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불가능은 없다. 나폴레옹, 샌더스, 알파고와 이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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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불가능은 없다. 나폴레옹, 샌더스, 알파고와 이세돌
  • 오시영
  • 승인 2016.03.1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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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 / 변호사 / 시인

200여년 전 유럽 평정에 나선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했다. 물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지기 전까지 그의 말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 앞에 그의 승승장구는 무너져 내렸고, 불가능한 세계정벌의 야욕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인간이 세운 문화와 역사를 말살시키고 말았다. 그가 유럽인들에게 안겨준 전쟁의 공포와 참혹함은 “프랑스 문화국가”라는 이미지 속에 감추어지고, 독일의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오히려 피해국으로 치유되는 놀라운 역사적 변신이 이루어졌다. 나폴레옹의 유럽정벌전과 독일의 서유럽을 향한 세계대전은 양자가 가해국이자 피해국이지만, 현대의 역사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가해는 저 한 문장으로 잊혀져가고, 독일 파시즘의 히틀러의 가해 역사만 새롭게 각인되고 있다. 프랑스가 나폴레옹의 동유럽정복에 사과했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하지만 독일은 히틀러의 서유럽전쟁 유발을 끊임없이 사과하고 사과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새삼 양국의 차이를 깨닫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한국 프로기사 랭킹 1위인 이세돌 국수가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바둑 알파고에게 충격의 일패를 당하였다는 사실이 인간의 위대함을 믿는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하고 있다. 결코 인공지능바둑이 인간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기계의 인간도전 승리의 불가능성을 확신했던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혼란에 빠진 것이다. 

알파고의 1승은 “기계가 인간의 미래 심리를 먼저 읽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은 장 자크 루소의 경험론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과거 경험을 통해 축적된 상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경험론에 의해 인간 활동의 과거가 축적되어 현재와 미래를 예측케 하는 이성과 감성의 상호교감은 궁극적으로는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유신론의 귀결로 우리를 겸손케 한다. 과거 인류문화역사의 오랜 경험을 통해 “인간의 영역을 뛰어 넘는 불가역, 불가쟁의 신비한 영역에 존재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살아온 인간의 질서 속에 “인공지능”이 뛰어들어와 우리의 미래를 예측케 되었다는 현실은 두려운 실재가 되고 말았다. 

인공지능바둑 알파고는 “경험론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아마추어, 프로 기사 할 것 없이 그 동안 인간에 의해 두어진 3천만 개가 넘는 기보가 저장되어 그 “바둑 두는 수순”이 경험되고, 그 중에 가장 승률이 높은 착점에 대한 경험을 극대화시킨 것이 바로 알파고의 정체라고 한다면, 알파고야말로 경험론의 화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그러한 경험론의 화신인 알파고는 오직 하나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유일무이한 새로운 창의성”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과연 그러한 “새로운 창의성의 영역”조차 그 동안 인류역사의 경험에서 배제된 “무한 순수의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회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세돌과의 1국에서 경이로운 “102번 착점”은 이세돌은 물론이고 어느 해설자도 미처 찍어내지 못한 아주 독창적인 비수 같은 신수였고, 그 한수로 인해 이세돌 국수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알파고가 경험론에 입각하여 인간이 창의력을 발휘하는 역할을 스스로 창조해 낸 것이다. 무서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알파고의 경험론은 마치 러시아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나폴레옹의 불가능이 없다는 호언장담을 무너뜨린 것처럼 인간의 창의성에 바탕한 경험론을 무력하게 만들고, 인간이 경험론을 통해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유신론의 근거를 허무는 “기계가 신”이 되는 초입단계에 들어섰음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후보 미시간 주 예비선거에서 버니 샌더스가 당초 예상을 깨고 힐러리 클린턴에게 신승하였다. 선거 직전 내내 평균 17% 포인트 정도 뒤처지는 것으로 알려졌던 버니 샌더스가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2% 포인트 정도 이긴 것으로 결론이 났다. 미시간 주의 선거 결과는 앞으로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결정에 결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왜냐하면 그 동안 힐러리 클런턴에게 몰표를 주어왔던 흑인 유권자들이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날 치러진 남부 미시시피 주의 경우 흑인 유권자의 90% 정도가 클린턴에게 몰표를 던진 것으로 출구조사되었지만, 미시간 주에서는 흑인의 50% 정도만이 클린턴을 지지하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선거일 직전까지도 흑인의 30% 정도만이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는 것으로 여론조사 되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흑인의 50%가 버니 샌더스를 지지한 것으로 결말이 났다. 이는 이제 비로소 “흑인의 집단 지성이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기 시작한 것으로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미시간 주 하나의 선거 결과를 놓고 민주당 예비선거의 풍향이 바뀌었다고 속단하는 필자의 단언이 성급한 결론일지 모른다. 미국내 정치평론가들조차 이러한 속단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가 반대로 나올 경우 비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소극적이다. 축구 못하는 해설가가 모든 축구선수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사후평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사후평가에 익숙할 뿐 아주 명백한 경우가 아니면 미래평가를 섣불리 내리지 않는 기본속성이 있다. 국내 어느 언론이나 방송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메이저 언론들은 버니 샌더스 현상을 다루려 하지 않거나 다루더라도 극히 소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필자의 눈에는 버니 샌더스 현상은 이미 극심한 우경화라는 편향성을 보이고 있는 메이저 언론사나 방송사로서는 굉장히 껄끄러운 현상이라고 보이기 때문에 저렇게 메이저 언론사들이 몸을 움츠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끊이지 않고 모여드는 소액기부자들의 행렬은 정치자금모금액에서 수퍼팩에 의존하고 있는 클린턴을 압도하고 있다. 투표권이 만인평등주의에 의해 일인일표주의라고 한다면 소수의 수퍼팩 지지자들은 돈은 많을지언정 표는 적을 수밖에 없고, 반면에 27달러 기부로 상징되는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의 쪽수는 대단히 많을 수밖에 없다. 

여태까지 어떻게 모여야 하는지를 몰라서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대규모 금융회사와 석유와 무기로 상징되는 거대 기업들과 이들의 광고비로 유지되고 있는 메이저 언론사나 방송사들의 집단 결속에 의해 조작되어 온 정치현상이나 정치환멸에 대해 이제 미국민들도 눈을 뜨기 시작했고, 서서히 자주적 집단이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현상이 바로 미시건 주에서의 흑인들의 버니 샌더스 지지로의 방향전환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필자의 관측이다. 장 자크 루소는 그의 저서 사회계약론을 통해 “자연인이 어떻게 자신의 주권을 집단적으로 정치체제에 위임하였으며 그 속에서 어떻게 주권행사를 올바르게 할 것인가”에 대해 설파하였고, 그의 이러한 사회계약론에 근거한 민권사상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의 혁명구호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었다. 물론 그 후 나폴레옹에 의한 프랑스대혁명의 무력화시도가 있었지만, 그의 불가능이 없다는 말은 시대정신인 프랑스대혁명의 기본 정신을 훼손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체포되어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처럼 도도한 시대정신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맞물려 며칠 전 전국 대학교 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이번 4ㆍ13총선투표참여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겠다고 선언하였음은 또한 “젊은 집단지성의 현실정치참여”로의 방향전환이라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라 하겠다. 이처럼 메이저 언론에 종속되지 않는 새로운 “집단지성의 결성과 행동”이 가능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알파고의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컴퓨터의 발달로 인한 인터넷과 아이폰으로 상징되는 통신기술의 발달이 그 중심에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알파고는 이제 인간의 심리를 “사전예측”하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인간 개인이 경험한 경험론과 알파고가 무한정으로 경험하는 불특정 다수의 경험의 축적에서 비롯된 경험론이 상호 충돌하고 있다. 첫 번째 대결에서는 알파고 인공지능이 승리하였다. 문제는 한 개인의 순수한 경험에서 분출되는 창의성과 다수의 혼합적 경험에서 분출되는 최대다수의 경험 중 어느 쪽이 더 정확하고 우월할 것인가는 마지막 다섯 번째 대결의 결과로 집체될 것이다. 아직은 그 결과를 미리 알 수 없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인간이 기계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싶은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경험론의 결집 속에서도 신의 존재를 경함하지는 못할 인공지능 알파고의 몰신(沒神)”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가져본다.

우리의 경험론은 “불가능의 영역”을 예단하고 조기에 체념토록 강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버니 샌더스는 말한다. “어떻게 우리가 대기업에게 이길 수 있어? 우리는 질 수밖에 없어?”라고 하는 세뇌를 대기업과 언론들이 서민들에게 그 동안 집요하게 주입시켜 왔다고. 그러니 이제 그러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도전하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의 격려 앞에 의기소침했던, 눌려 살기만 했던, 현재 주어진 것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고통 중에 살아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이성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는 현상이 이번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를 뽑기 위한 예비선거 양상이다. 1804년 나폴레옹이 자신의 침략전쟁의 승리를 장담하여 장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사용했던 “불가능은 없다.”라는 선동이 2016년 버니 샌더스에 의해 “진짜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고 있던 많은 서민들의 집단이성”에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버니 샌더스의 승리로 끝난 미시간 주의 선거결과는 미국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사건이다. 국내에서는 그 가치를 폄훼하고 있지만,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위대하게 보인다. 이 선거결과를 기점으로 버니 샌더스에 대한 미국민들, 특히 히스패닉계와 흑인들의 선거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예측된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일부 지역 한인연합회에서 버니 샌더스 지지를 위한 후원회가 결성되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작은 현상이지만, 이러한 아시아계의 버니 샌더스 모임이 결성되는 현상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런 와중에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이 김무성 대표를 “이번 공천에서 잘라버려야 한다.”며 극단적 욕설을 섞어가며 분노하며 나눈 대화녹취록이 공개되었다. 발단은 김무성 대표가 친박 누군가가 자신에게 공천살생부 40여명의 명단을 주었으며 그 중에 정두언 의원이 있다는 사실을 정두언 의원에게 알려주었더니 정두언 의원이 이를 공개적으로 공표해 버림으로써 김무성 대표를 난처하게 만든 사건에서부터 비롯된다. 평소의 정두언 의원이었다면 그러한 내용을 공포하지 않고 김무성 대표와 협의하며 타개책을 모색해 나갔을 것인데, 김무성 대표가 이러한 명단을 입수했다며 공표해 버림으로써 오히려 김무성 대표를 난처하게 만드는 반대행동에 앞장섰고, 그때 필자는 “이건 이상하다, 평소의 정두언 의원 답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윤상현 의원의 녹취록 내용에 의할 것 같으면 정두언 의원을 윤상현 의원 측에서 그렇게 발표하도록 사주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역시 정치판은 이해할 수 없는 진흙탕, 뻘밭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사실 정두언 의원에 대한 그 동안의 최소한의 신뢰를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윤상현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특보였고, 사석에서 누나라고 부른다고도 했다. 지난 번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연설장에서도 “나, 여기 있어요.”라고 큰 소리로 박근혜 대통령을 불러 세우는 객기를 보일 정도로 청와대의 복심으로 알려진 정치인이고, 청와대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그 동안 모든 일에 총대를 메고 앞장서 왔음에 비추어 위 취중 악담은 언중유골의 진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고, 이로 인해 새누리당이 집단뻘밭투쟁을 유발시키고 있다. 하여튼 그들 사전에 국민도 없고, 불가능도 없는 “불가사의한 무조건 ‘고(go)’ 증상”을 보게 되는 국민은 씁쓸할 뿐이다.

다가오는 총선, 숭실대학교 김선욱, 김회권, 정무성 교수 등이 공동집필한 “어떻게 투표할 것인가?”라는 저서를 국민들이 한번쯤 읽어보고 투표장으로 나갔으면 한다.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은 정의가 불의를 쓰러뜨릴 때 쓸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데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을 쓰도록 하는 사회는 죽은 시민의 사회이다. 버니 샌더스가 말하는 “불가능은 없다.”는 나폴레옹이 말하는 “불가능은 없다.”와 차원이 다르지 않는가, 차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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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좌회전 2016-03-11 17:13:25
국내 언론에서 샌더스관련 보도를 회피한다는 부분은
매우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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