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106) - 가을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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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106) - 가을라면
  • 차근욱
  • 승인 2016.09.20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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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공단기 강사

추석이 지나고 나니 가을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이런 가을바람을 맞고 있노라면, 새삼 라면이 먹고 싶어진다. 어떻게 보면 좀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시는 분은 아시리라. 가을바람과 라면냄새가 얼마나 환상적인 하모니를 연출하는지.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어디든 경치 좋은 곳이 나오면 그 곳에 차를 세우고 가족들이 함께 라면을 끓여 먹을 때면 그렇게 행복하다고. 라면이 우리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어쩌면 다 쓸데 없는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라면은 이렇게 우리 생활 가까이에서 소박한 추억을 담으므로.

군대에서 훈련 중 먹었던 라면 맛을 잊을 수가 없다든지 여행가서 먹었던 라면 맛을 잊을 수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듯이, 나 역시 잊지 못할 라면이 있다.

몇 해 전이었던가, 이맘때였다. 제법 오래된 이야기인데, 그 시절의 부모님께서는 두 다리 모두 튼튼하셔서 온 가족이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바닷가 쪽을 돌았던 여행이었는데, 여행 마지막 날 어머님께서는 전 날 먹고 남았던 회와 김밥 등을 냉장고에서 꺼내셔서 라면을 끓이셨다. 나는 사실 무언가 잡탕으로 섞어 끓여 먹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지라 처음에 어머님께서 잡탕라면을 만드셨을 때 내심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을 내음과 더불어 이런 저런 것들이 어우러진 라면 냄새는 호텔 특급 요리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의 강렬한 유혹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라면을 온 가족이 맛있게 먹고 귀가 길에 올랐었던 추억은 그렇게 참 행복하게도 남았다. 가족이 함께 먹는 라면이란 어쩌면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고교시절에도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난 뒤에나 시험이 끝난 뒤에는 늘 모여 라면을 먹었다. 한참 먹고도 또 맛있을 시절인지라, 아무리 먹어도 맛있었고 친구들이 있어 더 맛있었다. 이제는 그 친구들과도 연락이 끊긴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했던 그 기억들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웃음 짓게 하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뭔가 그리운 맛. 라면은 가끔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너무나도 흔하지만, 그래도 너무나 그리운 것. 기억은 이렇게 바람과 냄새를 통해 우리를 시간 저 편으로 이끈다.

가끔, 마음이 고플 때면 라면을 끓인다. 굳이 배가 고파서가 아닌, 굳이 먹기 위해서도 아닌. 그저 라면을 끓이며 그 시절로 돌아간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왁자지껄 여행을 했던 기억들, 친구들과 함께 시끌벅적 농담하고 장난치던 그 시절로, 나는 라면을 끓이면서 돌아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있지만, 가을의 라면은 특별하다. 변해가는 계절 속에서 홀로 고요히 지난 추억을 반추하게 하는 라면의 내음은, 어쩌면 지나버린 유년 시절에 대한 미련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보내야 할 시간에 대한 향수일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없던 시절, 그저 라면 하나면 좋았고 라면 하나면 만사 오케이였던 시절. 어느덧 이렇게 가을이 되고 다시 또 한 해가 저물 준비를 시작할 때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과 여전히 닿아 있는 라면은 어쩌면 슬프고 어쩌면 따스한 그 특별한 무엇이 된다.

이제는 칼로리를 따지고 성분을 따지며 탄수화물은 복부비만의 원흉이라 라면은 피하는 것이 럭셔리 웰빙 라이프가 되어 버린지 오래인 시대이지만, 가을의 라면은 그런 얄팍한 상식을 초월해 존재한다.

세상의 험하고 사나운 것들을 피해 겨우 숨을 돌린 지친 마음에 따스한 국물이 위로를 건낸다. 비록 한 봉지의 라면이지만, 비록 계란이 들어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안도하게 한다. 가을의 라면은, 그래서 가끔은 많은 상념에 젖게 한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에서 따끈히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쳐다보며 나는 문득 이제는 볼 수 없는 얼굴들을 떠올린다.

파란 하늘 아래서, 어쩐지 웃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가을의 라면을 마주하고, 나는 그렇게 그 시절로 돌아간다. 나는 다시 송글송글 맺힌 땀을 연신 닦아 내는 풋내기 소년의 마음으로 코를 훌쩍이며 라면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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