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3)-‘화랑(花郎)’을 노래하다_ 찬기파랑가와 모죽지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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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3)-‘화랑(花郎)’을 노래하다_ 찬기파랑가와 모죽지랑가
  • 이유진
  • 승인 2017.02.28 14: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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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최근 종영한 KBS 드라마 ‘화랑’은 진흥왕(삼맥종)이 화랑들 속에서 신분을 감추고 때를 기다렸다는 흥미로운 설정을 하였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흥왕은 15세(‘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7세로 기록1))에 즉위했다고 하니 아마도 그가 화랑이었던 기간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진흥왕과 화랑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진흥왕은 자신을 ‘전륜성왕(속세를 통일하여 불법으로 통치할 이상적 왕자)’으로 칭하면서, 화랑을 전륜성왕의 挟侍仏(협시불, 불교에서 본존을 옆에서 모시고 있는 불상)인 미륵불의 화신이라 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왜 이렇게 화랑도를 중시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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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이 즉위한 때는 신라가 급속히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증조인 22대 지증왕은 ‘사로국이’라는 국호를 ‘新羅(신라)’로 바꿨는데, 이는 “徳業一新 網羅四方”(덕업일신망라사방: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하라.)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소국에 지나지 않았던 사로국이 경상도 일대를 지배하는 대국으로 성장했음을 널리 알리려는 것이었죠. 이를 이어 큰 아버지 23대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했습니다. 다양한 민간신앙을 믿던 사로국 사람들은 이제 하나의 종교 아래 한 왕의 지배를 받는 ‘신라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대의 치적에도 내우외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왕통을 이을 왕족이 계속 줄어들고, 그에 따라 왕비족인 박씨와 석씨를 포함한 기존 족장 세력이 다시 왕권을 위협했습니다. 특히 진흥왕이 즉위했을 때는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어 왕비족의 권력이 왕권보다 강했습니다. 게다가 외부적으로는 삼국 간의 항쟁이 점차 치열해졌죠. 특히 강국이었던 고구려의 남하는 이제 막 국가의 틀을 잡은 신라로서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었습니다. 그래서 진흥왕에게는 왕권을 강화하고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열쇠가 필요했습니다. 이 열쇠가 바로 ‘花郎徒(화랑도)’였습니다.

화랑도는 무예와 학문을 고루 갖춘 청소년 집단이었습니다. 전국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를 중심으로 7~8명의 중심 화랑이 존재하였으며, 각 중심 화랑은 수천의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했습니다. 후대 김유신이 이끌던 ‘용화낭도’가 대표적인 화랑도의 형태입니다. 진흥왕은 그 전까지 민간 단체였던 화랑도를 제도로 편입하여 전문 인재 양성 기관으로 삼았고, 이를 통해 자신만의 추종세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기존에 6부에 소속되던 왕이 더 이상 소속부를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고, 덕분에 국가 중대사에 관한 결정권이 기존의 6부 중심에서 왕권 중심으로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

진흥왕은 화랑을 군사적 기반으로 삼아 북으로는 함흥평야, 남으로는 한강유역과 가야일대를 정복하였습니다. 한강 유역을 정복(후의 당항성, 당성진)하는 것은 중국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신라가 빛나는 문화적 역량을 키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죠.2)

신라의 노래인 향가 중에는 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노래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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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유사』, 일연지음, 김원중 옮김, 을유문화사
2)『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 고조선, 삼국, 서의식 지음, 가람기획
 

지나간 봄 돌아오지 못하니 / 살아 계시지 못하여 우올 이 시름.
볼두덩 눈두덩 좋으시던 / 모습이 해가 갈수록 헐어 가도다.
눈의 돌음 없이 저를 /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낭(郞) 그리운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 / 다복 굴헝*에서 잘 밤 있으리.

-득오, <모죽지랑가> / 감완진 역

* 다복 굴헝 : 다북쑥이 우거진 구렁. 여기서는 무덤을 비유한 말.

「모죽지랑가」를 지은 득오는 죽지랑의 무리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지랑은 김유신과 더불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크게 기여한 화랑입니다. 득오가 이 작품을 죽지랑 생전에 지었는지, 사후에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늙어가는 죽지랑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어 느끼는 애틋한 그리움을 작품에 담았다는 것입니다.

열치매 /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좇아 떠가는 것이 아니냐?
새파란 시내[川]에 / 기랑의 모습이 있구나!
이로 냇가 조약돌에 / 낭(기랑)이 지니시던 / 마음의 끝을 따르고 싶구나
아으, 잣가지 드높아 / 서리를 모를 화랑장(花郞長)이여!

- 충담사,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 양주동 역

「찬기파랑가」는 경덕왕 때의 승려 낭도(화랑단에 속한 승려)였던 충담사가 지은 10구체 향가입니다. 화랑으로서 그 뜻이 높았던 기파랑의 모습을 천상과 지상의 자연물인 달, 흰 구름, 냇물, 자갈, 잣 가지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기파랑은 신라인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화랑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시절 화랑은 이 시대의 ‘아이돌’이었던 셈입니다.

통일신라 시기에 김대문은 자신의 저서 화랑세기에서, “어진 정승과 충성스런 신하와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모두 화랑으로부터 나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화랑도’는 인재 양성의 요람이었던 것이죠.

2015년 6월27일 시행 경찰직 1차 한국사

※ 다음은 신라의 어느 왕에 대한 기록이다. 이 왕의 재위기간에 있었던 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국호를 정하지 않아 사라라고도 하고 혹은 사로 또는 신라라고도 칭하였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신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이를 국호로 삼는 것인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제 뭇 신하들이 한마음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에 따랐다.

-삼국사기-

① 우산국을 복속시켜 영토로 편입하였다,
②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③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④ 유교 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립하였다.

정답 ① 사로국에서 신라로 국호를 바꾸고, 왕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꾼 왕은 지증왕으로 우산국을 복속시켜 영토로 편입하였다.
[오답해설]
② 법흥왕 / ③ 진흥왕 / ④ 신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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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8 16:52:20
혀기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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