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79) - 그 시절, 그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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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79) - 그 시절, 그 라면
  • 차근욱
  • 승인 2016.02.2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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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경험에 의하면 가장 살이 잘 찌는 음식은, 바로 라면 국물에 말아먹는 밥이다. 하지만 날씨가 싸늘하거나 깊은 밤 달빛이 애잔하거나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이나 술 한잔에 따끈한 안주가 떠오를 때면 가장 땡기는 것 역시 라면 국물에 말아먹는 밥이다.

라면 국물이야말로 몸에 해롭다고들 하지만 라면 국물만큼 고마운 것도 없다고,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마법의 가루의 위력이기도 하지만, 라면 국물만 있으면 쓸쓸한 출출함도 꺼뜬히 해결할 수 있다. 특히 순두부를 사서 라면 국물만 끓인 뒤, 순두부에 대파를 잔뜩 넣고 팔팔 끓여 계란을 탁! 풀어 먹으면, 뭐 순두부 국이 따로 있나. 이게 그냥 시원한 순두부 찌개지.

사실, 나는 라면의 ‘면’보다는 이렇게 먹는 라면 국물을 더 좋아한다. 아무래도 밥을 말아 먹는 것이나 순두부를 넣어 먹는 것이 좋으니까. 뭐, 나름대로 자기 합리화도 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나름대로는 몸에 덜 나쁠거야, 밥 먹는 거잖아. 라고 생각해 버리니까. 후후후.

그래도,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날이라면 역시 라면이다. 후루룩 후루룩. 그야말로 맛 좋은 라면.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쓰면 특정업체 라면이 홍보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러워, 나름대로 꾀를 부려 은유적인 방법으로 좋아하는 라면을 표현해 볼까 한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라면은 전통적인 라면은 아니다. 튀긴 면을 쓰는 라면이 아니니까. 게다가 좀 담백한 맛이랄까. 하지만 계란을 풀어 먹지 않으면 너무나 아쉽고 김도 꼭 잘라 넣어 먹어야 제 맛이다. 하지만 제일 필요한 것은 약간은 신김치이다. 이 라면을 먹을 때면 반드시 신김치가 있어야 한다. 이 라면의 미덕은, 역시 라면같지 않은 느낌을 주는 라면이라는 점에 있다. 끓여서 먹고 있노라면 왠지 간이역에서 가볍게 시켜 먹는 면같은 기분이 들어 나름대로 아련하다. 그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좋은 탓인지 그래서 나는 이 라면을 끊지를 못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새로운 라면의 세계에 빠져들었는데, 이 라면은 면의 재료가 좀 색다르다. 뭐, 색다르다고 해 봤자 관련 성분을 모기 눈꼽만큼이나 넣었겠지만, 그래도 면이 찰지고 쫀득해 원래 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도, 면을 먹기 위해서 끓이는 라면이 되었다.

사실 라면에 대한 이미지는 ‘추억’이 아닌가 싶다. 어린시절 여행을 다니며 즐겨 먹었던 것도 라면이었고, 대학 신입생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 안주로 늘상 먹었던 것도 라면이었다. 나야 술을 못하니, 술 한 모금에 라면 국물만 거의 한 사발을 먹었지만.

중학시절 친구와 하굣길에 분식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먹었던 라면도 참 좋았고, 고교시절 친구들과 시험이 끝나고 함께 끓여먹던 라면도 정말 맛있었다. 학교 근처 분식점에서는 라면 한 그릇에 김밥 단무지를 하나 올려 주었었는데, 그걸 면의 비율을 따져가며 소중히 아껴서 잘라 먹던 기억도 지금 생각하면 참 좋다. 그리고 보면, 나는 어쩌면 라면을 친구와 함께 먹었던 맛으로 기억하기에 쓸쓸할 때면 라면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군 시절 훈련이 끝나고 먹던 라면은 정말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내가 복무했던 군대는 맨날 무거운 것을 등에 매고 산 타던 부대였는데, 하는 일이라곤 이렇게 무거운 것 이고 지고 뛰어다니거나 줄 타고 높은데서 내려오는 부대였던지라, 한 겨울에도 산을 타다보면 온 몸이 사우나를 온 것처럼 젖어 있곤 했다. 그야말로 전투복에서 땀이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눈은 펑펑 내리고 기온은 영하로 막 떨어지는데도. 하이바에서는 그야말로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땀이 줄줄 흘러내렸는데, 그러다보니 그 추운 겨울에도 얇은 전투복 하나만을 입고 행군을 했었다. 그런데 행군 도중에 잠시 쉴 때면 금새 몸이 얼어 으슬으슬하기도 했는데, 뭐 그래도 곧 다시 걸으면 금새 땀이 뻘뻘 났었던지라 상관 없었다. 그렇게 행군을 하다가 밤이 찾아와 야영을 할 때면 컵라면을 나누어 주곤 했었는데, 그 맑은 겨울 공기 속에서 먹던 라면 맛은 묘하게 행복했다. 나의 자대는 훈련을 많이 하던 부대였던지라, 주로 이렇게 훈련을 나가서 행군을 하고 라면을 먹었다. 꼭 라면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행군이 참 좋았다. 걷고 걷고 또 걸어도 별로 싫지 않았었는데, 행군이 끝나갈 무렵이면 오히려 안타깝기까지 하였다. 거짓말 아니냐고? 아니다. 참말이다. 정말로 경치가 좋은 곳만 찾아다니며 산을 탔었거든. 아마 내 평생 등산할 분량은 이미 군대에서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역 후, 나는 거의 등산을 하지 않았다. 전역할 때 다짐한 것도 다시는 산을 타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으니까.

군에서는 그렇게 행군을 시켜준 덕분에 우리나라의 명산을 두루 다니며 온갖 경치를 보는 것이 참 좋았다. 산에서 잠도 자고 라면도 먹고. 한 번은 대대장님께 매복 중에 먹을 수 있게 사탕은 미리 지급해 달라고 건의드렸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 적도 있었다. 생각이 없었던 건지, 천진난만 했던 건지. 정말 영창 갈 뻔 했었다.

발에 물집이 잡히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 발에는 물집이 잡히지 않았다. 내 신체구조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나름의 비법이 있었으니까. 내 비법은 솔잎을 약간 따서 전투화 속에 넣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솔잎을 전투화 속에 넣으면 물집도 잡히지 않고 발 냄새도 나지 않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알았냐고? 우연히 중대에 굴러다니는 훈련교범을 보았었는데, 거기에 써 있었다. 신기한 것은, 교범에 분명히 솔잎을 전투화에 넣고 행군을 하면 물집이 잡히지 않는다고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읽지 않고 아무도 교범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럴까. 다들 행군할 때면 물집에 발이 엉망이 되어 그렇게들 고생하면서. 교범에는 좋은 이야기도 참 많았었는데.

나는 좀 어리숙한 편이라, 남들이 그렇다면 진짜 그런줄 알아서 교범에 그렇게 써 있으니 그럴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솔잎을 조금 따서 넣기 시작한 것이 즐거운 행군 생활의 출발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군대에서의 교범이란 참 이상한 포지셔닝인지도 모르겠다. 늘 굴러다니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다. 없어지면 난리가 나는데, 결국은 아무도 읽지는 않는다. 그것이 바로 군대 교범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약간의 활자 중독이 있어서 어디엔가 글이 적혀있으면 궁금해서 결국은 읽고 마는데, 군 복무시절 좀 재미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 알록달록한 교범의 자태는 충분히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지라, 당시에는 ‘자, 나를 한번 읽어보라구!’하면서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꼭 엘리스가 된 기분이었달까. 군대에서는 속 편하게 책을 보고 있다가 걸리면 맞으니까 살짝 살짝 몰래보곤 하였었는데, 안 걸리게 아슬아슬하게 보는 스릴과 더불어 나름 불꽃같은 필력으로 적혀 있는 주옥같은 내용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레이아웃에서도 정말 필사의 고뇌 끝에 깔끔하게 정돈된 티가 너무 역력하게 났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아무도 읽지는 않는 것이다. 뭐, 그다지 재미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여튼 나는 교범 덕분에 행군이 그다지 괴롭지 않았고 한 겨울에 1미터 이상 붕~떠서 공중제비를 넘고 얼음바닥에 굴러 떨어져 발목을 다친 때를 제외하고는 행군을 중간에 포기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사실, 그 때에는 정말, 아픈 것 보다는 창피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정말 높이 날아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초능력이 있는 것은 아닌지 깜짝 놀랐다는 덕현이의 후일담에서 알 수 있듯이, 전우들은 다들 놀라 내가 살아는 있는지 궁금해 하며 나의 상태를 보러 왔었는데, 정말 정말 ‘쪽 팔려서’ 그냥 죽은척 할까 싶기도 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묻는 후임에게 ‘야, 쪽팔려. 쪽팔려. 절루가.’라고 말하고 손사레를 쳤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피식 나오지만 그 때는 어찌나 창피한지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행군을 하고 싶었는데, 좀 걸자 발목이 심하게 부어오르기 시작해 걷지 못할 정도가 되자, 결국 차를 타고 복귀했다. 변명같지만, 행군도 거의 끝날 무렵이었으니까.

복귀해서는 아니나 다를까, 라면을 먹으라고 주길래 잠자코 먹었다. 아무도 없는 부대에서 혼자 라면을 먹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했다. 왠지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 없는데. 그래서 하나 더 먹었다. 왠지 억울해서. 그 때, 만약에 라면 개수가 모잘라서 한 명이 먹지 못했다면 정말 죄송. 그 때의 범인은 저였습니다. 공중강습 전우 여러분, 죄송합니다.

여튼, 진눈개비같은 눈이 내리니 다시 그 시절, 그 라면을 먹던 때가 떠올랐다. 아, 말만 말고, 나를 찾아 아직도 연락을 주는 우리 건우, 덕현이, 기용이. 성휘. 모두 다시 한번 모여 라면을 먹자. 무거운 것 잔뜩 매고 산을 타고 내려와 꼬질꼬질한 채로. 우리, 다시 그 시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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