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비우기 위해 채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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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비우기 위해 채우기 위해
  • 신희섭
  • 승인 2016.09.2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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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창밖으로 휘적 휘적 풍경이 지나간다. 기차는 앞으로 가고 풍경은 뒤로 지나간다. 풍경을 따라 여러 가지 생각들도 뒤로 뒤로 흘러간다. 흩어진 생각들 덕분에 마음은 점점 가볍다. 풍경들이 뒤로 갈수록 일상의 권태와 지리한 걱정들이 털어져 나간다. 자유로움. 무엇을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움. 창밖을 바라보며 어딘가로 가는 기차 여행은 그래서 선물이다.

3년 전 가을 어느 날. 갑자기 역마살 스파크가 일어났다. “그래 나가자.” 이 좋은 날씨에 어디든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시간에 출발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 간 춘천.

잔뜩 기대한 춘천행 기차. 그런데 20대에 다니던 ‘춘천 가는 기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청춘열차는 그때 그 열차가 아니었다. 쾨쾨한 기차 특유의 냄새도 사라졌고 덜컹거리는 소음과 기차의 흔들림도 없었다. 너무나 조용히 움직이는 기차에는 승객도 별로 없었고 객차사이를 오가며 음료수와 맥주를 파는 이동식 판매대도 없었다. 경춘선의 백미는 옆으로 한강을 보면서 마시는 캔 맥주였는데 말이다.

살고 있는 삶이 무미건조하다고 느낄 때나 잡생각이 많을 때 춘천은 언제나 환영을 해주었다. 곳곳을 걸을 수 있었던 공지천과 춘천시내가 지친 나를 환영을 해주었고 저녁이면 만날 수 있었던 친구들이 환대를 해주었다. 기억해 보면 20대의 춘천은 위로를 받고 조용히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곳이었다.

다시 찾아간 춘천은 예전과 달랐다. 기차도 바뀌었고, 그때 왁자지껄 하게 술잔을 기울였던 친구들도 없다. 그러나 춘천을 가는 동안 기차 밖의 창이 선물하는 풍경 그리고 풍경과 함께 점차 비워지는 마음은 한결 같았다. 특별한 목적 없이 떠나는 시간의 여유로움이 내게 주는 자유로움 때문이겠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지나는 창밖을 보며 마음을 비우는 여유로움. 그것은 여행이 주는 값어치 있는 선물이다. 허겁지겁 일상에서 놓치는 많은 것들이 속도에 가려져있다. 일상의 속도, 거대한 사회가 부여하는 속도, 한국이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속도.

매일매일 일상에 코를 박고 그저 눈 앞의 일만 보며 정신없이 보낼 때, 고개를 들어 버스 창밖에 시선을 던지기만 해도 짧은 순간 비워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기차를 타고 하는 여행은 이런 찰나적 여유로움보다 더 깊은 풍요로움을 선사한다. 일상의 ‘속도’로부터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아무 계획 없이 그리고 특별한 목적을 가지지 않으면서 혼자 하는 여행을 해본 이들은 더더욱 이 여유로움과 자유로움을 공감할 것이다. 여행은 머릿속 한 가득인 걱정과 조바심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선물한다. 비우기 위한 여행. 복잡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여행. 내게 부과된 부하에서의 해방과 숨 쉴 공간의 부여. 속도가 군림하고 있는 일상에서 일탈로 얻는 자유의 쾌감.

그렇다. 여행은 비우는 것이다. 비우는 것은 다시 채우기 위한 것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배속도 그렇고 머릿속도 그렇다. 하다못해 용량이 어마어마한 컴퓨터도 비우기가 있지 않은가!

요즘 방송매체 통해서 읽게 되는 한국 사회의 한 가지 특징은 먹는 것에서 여행하는 것으로 사회가 이동을 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먹방전성시대’를 지나면서 이제 ‘여행의 시대’로 가고 있다. 많은 여행 프로그램들이 생기고 있다. 이것은 요즘 사회적 경향을 방송이 따라가는 것이다. 경제는 죽겠다고 하지만 여행객 수는 더 늘고 있다. 국내 여행뿐 아니라 해외여행도 더 늘고 있고, 여행의 연령대도 낮아지고 있다.

먹는 것에서 여행으로의 추세변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저 복잡한 세상에 먹고 보자는 것에서 모든 것을 잊고 지금 현재를 즐기자는 또 다른 1차원적인 도피일까? 철없는 20대나 30대들이 어두운 미래 때문에 저축은 포기하고 현재에만 충실한 소비문화의 특성일까?

여행은 먹는 것과는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먹는 것은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채우는 것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맛있는 것을 채워가는 것이다. 인간의 일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이가 들어 권력의 의지가 약해지고 성욕이 줄어들면서 식욕이 강해진다. 그러나 최근 먹방은 나이와 관계없이 먹는 것에 집중한다. 이것은 복잡함에 대한 도피이자 사회로부터의 자기 방어이며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날 수 있다. 물론 맛집을 공유하는 사회화기능은 있지만.

여행은 비우기 위한 것이다. 왁자지껄하게 친구들과 여름 바닷가를 찾는 것이나 단체 여행프로그램에 가족들을 집어넣는 여행은 목적이 있는 여행이라 자신을 비우기 어렵다. 그러나 오롯이 자신에게 시간을 주고 목적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선사하기 위한 여행은 자신을 비우게 한다. 그런데 인간은 비울 때 자유로워진다. 욕심과 일상에서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자신을 다독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비워진 공간은 새로운 에너지와 아이디어로 채울 수 있다. 무심히 차창을 바라보는데 번쩍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다.

살면서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뜸이 필요하다. 계속 불을 세게만 튼다고 밥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인생의 다음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뜸을 들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더 많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나 더 높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나 더 강력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야 한다. 그리고 비워서 얻게 된 자유와 여유로움은 남들이 부여한 속도가 아닌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한국 사회는 현재 먹는 것에서 여행하는 것으로 ‘진화’해가고 있다. 그저 더 많이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우기 위해서 그리고 재도약하기 위해서 더 많은 이들이 여행을 한다.

가을. 이 아름다운 계절에 비우기 위해 그리고 다시 채우기 위해 어디든 가장 빨리 구할 수 있는 표로 기차여행 한 번 해보면 어떨까? 스마트 폰 대신 책 한 권 손에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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