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7)-김부식의 맞수 제거 - <송인(送人)>의 정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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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7)-김부식의 맞수 제거 - <송인(送人)>의 정지상
  • 이유진
  • 승인 2017.03.28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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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인종 13년(1135) 1월 15일, 묘청이 서경성(지금의 평양)에서 무력시위를 벌였습니다. ‘묘청의 난’이라 알려진 이 사건을 진압한 사람은 김부식이죠. 그래서 이 사건을 김부식과 묘청의 대결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묘청의 난’에는 김부식과 다른 한 사람, 바로 ‘송인’의 작가 정지상의 갈등이 먼저 존재했습니다.
 

cafe.daum.net/naraeyoujin

김부식은 고려 중기의 유학자로 현존 최고의 역사책인 <<삼국사기>>를 남긴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문적(文敵)이자 정적(政敵)인 정지상을 미워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김부식은 서경의 묘청군을 진압하기에 앞서 눈엣가시였던 정지상을 먼저 제거했습니다. 정지상이 목숨을 잃은 뒤, 주변 사람들은 "김부식이 본래 정지상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어, 반역을 핑계로 정지상을 죽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증거가 되는 일화가 하나 보도록 하죠.

어느 날 시회(詩會)에서 정지상이 특유의 문장으로 주위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 문장가였던 김부식도 그 자리에 참여하고 있었죠. 정지상의 시가 맘에 들었던 김부식은 정지상에게 금방 지은 시를 달라 청했고, 이에 정지상은 '봄날의 산천경계'를 주제로 ‘녹(綠)’운을 띄우며 김부식의 답시가 마음에 들면 시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시화에 자신이 있던 김부식이 흔쾌히 답시를 읊었으나, 정지상은 격이 없다며 핀잔으로 답했죠. 김부식이 이때부터 정지상을 몹시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어때요? 김부식의 마음이 이해가 좀 되죠? 직접 보지 못했으니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정지상이 재능과 함께 겸손도 겸비하였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지상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습니다. 다섯 살에 시를 지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고향인 서경을 떠나 개경으로 유학 오기 전, 고향과의 이별을 노래한 <송인(送人)>을 지어 당대 문인들의 찬탄을 받았죠.1)

<송인(送人)> 정지상

비 개인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雨歇長堤草色多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 마를 것인가,                大同江水何時盡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別淚年年添綠波

성 격▶서정적, 송별(送別)시
형 식▶한시, 7언 절구
주 제▶이별의 슬픔
출 전▶<<파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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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물로 보는 고려사. 송은명, 시아

이 시는 우리나라 한시 중 송별의 주제를 가진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떠나지 못하도록 비가 계속 와야 하는데 비는 개고, 항구의 긴 둑에는 풀들이 푸르름을 더하니 화자의 슬픔은 상대적으로 더 고조됩니다. 하지만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이 항구에서 이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대동강 물은 마르지 않을 거라며 자신의 슬픔을 달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정지상은 김부식에게 정적(政敵)인 서경파였습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세력이었죠. 이들의 고향인 서경은 지리적으로 국경에서 송과 요의 거란족, 금의 여진족을 직접 막아내는 북방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들은 군사적 힘의 중요성을 몸으로 느꼈으며, 고려 초기의 강건한 기풍을 되살려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또한 고려 초기의 강건한 기풍은 불법(佛法)에 의해 지켜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이상향은 중원을 호령하고 만주를 지배했던 고구려였고, 이 집단의 대표자가 서경 출신의 정지상과 묘청이었습니다.

반면 경주 김씨 출신의 김부식은 개경파의 대표자였죠. 이들은 이자겸의 난 이전부터 고려 조정에서 관료를 하고 있던 전통적 문벌귀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교적 학풍을 가지고 선진 문물을 겸비한 중국에 대한 사대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멀게는 과거 신라시대의 태평성대, 가까이는 문종의 태평성대를 이상향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이었고, 각자 다른 성격의 파벌에 속해 있었으니, 두 사람의 갈등은 당시 권력투쟁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역사의 사건은 하나의 거창한 이유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소한 다툼, 감정, 성향 그리고 주변의 이해 관계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큰 사건이 됩니다. '묘청의 난', '서경천도운동'은 단순히 김부식과 묘청의 정치대결이 아니라, 정지상에 대한 김부식의 원한과 정치적 대립으로 발생한 정적 제거의 수단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2014 국회직 9급
※ 묘청의 난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귀족 사회 내부의 족벌과 지역 세력 간의 대립 양상이었다.
② 풍수사상 등 전통 사상과 유학 사상의 대립적 성격을 띠었다.
③ 묘청은 거란의 압력에 대항하며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하였다.
④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묘청 세력의 자주적 성격을 높이 평가하였다.
⑤ 난의 결과 서경파(西京派)가 몰락하고 서경의 분사제도가 폐지되었다.

정답 ③
해설 : 묘청은 ‘금(金,여진)’의 압력에 대항하여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할 것(칭제건원)과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고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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