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77) - 우리가 만든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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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77) - 우리가 만든 고독
  • 차근욱
  • 승인 2016.02.0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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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살다보면, 고독하다는 생각에 쓸쓸해 질 때가 있다. 우리네 삶에 그 고독을 채워줄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만은, 애석하게도 그 특별한 무언가도 세상엔 없을 뿐더러 인간은 평생 단 한번도 고독을 느끼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결국, 고독이란 녀석은 언제 어디에선가 불현 듯 나타나 우리네 마음을 심연까지 휘저어 놓는다.

대부분의 진짜 고독은, 자신과 마주할 때 나타난다. 혼자서 달린다거나 혼자서 글을 쓴다던가, 혼자서 자신의 삶을 감당해야 할 때처럼.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며 휴식이 되어주는 누군가 있다면 큰 힘이 되겠지만, 현실 속에서 그런 사람은 사실 찾아보기 어렵다. 다들, 자신의 삶이 더 소중하니까. 그렇지 않나, 암에 걸린 이웃보다 감기걸린 자신이 더 중환자인 법이다.

요즘에야 혼자 밥을 먹는 ‘혼밥’이나, 혼자 코인 노래방에 가서 스트레스를 푸는 ‘혼방’ 등이 사회적 트랜드로 정착되고 있지만, 나의 경우는 ‘혼자’라는 삶이 늘상 있는 생활이었어서 항상 그러려니 했었다. 누군가 함께 밥을 먹자고 연락을 한 적도, 얼굴보고 술이나 한 잔 하자며 굳이 누구를 불러낸 적도 없다. 그저 묵묵히 혼자의 인생을 살아왔을 뿐이다. 혼자 운동하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여행하는 일상을.

그래서, 요즘 각종 매체에서 ‘혼자’라는 것이 큰 일이라는 식으로 유난을 떠는 뉴스를 보면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왜 밥을 꼭 여러명이 먹어야 하는지, 왜 다른 사람과 꼭 함께 여가를 즐겨야 하는 것인지, 처음부터 그런 수선스러움은 좀 적응되지 않았다. 내가 협소한 인간관계를 가진 사회부적응자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뜻이 맞는 분들과 마음이 맞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뜻이 맞고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희박한 확률의 행운을 거머쥔 것이라 할 수 있다. 돈으로 행운을 말하는 로또 따위와 비교할 바 아닐 정도의.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쫓는다. 자신의 이익과 부합하면 좋은 사람이라 말하고 자신의 이익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갑자기 살갑게 다가서지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냉정하게 돌아선다. 난감한 상황에 있을 때 자발적으로 다가와 도움을 주고 결국 돈을 요구하던 누군가, 예의에 어긋날까 조심스레 건낸 액수에 불만을 토로해 몇 배를 더 주니 크게 기뻐하고선 그 이후로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며 돈 많이 버는거 아니냐고 간간이 연락해 오는 현실에, 사람에 대한 기대가 남아날리 없다. 그런 세상의 그런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데 ‘혼자’가 아닐 재주가 있을까. 다들 웃고 있지만 그냥 거기까지 일 뿐이다. 사람에게 받은 실망은 결국 고독을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옷에 그리 돈을 쓰는 편이 아니다. 그냥 깨끗하게 입고 다니려고 노력하는 정도일 뿐이지.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옷을 좀 허름하게 입은 채 웃으며 인사를 잘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부로 대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외제차를 타고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세상에 나서면 갑자기 친절한 사람들 뿐인 세상 속에서 살 수 있다. 처음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거 참 바보같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냥 나인데 세상인심이란 것이 마치 손바닥 뒤집듯 얇팍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래서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보이는 것이 중요하니까 억울하면 출세해야 해’, 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하지만 약해 보이는 상대에게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저렴한 인격이 꼭 한국적 정서일 필요가 있을까 싶다. 적어도 우리네 미풍양속이란 어려운 사람을 돕고 함께 정으로 다독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 정서가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사람의 문제다. 다들 그렇게 정에 주려 살면서도 정작 자신은 주위의 누군가를 다독이지 못한다. 그저 가시를 세우고 나한테 이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만 계산하느라 바빠서.

자신이 고독하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먼저 세상을 탓한다. 항상 먼저 누군가를 비난하기에 바쁘지만 면죄부는 언제나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중적인 잣대를 돌아보면, 잘못은 대부분 본인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잔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야말로, ‘임마’라고 하지 말라며 화를 내면서 ‘임마’라고 말하고 있는 이율배반은 그래서 늘 우리의 몫이다.

얼마 전에 모 은행에 갔다. 해당 은행의 카드를 사용하는 나로서는 왜 해당 은행에서 발급받은 공인인증서가 해당 카드사 인터넷 시스템에서 폐기되었다고만 나타나는지 도저히 혼자서는 해결할 도리가 없어서 찾아간 참이이었다. 물론, 식사시간 무렵의 은행이란 미묘하게도 날이 선듯 예민한 분위기가 공기속에서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내 순서를 기다려 만난 은행원은 아슬아슬한 긴장 속 폭발직전의 상태였다. 상담인 즉슨, 해당 카드사가 매각되어서 그런 문제는 자신에게 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냥 카드사에 문의를 해서 해결해야 한다며. 맞는 말이다. 하지만 너무나 차가운 말과 눈빛에, 은행문을 나서며 허름한 옷을 입고 간 내 잘못인지, 아니면 매각이 된 후에 시스템을 관리하지 않는 카드사의 잘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분명히 나는 쓸쓸했었다.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은 만큼 격하게 배격당한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뒤에 SSM 체인점에 갔을 때, 나는 이와 또 반대되는 경험을 했다. 소소한 물건의 소소한 이상을 발견하고선, 교환을 부탁하기 위해 낡은 옷을 입고서 방문해 문의하는 나에게, 인심 넉넉해 보이는 캐쉬어 아주머니께서는 미소와 함께 이래저래 살펴주시며 교환까지 매끄럽게 처리해 주셨다. 사납게 배격당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방문했던 참이었던지라, 오히려 내가 놀랄 정도였다.

소위 말하는 스펙이라는 면에서는 아마도 마켓 캐쉬어 아주머니가 은행원보다 월등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피곤하기야 마켓 캐쉬어 아주머니가 은행원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도움을 받고 마음에 위로를 얻은 것은 엘리트 은행원에게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이용한 카드 사용을 포기하게 되었고. 결국 나도 카드사도 모두 손해인 채로 살게 되었다. 아마 그 여파가 은행에 전혀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또 어려울지 모른다.

‘혼자’라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하다. 하지만 그 고독에 따스한 온기를 전하는 것은, 사실 그리 대단한 기술과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 투박한 진심이다. 진부하지만, 흔히들 말하는 ‘관심’과 ‘배려’다. 하지만 돌아보자. 과연 내가 이웃에게 얼마나 ‘관심’과 ‘배려’를 베풀었는지를. 반면에 스스로 고독하다고 느낀 것은 얼마나 되는지, 타인을 비난한 적은 얼마나 되는지를. 나는 얼마나 잘났고 나는 얼마나 틀림이 없었는지를.

과잉한 친절도 불편하기는 냉정한 태도에 못지 않다. 하지만 사람을 아끼는 진심에서 우러난 최소한의 미소와 관심이 마음에 싹튼다면 세상의 고독이 반은 줄어들지 않을까.

억지로 배려를 보여야 하고 억지로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느껴 벌써 피곤하다면, 그것은 이미 배려도 아니고 관심도 아니다. 저절로 마음이 움직여 관심이 가고 배려가 우러나올 때, 그제서야 우리의 고독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런게 바로 정이고 그런게 바로 사람사는 세상이니까.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행동해야 한다면 그것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마음이 가지 않으니 아직 진심이 아닌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한 자신의 껍질은 과연 얼마나 두꺼운지 스스로 그 껍질을 깨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혼자’는 필요하다. 진짜배기 고독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스스로를 마주하고 진심으로 자신을 성찰하며 한계를 극복해 갈 때, 사람은 자신의 아집을 버리고 새로운 가능성과 세상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으로 인해서 느끼는 외로움은, 고독이라기보다는 ‘소외’에 가깝다. 마음이 가지 않는, 머리로만 계산해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서글픔이다.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해서 움직이는 피로가 만든 공격성으로 인한 고독의 아픔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혼자’ 밥을 먹고 노래를 불러야 하는 ‘혼자’의 현상이 아니라, 그런 현상을 부른 ‘소외’의 집합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의 실체는 바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기인한 이해타산적 합리성의 인간상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펙이 좋으면 뭐하나, 모두가 불행 속에서 손해를 보는데. 혼자서만 잘나면 뭐하나, 그렇게나 죽을만치 고독한채로 살아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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