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 / 변호사 / 시인
병신년(丙申年), 새해가 밝았다. 지난 을미년 한해는 역사의 해였다. 역사적인 해가 아니라 역사의 해였다. 역사 앞에서 국민의 혼이 비정상이 되었고, 오직 하나의 역사만 존재해야 하는 세상에서 너와 다른 나의 역사, 나와 다른 너의 역사가 부딪히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었다. 역사가 닳고 닳아 지난 12월 28일, 드디어 역사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슬프고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정부가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삼고자 강제로 전쟁터로 끌고 갔던 군 위안부 소녀들이 광복 75년만에 박근혜 정부에 의해 매춘부로 낙인찍혀 버렸다. 이제는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 자신들이 죽기 전 마지막 신원을 풀어달라고 발버둥치던 서러운 한을 품고 살아온 착한 여자들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매춘부로 전락시켜 버리는 기막힌 한일외교장관회담합의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법적 책임이 없는 돈 10억 엔을 받고 군 위안부 문제를 완전 종결짓기로 했으니, 그 돈이 졸지에 화대가 되어 버린 꼴이다. 법적인 책임이 없는 돈, 그 돈은 군 위안부 소녀들의 몸뚱아리를 돈으로 샀음을 증명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 되어 버렸다.
오호 통재라, 역사를 역사에서 지운 날, 대한민국의 정신은 죽었고, 슬펐고, 오열했다. 얼빠진 청와대의 특별지시 속에서 얼이 빠진 외교장관의 얼빠진 합의에 국민의 얼이 빠져버렸다. 피해자들과 사전합의 없이,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한 번 경청하지도 않고, 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ㆍ불가역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하며, 국제사회에서 한ㆍ일 간 상호 비난ㆍ비판을 자제하기로 합의하였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적절히 해결하겠다.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는 군 관여 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로 고통을 겪고 심신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일본 정부는 법적인 책임은 질 수 없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기 위한 재단을 설립하고, 거기에 일본 정부 예산으로 출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그 돈조차 자신들이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배상금이 아니라고 밝혔다. 배상금이란 불법행위를 저지른 자가 자기의 법적 책임을 금전으로 환산하여 지급하는 사죄금을 말한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스스로 배상금이 아니라고 밝힌 것은 자신들이 법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배상금도 아닌 돈을, 정체불명의 그 돈을 받고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종적ㆍ불가역적 합의를 한 후 다시는 이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거론조차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대한민국 정부의 입에 재봉질을 하고 말았다. 이빨이 뽑히고 혀가 뽑히고, 입술이 붙어 버렸다.
법의 기본정신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잘못을 빌면서 배상금을 지급하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사회가 평화를 되찾는 데 있다. 한국 정부는 군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위와 같은 협상에 대한 절차를 위임받은 대리인일 뿐 직접 당사자가 아니다. 따라서 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진의대로 협상을 진전시킬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가 있다. 이를 위반하면 그 협상은 배임죄의 결과물로서 당사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한ㆍ일외교장관회담합의 이후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스스로 법적 책임이 없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10억 엔의 출연금도 배상금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일본군의 개입을 시인하며 한국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것에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도 어느 누구 하나 위안부 할머니를 직접 찾아 사죄하지 않았다. 말의 상찬이 있을 뿐 사죄의 진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요구사항대로 한국정부가 외교협상을 제대로 하지 않아 선관주의의무를 위반한 것이 되는 셈이다.
한국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재단을 설립할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다. 이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를 보상할 책임 주체가 일본 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임을 의미한다. 한국 정부가 세운 재단이 피해 배상 주체가 됨으로써 한국 정부가 덤터기를 써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한국 정부가 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피해를 배상해 주는, 다시 말해 잘못을 저지른 주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주객이 전도되고, 본말이 전도된 황당한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일본 정부는 그 재단에 돈 10억 엔을 기부한 것이 될 뿐이다. 그 재단을 운영하는 데는 앞으로 많은 운영비가 들어갈 것이다. 재단은 영리사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일본은 손을 떼게 되고, 한국정부는 어떤 방법이 되었든 재단 운영경비를 추가 출연해야 하고, 정부 예산이 아니면 기업들로부터 기부를 강요(?)하거나 착한 백성들의 눈물샘을 자극하여 돈을 갹출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마지막 위안부 할머니가 운명을 거두면, 언제 군 위안부 할머니가 있었냐는 듯 재단의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렇게 좋아하고 중요시 하는 역사, 대한민국의 역사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1965년 한일청구권회담 시에 한 번 죽었고,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2015년 군 위안부에 대한 한ㆍ일외교장관회담협의 성립 시에 두 번째 죽었다. 부녀가 번갈아 가며 한국의 역사를 비참하게 만들어 버렸다. 두 사건의 중심에는 돈, 돈, 돈이 있다. 법적 책임에 따른 배상금이 아니라면 한국 정부는 그 돈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기를 거부했어야 했다. 일본 정부가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직접 그 돈을 지급하도록 했어야 했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에게 배상금을 지급한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세운 재단에 간접적으로 돈을 출연했을 뿐이고, 할머니에게 피해를 배상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세운 재단이 되는 셈이다. 할머니와 재단 사이에 가해자인 일본 정부는 사라져버리는 황당하고 괴이한 일이 역사를 생명으로 알고, 역사의 혼지킴이 역할을 자처해 온 박근혜 대통령의 강력한 지시로 이루어졌으니 할 말이 없다. 그냥 할 말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외교부 제1차관과 제2차관이 번갈아 찾아가 할머니들을 달래보지만 그게 가당치나 하겠는가? 장관이 찾아가고, 국무총리가 찾아가고, 대통령이 찾아간들 아닌 건 아닌 것이지 어떻게 잘 한 것으로 바뀌겠는가? 오만방자한 일본 정부의 승리의 자축포가 팥죽 끓듯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여기저기에서 분노의 활화산이 타오르고 있다. 역사의 정의는 진실 앞에 당당한 것이어야 한다. 유태인 학살의 비극적 현장 아우슈비츠감옥이 그대로 현존하듯, 소녀상 역시 그대로 존재하여야 한다. 감추고 숨기려 한들 안 될 것은 안 될 뿐이다.
왜 박근혜 정부는 아베 총리와 그렇게 외교신경전을 벌여가면서까지 한일정상회담마저 거부해 오던 지난 3년을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엎으면서 한ㆍ일외교장관회담을 부랴부랴 성사시켰을까? 왜 미국 정부는 “한ㆍ일간의 이번 합의는 매우 강력한 이정표가 되는 합의”라면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타결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합의”라며 극찬을 늘어놓았을까? 나아가 “아베 일본 총리의 사과, 반성, 책임 인정에 어떠한 모호성도 없다.”며 일본을 옹호하고 나섰을까? 그러면서 “미국도 적절하고 건설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자화자찬까지 하고 있을까? 중국 관영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만약 일본이 한국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해결조건을 놓고 중국과 논의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설문조사에서 중국인들 95%가 한ㆍ일외교장관회담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응답하였다고 보도하고 있을까?
미국 정부는 스스로 적절하고 건설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외교적 수사는 “미국이 외교적으로 대한한국정부에 대해 압력을 가하였다.”라는 의미를 상징한다. 미국이 한국의 외교에 간섭하였음을 자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을 편들고 있다. 일본을 치켜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이 참여하지 않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타결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합의라고 그 가치를 침소봉대하고 있다. 이는 다른 말로 말하면 이제 한ㆍ일 간의 구원을 털고 한미일 3국이 합심하여 중국에 대항하자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기에 중국은 서둘러 중국인 95%가 한ㆍ일외교장관회담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한국에 치욕적인 외교적 실패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정부에 대해 한미일 동맹에 함몰되어 중국에 적대 시 하는 것을 주의하라는 무언의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 박근혜 정권이 왜 저러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2014년 기준 국가별 수출액을 보면 중국 1,452억 달러, 미국 702억 달러, 일본 321억 달러에 이른다. 대한민국의 중국에 대한 수출액이 미국과 일본에 대한 수출액을 합한 것보다 1.4배에 달하고 있을 만큼 중국 의존도가 높다. 수입은 중국 900억 달러, 미국 452억 달러, 일본 537억 달러로 미국과 일본을 합한 것과 중국이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중국은 2014년 한 해 동안 552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대한민국에 안겨준,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에 참으로 중요하고 유익한 교역국가이다. 그런데 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마치 매춘부 취급하듯, 법적 책임에 의한 배상금도 아닌 무색무취한 재단 출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최종적ㆍ불가역적 합의를 황급하게 끝내버린 대한민국 박근혜 정부의 배경에는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여 중국에 대응하려는 미일의 공동외교전선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군 위안부 합의문제로 대한민국이 요동치고 있다. 시간이 가면 잠잠해지리라 생각하겠지만, 숨통이 막힌 국민들은 최종적ㆍ불가역적 합의라는 재봉을 찢고 말을 할 것이다. 이건 말도 되지 않는 합의이고, 국민의 자존심을 뭉갠 굴욕외교이기에 법적 책임을 지겠다고 일본 정부가 밝힐 때까지 군 위안부 문제는 역사 전쟁을 계속 할 것이다. 승자 없이, 메아리 없이 사라질 지언정 역사밝히기는 계속될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정역사교과서에는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ㆍ일외교장관회담합의를 박근혜 대통령의 치적 중의 하나로 기록할지도 모르겠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근대화의 치적 중의 하나로 기록할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을미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고, 나라가 시끄러웠던 한 해였다. 이 땅에서 정의가 실종되고, 민주주의가 역행하며, 국민의 정신을 획일적 교육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벌어졌던 한 해였다.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팍팍해지고, 젊은이의 헬조선 비명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병신년 새해가 밝았다. 지혜의 동물 원숭이처럼 모든 국민이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아침, 희망찬 말로 시작하지 못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울분을 함께 토해내야 하는 글을 쓰게 되어 죄송합니다. 병신년 새해에는 모든 국민이 병신년을 힘차게 외치며 한 발 한 발 힘차게 걷고 또 걸읍시다. 나무를 타고 오르고 올라 하늘을 봅시다. 그렇지만 절대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는 되지 맙시다. 병신년 새해를 희망과 신념으로 맞이합시다. 어디만치에서 벌써 봄이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추운 겨울 잘 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