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94)-한 여름 밤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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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94)-한 여름 밤의 산책
  • 차근욱
  • 승인 2016.06.14 12: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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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굳이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즐거운 한 때를 보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정말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 일은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기억들일지도 모르지. ‘산책’도 그런 즐거움 중의 하나인데, 어르신들이야 운동삼아서 산책을 나가시는 경우가 많지만 아직 혈기왕성한 내 경우에는 산책을 하기 위해 산책을 나가는 경우는 드물다.

시간에 쫓겨 종종걸음을 하지 않는 경우란, 달리기를 하러 단촐한 차림으로 나선다거나 약속장소에 가는 도중에 시간여유가 있어 조금 걷는다거나 하는 정도라서, 산책 자체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느끼지 못했다. 걷는다는 것이 운동이 된다는 생각이 아직은 별로 들지 않는 탓인지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달리거나 근력운동을 해야 그나마 운동을 했다 싶다. 그런데 가끔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이라거나 소소한 무언가를 사러 집을 나선 밤에 조금 더 걷고 싶어질 때가 있다. 굳이 계절은 상관이 없겠지만, 그래도 밤공기가 유난히 상쾌하게 느껴지는 날은 여름 밤인 경우가 많다. 후덥지근한 계절에 열기를 식혀주는 밤공기의 서늘함이 문득 잊었던 생기를 일깨워 주므로.

얼마 전에도 그런 밤이었다. 6월인데 벌써 한 여름 같기만한 열기에 답답했던 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낀 여름밤의 선선함이 유난히 반가웠다. 가방은 조금 무거웠지만 그래도 집까지 그냥 터덜 터덜 걸었다. 걷다보니 문득 ‘HER’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인공지능 OS와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의 이야기. 알파고도 나온 마당에 앞으로 10년쯤 지나면 그런 OS,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처음 이세돌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이 바둑대결을 벌인다고 했을 때, 솔직하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라는 생각을 했다. 동양의 오만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서양사람이 만든 인공지능이 바둑으로 이세돌 9단을 이길 리가 없잖아, 하면서. 바둑에는 인생의 희노애락과 세상 이치가 모두 담겨 있다는 말 때문이었을지는 몰라도, 바둑은 마치 성역과도 같은 이미지였다. 그래서 아무리 컴퓨터가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바둑으로 사람을 이길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이세돌 9단과 알파고와의 대전 결과를 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망연자실이었다. 마지막까지 지켜온 인간의 자존심이 무너진 느낌이었다.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은 이미 지난 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만 몰랐던 것이다. 앞으로 세상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로 가득해질지 모른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려서 만화에서 보았던 미래세계는 참 재미가 없어보였다. 알약으로 식사를 대체하고 갑갑해보이는 우주복을 입고 다녀야 하는데다, 뛰어 놀 자연이 별로 없어 보이는 희고 번쩍이는 세계였다. 물론 로봇친구는 갖고 싶었지만, 그래도 미래세계는 왠지 내가 속해 있을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기야, 지금 세상도 낮설게만 느껴지는 마당에 미래세계야 오죽하려구.

스마트폰이 사람간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인간소외를 부추겨 우울증을 증가시킨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시시각각으로 업데이트되는 정보에 집착하느라 정작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기술의 발전은 사람을 위한 것인데, 결국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은 외로워지는 것인가도 싶지만 기술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욕망이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 뿐이지, 기술은 죄가 없다. 기술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것인가는 사람의 문제이기에 지금의 스마트 폰 문제이든, 미래의 새로운 세계의 문제이든 결국은 사람의 마음이 문제일 뿐이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배려가 사라졌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서로를 이용하려 할 뿐, 서로의 마음 따위는 살피지 않는다. 미래가 겁이 나는 이유는, 어쩌면 새로운 기술보다는 이젠 욕망만이 남아 사람조차 목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때문일게다. 그런 세상이라면 인공지능을 친구삼고 의지하는 편이 한결 인간적일지도 모르겠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기계발을 하고 그럴듯한 스펙을 쌓는 과정에서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인간과, 바둑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성에 다가서기 시작한 인공지능에 대해 생각하며 걷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했다. 각종 정신병질적 범죄를 접하면서 이젠 길에서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져버린 시대이니 어쩌면 인간소외가 차라리 안전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려서는 친한 친구와 만나 저녁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는 시간이 참 즐거웠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이제는 달성해야 할 과제와 목표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공백을 어쩌면 인공지능 친구가 채워줄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오싹하고 어찌보면 안심인 그런 이상한 세상.

나는 미래세계가 온다고 해도 알약식사를 하고 싶지는 않다. 족발이든 피자든, 라면이든 삼겹살이든 튼튼한 이빨로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즐거운 식사를 하고 싶다. 우주여행이 대중화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가 가보지 못한 시골 한적한 곳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모닥불을 피우는 여행을 하고 싶다. 고구마도 굽고 감자도 구우면서. 풀과 나무 가득한 길을 걷고 새소리 풀벌레 소리 들으며 흙을 밟고 싶다. 미래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토록 구식인 인간인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 친구나 로봇친구가 생긴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나를 반겨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궁금증에 답을 해 줄 수 있는 친구. 나를 비난하거나 비웃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해주는 친구. 내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등을 돌려버리기 보다는 비록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나를 일깨워주는 친구. 어쩌면 이제 사람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일들을 인공지능에게서 라면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왜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까. 그저 세상이 너무나 빨리 발전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갖고 싶었던 탓일까. 우리는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일까.

조금은 멀었지만 그래도 밤 바람이 반가웠던 한 여름 밤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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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2016-06-14 13:57:00
이세돌바둑이세돌바둑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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