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100)-君子不器(군자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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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100)-君子不器(군자불기)
  • 차근욱
  • 승인 2016.07.26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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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얼마 전 논어와 명심보감 특강을 마쳤다. 고전을 강의한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 중의 하나인데, 정형화된 알음알이보다는 삶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강의를 명분으로 고전을 다시 읽어볼 수도 있고, 스스로를 다시금 돌아볼 수도 있기에 고전강의는 언제나 즐겁다. 물론, 얕은 한문 지식과 중국어 실력으로 혹여나 뜻을 왜곡해 잘못 전달하면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이 늘 앞서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논어’는 오랜 관심의 대상이었던 고전이었다. 동양인으로서 동양의 가치를 사랑했기에 한창 검도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하던 고교시절부터 큰 매력을 느껴왔던 경전이었달까.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고교생이 논어를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처음 爲政(위정)편에서 ‘君子不器(군자불기) -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접하고서, ‘당연하지. 사람이 사람이지, 어떻게 그릇이 돼?’라며 참 단순하고도 저렴한 생각으로 논어를 대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한글 번역본을 보면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써놓았다는 생각에 시시해하며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저 휙 휙 지나가버렸다. 뭐, 굳이 말하자고 한다면 ‘쿨무식’이라고나 할까. 아, 아 불경스러워라. 공자선생님, 죄송합니다. 나중에 공부가 조금 더 되었을 때, 그 짧은 한 구절 속에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보다 넓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고 다시금 고민이 시작되기도 하였지만.

군자란 공자 선생님께서 생각하신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중용이 ‘인간의 길’이라고 한다면 논어는 ‘성현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군자란 바로 그 성현의 생생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모습으로서 후회 없이 살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유학이기에, 군자란 그 정점의 완성된 인간이다. 그렇기에 군자는 완전체로서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롭고 유쾌하며 아집 없는 상태를 뜻한다. 결국 언제 어느 곳에서든 더불어 살아가며 세상을 밝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더불어 살아간다는 점인데, 우리가 흔히 ‘더불어 살아간다’라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사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대를 포용해야 한다. 상대를 포용한다는 것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인데,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욕심에 눈멀어 오직 보고 싶은 대로만 볼 뿐,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바라볼 수 없는 원초적 한계를 지닌다. 그러니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란 얼마나 자유로운 인간인가. 그래서 공자 선생님께서는 ‘나는 아는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내공이 가능한 것일 아닐까. 나는 이 말씀을 도덕경의 텅 비어있음과 같이 ‘나는 아집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君子不器(군자불기)’라는 말씀은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의미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릇’이라는 명사 자체가 아니라 그 함축적 의미이다. ‘그릇’은 담는 것이다. 담는 것이기에 그릇은 쓸모가 있다. 하지만, 군자는 담는 그릇의 쓰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나름대로 잘난 사람은 쓸모 있는 그릇이 될 수는 있지만, 군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 군자는 아집을 버렸기에 무엇이든 채울 수 있고 어디에서든 조화를 이룰 수 있으니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러니 ‘君子不器’는 ‘군자는 줄기세포다’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미리 선입견을 갖고 세상만사를 대하지 않고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으니 맑고 따스해 무엇이든 될 수도 있고 누구든 있는 그대로 가슴에 담을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얼마나 알고 있나. 과연 정말로 자신의 가족을, 친구를, 연인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 얼마나 될까. 상대방에 대해 잘한다 못한다, 예쁘다 추하다, 맘에 든다 맘에 들지 않는다, 옳다 옳지 않다, 잘났다 못났다, 착하다 나쁘다며 쉼 없이 자신의 잣대를 들이댄 평가질에 멀어지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문득 예전에 보았던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 남자가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했다. 하객들은 모두 숨어 있는 상황.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실을 모르는 여인은 남편의 장난스런 연출로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느낌 때문에 그만 남편을 향해 폭발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커튼 뒤에 숨어있던 하객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 여인에게 사과를 하며 모두 조심스럽게 돌아가 버리고 만다. 여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다가 혼자 남은 거실에서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여인이 가해자이고 남편이 피해자도 아닐 것이고 남편이 가해자이고 여인이 피해자라 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저 그 상황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 우리가 이 여인과 다를 바가 있을까. 우리는 있는 그대로 상대의 마음을 보고 받아준 적이 과연 얼마나 있던가.

‘君子不器’를 앞에 두고, 나는 나 자신을 참회해 본다. 나는 내 앞의 인연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가. 정말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했던가. 가슴 속 이야기에 얼마나 진실하게 귀 기울였던가. 나는 내 어리석음을 통해서만 그 사람을 함부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던가.

우리는 모두 그릇이 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가득 차 있는 그릇이 되고 말았다.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다. 비우지 못해 담긴 것은 모두 썩어버렸고, 담고자 했던 것은 모두 넘쳐버린다. 간절히 닿고자 하였지만, 결국엔 흩어질 뿐이다. 슬픈 얘기다.

비울 수 있기에 채울 수 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나 자신을 비워야 한다. 나의 아집, 나의 독선 그리고 나의 교만. 하지만 우리는 비우지 못한다. 그저 자꾸 움켜쥐려고만 든다. 비어있는 잔이 아니니 차를 따를 수 없다. 서로가 비우지 못했으니 서로가 따를 수 없다. 서로가 따를 수 없으니 서로의 마음이 닫혀 간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자꾸만 외로워진다.

세상살이, 사람 사는 일이 아닌 것이 어디 있던가. 모든 것이 사람 사는 일이다. 군자불기란, 군자의 너른 가슴과 웅지로 세상 어느 곳이든 밝히고 비추는 그 광활함을 뜻하는 말이겠지만, 문득 나는 내 좁은 아집과 아둔함을 떠올렸다. 도덕경에 上善若水(상선약수 –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라 했다. 아래로 흐르며 그 형태를 인정해 맞출 줄 아는 모습이 君子不器와 같다. 논어 學而(학이)편에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역시 군자답지 않은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 하신 말씀도 결국엔 君子不器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가득찬 그릇임에도 왜 내 그릇을 몰라주는지, 내가 담고 있는 것을 왜 대단하다 떠받들어 주지 않는지 짜증스러워 불만에 가득 찬 모습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비울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있는 그대로 소중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지, 얼마나 소중히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는지, 얼마나 존재 그 자체를 감사해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는지가 인생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것들일 뿐이다. 내가 남들이 알아준다 알아주지 않는다라는 허명의 아집을 버리고 텅 비어있는 자유가 될 때,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후회 없이 살 수 있다. 후회 없이 살 수 있다니, 행복한 인생이 아닐 리가 없다.

라디오 비밥 100회를 맞이해 어떤 이야기를 할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100회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내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느끼며 교감할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 100회를 통해 내가 가슴에 담아야 할 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쾌하고 재미있고 즐거운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 싶어 시작한 라디오 비밥이었지만, 그 또한 울고 웃는 가슴이 없는 말장난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하며 100회를 마무리 한다. 70이 從心(종심)이라 했으니, 70이 넘어가면 이 아둔함이 좀 나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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