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82) - 계절은, 다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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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82) - 계절은, 다시 봄.
  • 차근욱
  • 승인 2016.03.2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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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매년 새해가 되면 많은 분들이 새롭게 각오를 다지며 새해 다짐을 하곤 한다. 해맞이 이벤트도 있고. 나 역시 마찬가지로. 새해를 맞이하는 1월 1일에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새로운 계획과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새해맞이를 하며 가장 성황인 곳은 헬스클럽이라고 하던가.

하지만 1월 1일도 지나가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각오도 희망도 잃어버린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무렵 찾아오는 봄은, 새삼 아직 새로 시작하기에는 늦지 않았다는 희망을 알려주기 위함인지, 소리없이 그리고 따스히도 삶 속에 스며든다.

지난 겨울은 유래없이 혹독했다. 가혹한 시간이었고 스스로의 한계로 괴로웠다. 아마 누구에게든 겨울은 그러하듯이. 벌겨벗겨진 자신의 밑천을 보고 있노라니, 제 주제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하루를 버텨낸다는 말이 그토록 적절할 수가 없었다.

몇 일전 부모님과 함께 조촐한 식사를 하러 나간 오후, 세상은 어느덧 봄이었다. 볕은 따스했고, 공기는 싱그러웠다. 식사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피자집에 들렸다.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베이컨 포테이토 피자의 포장을 부탁해 놓고, 아버지와 나는 잠시 벤치에 앉았다. 주변에는 카페가 있었던 탓인지, 유모차를 밀고 가는 새내기 엄마들이 담소를 나누며 지나갔다. 저런 평범한 일상이란 얼마나 기적같은 축복인지 새삼 감탄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그 평범한 삶에 대한 소망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가호가 필요하던가. 이렇게 세월을 지나 다시 아버지와 함께 벤치에 앉아 있노라니 문득 그 하루하루를 지나 이렇게 다시 봄을 맞이할 수 있음이 감사했다. 평범해 보이는 순간이었지만, 내게는 특별했다. 삶의 모든 순간에 있어 잊혀지지 않을 스냅사진처럼.

그날, 아버지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다. 그저 아버지와 나는 부자지간으로서 말없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앉아 계시는 동안 아버지는 작은 기침을 하셨고 나는 물을 구해다 드렸다. 물을 드시며 아버지는 빙긋이 웃으셨다. 물을 드시고 나서, 아버지는 내게 이런 저런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언젠가 올지 모를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당부를 듣고 있노라니 몇 년 전, 아버지가 국립묘지 안장절차를 프린트로 출력하셔서 내게 잘 알아놓으라고 하셨던 일이 생각났다. 그 순간, 나는 그 프린트가 미웠다. 대답은 했지만 알아놓고 싶지도 않았고, 국립묘지에 아버지를 모시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 조차 싫었다.

솔직하게 아버지와 나는 그리 살가운 편은 아니었다. 아마 내가 성격이 너무 외곬수라 그랬으리라. 아버지가 살아오신 세상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달랐고, 아버지가 축적하신 경험은 내가 적용해야 하는 인생과는 조금 달랐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인생을 힘껏 살아오신 것처럼, 나도 나의 인생을 힘껏 살아가야만 했다. 마치 당신 시대의 재형저축과 내 시대의 재형저축이 다른 것처럼. 그래서 대부분의 아버지와 아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아버지에게 많은 상처를 드렸으리라. 해병대 참전용사이신 아버지에게 지기 싫어, 일부러 더 고생스럽다는 부대를 지원하기도 하고 진로와 관련되어서도 내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분명 걱정도 하시고 답답도 하셨을게다. 내 몫의 인생에서 나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과는 많이 다른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조금 더 먼 길을 돌아와야 하기도 했었다. 철없고 어린 탓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안정된 삶보다는, 당해봐야 깨닫는 것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 시절의 시련은 내 인생에서 내게 필요한 것들이었을테니. 그저 그 시간 속에서 아버지 마음에 끼쳤을 염려가 송구스러웠다.

저 멀리서 아이들을 안고 업은 젊은 아버지들이 보였다. 아마, 내 어린시절의 아버지도 저러셨을 것이다. 내 아주 어렸던 시절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남한산성을 올랐던 추억 속, 젊고 환히 웃던 아버지의 믿음직한 모습은 언제나 내게 현재진행이었으니까. 비록 내가 잊는 순간이 있었다 하더라도. 내게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그랬다.

아마, 돌아보면 고등학교 1학년 때, 반 친구들이 돌려보다 내게 건낸 잡지를 가방에 넣어두었다가 아버지에게 걸려 무안할 지경으로 혼이 난 뒤, 나는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쑥스러워졌는지도 모른다. 피식하고 웃음이 나는 기억이지만, 돌아보면 늘 그 시절이 그리웠다. 집 앞 마당에는 감나무가 있어 초겨울이 되면 온 가족이 감나무에서 감을 땄고, 겨울밤 내내 어머니는 물레를 돌리며 작품을 만드셨다. 그 시절의 아버지는 이제 남자가 되려는 아들을 정신이 번쩍 나게 꾸짖어 주실 만큼, 아직 힘이 세고 강하셨다.

대학입시에 처음 실패하고 나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던 어느날 밤, 아버지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내 방에 들어오셨다. 난 스탠드 등만을 켜 놓은채 어두운 방안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고, 법과대학에 대한 고집은 흔들리고 있었다. 인생의 첫 관문 앞에서 경험한 실패는 강렬했고 그 공포는 나를 삼켜버킬 정도로 강력했다. 그 때, 아버지는 잠시 책상 옆에 서 계시다가 단 한 마디만을 툭 던지시고는 다시 조용히 나가셨다.

“남자는... 이거다 싶으면, 대가리가 터져도 밀고 나가는게 남자다.”

살아오면서, 그 말씀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날 이후,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보다 편한 선택을 하고 싶은 유혹 앞에서도. 조금은 투박하고 거칠지만, 말을 꾸밀 줄 모르시던 아버지께서 월남전에서 살아남고 세상에서 가족을 지키며 얻게 되셨던 교훈이셨을 것이다. 언젠가, 전쟁보다 세상 살기가 더 무서웠다고 고백하셨던 그 깊으신 삶에 대한 통찰이셨을 것이다. 결국 나는 법과대학에 진학했고 능력이 부족해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아쉬움이야 있겠지만, 후회할만한 인생을 살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어색해졌었고 결국엔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조차 많지 않게 되었다. 어려서 아버지와 함께 가던 목욕을 가지 않게 되었고, 아버지에게 갖고 싶다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조르는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을 돌아 이제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남한 산성을 올랐을 무렵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다시 아버지와 초봄의 벤치에 앉게 되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고 따스했다.

지난 겨울은 혹독한 겨울이었다. 녹화를 하러 가서 8~9시간 동안 1분 단위로 NG를 내어 결국 한 강좌도 찍어내지 못할 만큼 나는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봄은 나에게서 너무 멀었고, 어느새 나는 표정을 잃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앉은 벤치에서 나는 소리없이 찾아온 봄을 다시금 만났다. 아무리 춥고 혹독해도, 아무리 멀고 고단해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뻔하지만 가슴 먹먹한 세상사 이치를 다시금 마주했다. 내게 아직 봄이 왔는지는 모른다. 아마 아직 내게 남겨진 겨울은 조금 더 길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 무너지지 않도록 더욱 이를 악물고 애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랬다. 마음이 깨어지면, 그냥 두어야 한다고. 억지로 일어서려 하지 말라고. 살다보면, 슬픈 날이 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고, 내가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을 때도 있다. 그런 날이면, 그 날의 봄을 생각하리라. 그리고 혼자서 아마 난 중얼거릴지 모르겠다.

‘아버지. 남자라면, 대가리가 터져도 이렇게 가는게 맞는거지요?’

아마 아버지는 빙긋이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여 주실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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