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90)-시시한 일들의 소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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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90)-시시한 일들의 소중함
  • 차근욱
  • 승인 2016.05.1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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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이런 것이 나이드는 증거라고 하는데... 뭐 꼭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근래들어 생활 속 마주하는 소소한 일들의 소중함을 크게 느끼고 있다.

출출할 때면 굶지 않고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생활이라던가, 언제든 걷고 싶을 때 걸을 수 있는 두 다리라던가, 마감에 쫓기기는 해도 글을 쓸 수 있는 일이라던가, 아침에 운동하며 느낄 수 있는 상쾌한 공기라던가, 아직 건강을 유지해주시는 부모님이 계시는 일들이라던가, 내 곁에서 언제나 반가워해주시는 분들이라던가... 돌아보면 모두가 감사한 일들 뿐이다.
 

 

지금보다 더 철이 없었던 무렵에는 주변의 소소한 일들에 대한 소중함이나 감사함을 잘 몰랐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돌아보면 얼굴이 붉어질 뿐인데, 어찌보면 당연한 일상들이 꽤나 짜증스럽기도 했었다. 하고 싶은 일들은 많은데 구질 구질한 일상에 매어서 답답하기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철도 없고 어렸던거다. 부끄럽게도.

학교에 가야 하고 별로 대단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고 언제나 내 걱정을 하시는 부모님이 계시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탓이겠지. 말이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정말로 내게 주어진 그 모든 혜택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세상의 냉정함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게다. 매일 아침 튼실한 두 다리로 달리면서도 근사한 자동차를 차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프랑스나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할까 싶어 이런 저런 일들을 하기도 했었다.

당시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시시했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전부 시시했다. 한국어를 쓰는게 왠지 덜 떨어진 것만 같았고 떠듬 떠듬 하는 소리로 라도 불어나 영어로 이야기를 해야만 뭔가 가치있는 사람인양 느껴졌다. 하다못해 일본어라도 이야기 하는게 우리 말을 쓰는 것 보다 근사하게 느껴졌다. 답답했고 화가났다. 왠지 나를 제외한 모두가 멋지게 살고 있는 것만 같아 시샘이 났다. 나만 후지게 살다 거지같이 죽을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막상 프랑스에도 미국에도 공부하러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 결국 모두 다 그만 두었다. 돈도 돈이었지만, 아무리 짧게 잡아도 귀국은 10년 뒤였다. 그만큼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야, 그 10년이 지난다고 해서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 느끼는 10년이란 세월의 간격은 어마어마 했었다. 어차피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월인데, 그 10년 뒤에 내가 있을 곳이 그곳에도 이곳에도 과연 있을지 덜컥 겁이 났다. 부모님을 뵙지 못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참 쓸쓸했다.

게다가 정말로 어떤 사명이나 특별히 외국에 나가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는 분야가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외국에서 학위를 받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과연 그 과정이 내 인생에서 정말 의미가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은 것을 잃는 것은 아닌지, 허영 때문에 떠나는 길은 아닌지 스스로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가까운 친구는 아쉬운 기회라고 말했지만, 막상 내게 그 기회가 주었을 때, 나는 결국 떠나지 않았다. 내가 소심해서 그런 것이었을지도, 내가 겁쟁이었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지 않기로 하고 나서, 나는 비로소 안심했다. 내가 있을 곳을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아쉬웠지만, 한 편으로는 심기일전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나는 인정하기 싫었던 이야기이지만, 나이가 깨닫게 해 주는 지혜들이 있었다. 나이만 먹는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런 나이와 세월이 앞세우는 식의 권위가 끔찍하게 싫었다. 먼저 태어난 것을 벼슬로 여기는 사람들이 한심해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한국어를 쓰면서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일이 정말 부끄러운 것이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데도 소중한 줄을 모르는 것이 정말 한심한 일이고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건방이 천박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세월이 가며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인생에 정답이 있을까? 그런건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이 정답이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 걸어온 길을 돌아 보았을 때, 조금만 더 세월과 인생에 대해서 조급함이 없었더라면, 조금만 더 열린 마음으로 살았더라면 좋았을텐데 싶어 슬퍼질 때가 있다.

사람은,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오기 전에는 자신이 갇혀있는 그 껍질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헤세의 말처럼,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 하나의 세계가 전부라고 믿고 있어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닫혀있다. 늘 자신의 생각이 옳고 자신이 감정이 전부이고 자신의 행동이 최선이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미망 속에서 갈등과 결별과 파괴를 일삼고 있다. 우리는 그 세월을 보내며 얼마나 많은 기회와 얼마나 많은 인연과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짖밟아 왔던가. 피해자의 얼굴을 한 가해자의 오만으로 얼마나 많은 절망과 후회와 상처만을 남겼던가.

언젠가 택시를 타고서 기사분과 짧지만 깊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보통 택시를 타고서 이야기를 나누는 편도 아니었고 보통 누군가와 교감할 만한 시간도 아니었는데, 그날 밤은 비가 왔던 탓인지 가슴에 남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시작은 운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결국은 세상 사는 이치였다. 초로(初老)의 기사분께서는 운전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다. 평생을 운전으로 먹고 살았지만 갈수록 조심스러워진다고. 이제 막 운전대를 잡았을 때야 차 모는 것이 재미도 있고 자신도 생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심스러워져야 제대로 운전을 배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내가 뭔가 할 수 있고 나 아니면 안될 것 같고 내가 꼭 해야하는 일이고 나만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고 나서야 세상이 보였다. 하루 하루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조심스럽고 어려운 것이 세상살이라는 것을 깨닫고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온 마음으로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마치 운전처럼.

눈 앞에 놓여진 라면 한 젓갈에도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그까짓 것,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아직도 철부지일지 모른다. 라면 한 젓갈의 무게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감사를 배운다.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들. 자신에게 주어지는 많은 일상들이, 결국은 누군가의 배려이고 정성이라는 것을 몰랐던 시절이 있었다. 오만했고 건방졌다. 그래서 나는 너무나 많은 상처를 남겼을 것이고 자신도 모르게 너무 많은 가치를 잃었을 것이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기적은 시시한 일상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다. 내가 생각하는 대단치 않은 무언가가, 지금 마주한 지루하고 하찮은 일들이 그러나 실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닌 기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깨닫고 사는지. 일상 속에서 마주한 대단치 않은 일들에 감사하는 진심으로, 우직하게 앞을 향해 나아간다면 결국 기적은 필연이 되어 우리를 찾는다.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 살다보면 상처도 받는다. 고통일지도, 미련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매일 해는 떠오르고 꽃은 피어나며 새는 지저귄다. 근사한 인생은 반드시 외국의 빌딩 숲 속에서 영어나 불어를 쓰며 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존경할만한 대단한 인재는 반드시 외국의 박사학위가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을까. 내게 주어진 일상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고 그 마음과 기회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정성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꼭 거창한 직함과 화려한 경력만이 그 사람을 가치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나는 이제야 세월로부터 배웠다. 아침 산책 길에 마주한 아주 작은 들꽃의 소중함을 감사할 줄 아는 고결함이 사람을 진실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금 아프다면, 주위를 돌아본다. 내가 잊은 것은 없는지, 내가 못 본 것은 없는지. 잡을 수 없어 아련히 지나가는 순간에, 결국은 내가 아둔한 탓은 아닌가 싶어. 행복도 성공도 이미 내 곁에 있었는데, 그것을 몰라 모두 잃어버린다면 이보다 슬픈 일은 없을테니까.

얼마 전 처음 보는 꼬마 친구가 과자 2조각을 내게 건내 주었다. 왠지 가슴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마음을, 나는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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