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87)'-4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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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87)'-4월의 어느 날
  • 차근욱
  • 승인 2016.04.2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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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4월의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메밀국수가 먹고 싶어졌다. 창밖에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고 집 안에는 보랏빛의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읽던 책을 덮고선 천천히 그 저녁의 풍경을 음미했다. 공기는 달구어진 채로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눈을 감고 달큰한 봄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여름이라면 매미 소리가 들릴 텐데.

그대로도 충분히 좋았지만 약간의 시장기가 돌기 시작했다. 매미소리가 연상이 되었던 탓인지 가다랑이 소스에 찍어 먹는 메밀 면이 그리웠다. 시내로 나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왠지 지금의 고요와 평화로움이 좋았다.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을 하다 결국엔 메밀 면을 사러 나가기로 했다. 메밀국수도 사고 소스도 사고 무도 사야지. 연겨자는 필요 없다. 무에서 매콤한 맛을 내 줄 테니까. 시장에 가서 생 메밀 면을 바구니에 집어넣고 소스를 찾아 넣고 마지막으로는 큼직한 무도 하나 샀다.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올려다보니 이미 어두워진 하늘은 깨어질 듯 맑았다. 구름이 청아한 모습을 하고는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메밀국수 먹고 나서 좀 달릴까? 바람이 좋았다.

주방에 와서는 물을 끓였다. 먼저 메밀 면을 삶아야지. 메밀 소스는 조금 진하게. 물을 너무 많이 넣으면 싱거우니까 물은 그냥 소스 원액의 2배 정도만. 소스에 연겨자를 풀어 먹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무채를 통째로 먹는 편이니 소스에 연겨자를 풀지는 않는다. 무만으로도 충분히 매콤하니까. 물이 팔팔 끓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무를 씻은 뒤 채칼로 무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가 좋으니까 무채는 넉넉하게 만들었다.

물이 끓어오르면 메밀 생면을 넣는다. 메밀국수를 먹고 산책을 좀 하다가 달리고 싶으니 면을 너무 많이 삶지는 말아야지. 그래서 면은 1인 분의 반만으로 덜었다. 팔팔 끓는 물에 메밀 생면을 조금 넣고 천천히 젓가락으로 저어준다. 옆으로도 젓고 위 아래로 둥글게 둥글게. 충분히 익을 때까지 익혀주지 않으면 밀가루 냄새가 날 수 있으니 시간을 들여 공들여 젓는다. 이리 둥글 저리 둥글.

면이 어느 정도 익었다 싶어 싱크대에 뜨거운 물을 부어버리고 면은 미리 준비해 놓은 다른 양푼에 넣은 뒤 깜짝 물을 부었다. ‘깜짝 물’이라고 하면 모르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깜짝 물’이란 뜨거운 상태에 있는 식재료에 갑자기 찬 물을 부어주는 것인데 메밀 면은 차갑게 먹는 것이 제 맛이니 면을 식혀주기 위해서 차가운 수돗물을 부어 주었다. 그리고 채반에 받쳐 물을 따라내 버리고, 다시 면을 양푼에 옮긴 뒤 차가운 물을 붓는다. 차가운 물을 받아가며 손으로 면을 흔들 흔들. 뜨거운 기운이 가시게 면을 다시 찬 물에 손으로 잡아 씻는다. 몇 번이나 찬 물에 식혀 면의 열기가 가셨다 싶어 얼음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차가운 물로 씻을 때 얼음을 넣어 면을 정말로 차갑게. 그리곤 다시 채반에 받쳐 탈탈 물기를 털어주었다. 메밀 국수요리는 이것으로 끝.

식탁에 앉아 먼저 메밀국수 소스 사발에 무채를 듬뿍 넣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를 갈아서 소스에 넣어 먹고는 하지만 나는 이렇게 무채를 메밀국수 소스에 적셔 면과 같이 먹는 것이 좋다. 아삭한 무의 식감에는 달달하면서 매콤한 맛이 그대로 배어있어 훨씬 생동감이 있달까.

올해 들어 처음 먹는 메밀국수. 마트에서 파는 대량생산된 소스이긴 해도, 나름 가다랑이 베이스의 소스 맛이 달고 고소했다. 무채를 소스 사발에 다시 충분히 담그고 그 위에 메밀 면을 적셔서 무채를 듬뿍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아사삭 아사삭. 메밀의 풍미와 무의 매콤함이 가다랑이 소스와 어울어져 푸근한 향수를 가져다주었다. 아... 여름의 맛이로구나, 하면서.

달리고 싶은 저녁이었어서 메밀 면을 그리 많이 먹지는 않았다. 더 먹고는 싶었지만, 내일 또 먹기로 하고 그만 정리했다. 사실 면보다는 무채를 더 많이 먹었지.

반팔에 반바지로 갈아입은 뒤, 밤의 거리로 나섰다. 겨울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계절은 어느덧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처음엔 조금 걷다가 이윽코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이마를 가르는 바람이 선선했다. 밤 12시가 가까워져 가는 시간이었던지라 공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벚꽃은 이미 져서 사라져 버렸고 바람에 실려 온 라일락 향기가 달콤했다. 달이 또렷하게 보일만큼 하늘이 맑아 달리기 좋은 날이었다. 한참을 달리고 나서 벤치 쪽으로 걸어가는데 작은 시베리안 허스키 한 마리가 ‘웃는 얼굴’을 하고선 갑자기 나타나 신이 나서 내게 달려왔다. 정말 말 그대로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굉장히 명랑해 보이는 강아지였다.

녀석은 내 발 옆에 의젓하게 앉아서 나를 바라봤다. 너무나 살갑게 ‘친하게 지내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아 나는 허리를 숙여 녀석의 머리를 스다듬었다. 도무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정도의 친근감이었다. 굉장한걸, 이라고 생각했다. ‘이 녀석, 김정은도 꼬실 수 있겠어.’ 싶은 정도였다. 나는 알러지성 결막염이 있어서 털이 있는 동물이 근처에 오게 되면 안구가 붓는다. 마치 안구가 튕겨져 나갈 듯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간지럽고 쓰라리고 퉁퉁 부어 얼얼하다. 하지만 녀석의 친한 척에는 ‘아무렴 어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맨손으로 강아지를 스다듬다니. 보통의 경우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구가 터질 정도로 부어오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곤란하니까.

머리를 스다듬자 기분이 좋은 듯 녀석은 마치 고양이처럼 낮은 소리를 내며 내게 몸을 기대왔다. 이정도로 붙임성이 좋은 녀석이라면 키워보고 싶은걸,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시간에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시베리안 허스키라면 아마도 주인이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목에는 작고 동그란 금속의 연락처가 매달려 있었다. ‘아쉽네.’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왔다. 녀석은 한동안 내 옆에 착실하게 앉아 기대어 있더니 잠시 후 다른 곳에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는지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미련 따위는 없다는 듯 뒤돌아보거나 주저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발견할 수 없는 쿨한 이별이었다.

달려가고 있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미소가 지어졌다. 아, 녀석은 나름대로 자신의 시절을 힘차게 살아가고 있구나. 왠지 대견한 마음까지 들었다. 비록 극지방에서 썰매를 끌고 빙판을 달리지는 못해도 이 대한민국에서 힘차게 달리는 모습에 작은 여운이 남았다. 나는 환경이나 조건의 탓을 하면서 살지는 않았나. 어디서든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주변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모습이란 얼마나 아름답던가.

녀석에게는 아주 잠깐의 만남이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그 만남의 여운이 오래도록 남았다. 일순간 스쳐지나간 인연이었을지라도 잠시나마 마음을 나누고 허물없이 기대어 쉴 수 있는 만남이란 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던지. 알러지성 결막염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시베리안 허시키를 입양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참기로 했다. 마당이 있는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면, 그 또한 못할 짓이 아닌가 싶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마주한 꽃들은 곳곳에서 한껏 밤의 요염함을 뽐내고 있었다. 땀이 조금 나긴 했지만 상쾌했고 이름 모를 시베리안 허스키와의 만남이 따스했다. 안구가 좀 부어오르려나 싶긴 했지만 그까짓 것, 아무렴 어때. 이렇게 근사한 날인걸.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던 4월의 어느 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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