 보내다가 적발된 사건이 일어나자 소현세자는 당시 실권자인 도르곤을 직접 찾아가 관련된 조선인들의 목숨을 살려 귀국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심양관에서 아내 강빈의 권유로 농장을 만들고 노예시장에 나온 조선인들을 구출하여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고,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면서 많은 부를 얻었다.

역사 드라마에서는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유능한 아들을 시기하는 못난 아버지로 묘사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고전 소설 “삼총사”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 <삼총사>에서도 인조는 소현세자를 보고 “나보다 배포가 큰 아들은 원치 않소. 윗사람이 꺾이지 않고 저리 끝까지 가면 결국 아랫사람이 따르기 마련인 법이오. 훗날에 저놈을 따르는 자가 나보다 많아지면 어쩌오?” 라면서 아들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드러내며 폐세자를 시키려다 최명길과 김자점의 간언으로 그만두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당시 인조와 소현세자와의 관계는 정치적인 맥락에서 보는 게 더 맞을 듯하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얼마 뒤 호란을 겪으면서 왕의 권위가 실추된 상황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버리게 된 것이다.

오히려 인조와 소현세자와의 관계는 영조와 사도세자보다 선조와 광해군, 고려의 충렬왕과 충선왕과의 관계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실추된 왕실의 권위 때문에 조정에서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선조는 광해군을 견제하기 위해 어린 영창대군과 소북파를 이용했던 것이다.

인조 때는 그보다 심각하여 마치 원간섭기 때의 고려처럼 자칫 청의 입김으로 왕위가 바뀔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소현세자가 귀국할 당시 그를 왕위에 앉히려는 심기원의 역모 사건도 터졌던 상황이라 인조의 세자에 대한 경계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

향후 소현세자가 조선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장례식도 조촐하게 치르고 세자빈과 그의 자식들을 비참하게 죽게 만들었던 것도 인조 개인의 시기심에서라기보다는 정치적 상황이 빚어낸 결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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