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범 변호사의 법정이야기(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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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범 변호사의 법정이야기(36)
  • 신종범
  • 승인 2015.09.1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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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의 이유

 

 

 

 

 

신종범
법무법인 The Firm 변호사
sjb629@hanmail.net
http://blog.naver.com/sjb629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면서 다투는 일이 종종 생긴다. 네 살 터울이 나는데도 남자인 동생이 이제는 컸다고 누나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싸움이 벌어지곤 한다. 가능하면 잘잘못을 가려 잘못이 있는 아이를 훈계하려 하지만 대개 첫째가 나 또는 아내에게 혼이 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누나가 참아야지 어린 동생과 똑같이 굴었다는게 이유다. 그러면 아이는 “왜 나만 참아야 하는데”라며 억울해 한다. 가끔은 동생이 누나를 이기려 한다며 혼을 내기도 하는데 그러면 아이는 “왜 나만 져야 하는데”라며 분해한다. 사실 누나만 참아야할 이유도 동생만 져야할 이유도 없으니 혼이 나는 것이 억울하고 분할만하다. 그러나 감정을 자제하고 다툼이 왜 생겼는지 확인하고 잘못한 사람을 가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려주고 혼을 내면 당장은 씩씩거리지만 억울함이 남지는 않는다. 

우리 소송법은 판결서에 판결의 이유를 기재하도록 하고 있다. 당사자들에게 판결의 근거와 당사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왜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되었는지 밝혀 당사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함이고, 판사에게는 독단에 의하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 객관적인 결론에 이르르게 하기 위함일게다. 판결문은 판결 선고 며칠 후에 받게 되는데 승소한 경우 변호사에게는 승리의 쾌감(?)을 다시한번 느끼게 함과 동시에 자신의 주장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상대방이 불복할 여지가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판결의 이유를 살피게 되지만 의뢰인들은 대개 승소한 이유에는 별 관심이 없다. 패소한 경우에 변호사는 사실 인정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판단이 법리나 판례에 어긋나지는 않았는지 등을 꼼꼼이 살펴 볼복 여부를 검토하게 된다. 의뢰인은 이미 패소한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이유를 살피게 되는데 판결의 이유마저 수긍할 수 없다면 분노는 극에 이르며 ‘상대방 변호사가 전관이었네’, ‘판사가 잘 알지도 모르고 판단했네’ 등 법원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당사자가 판결의 이유에 수긍할 수 없는 이유에는 법원이 자신의 주장과 다른 판단을 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것은 당사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아예 판단이 없거나 아무런 근거 제시도 없이 배척한 때이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 행정청의 신뢰보호원칙 위반을 이유로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는데 1심 법원은 신뢰보호원칙에 대한 판례의 추상적 입장을 설시한 후 소송이 제기된 구체적 사안에 대하여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만연히 판례에 의하면 위 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제시된 판례와는 사실관계가 다른 것임에도 말이다. 항소심은 원고의 항소를 기각하면서 판결 이유는 1심 법원의 판결을 그대로 인용한다고 하였다. 상고심은 심리불속행기각으로 종결되었다. 2년여 가까운 소송에서 당사자 주장에 대하여 제대로 된 판단도 받지 못하고 이유도 모른채 패소하고 만 것이다. 패소한 당사자가 납득할 수 있을까? 

이슈가 된 사건의 판결, 특히 정치적 사건에 대한 판결을 언론을 통해 접할 때 우리는 그 결과만을 보고 ‘사법의 정의를 실현한 판결’ 아니면 ‘권력의 눈치를 본 판결’이라며 너무나 쉽게 이야기 한다. 어떤 판사는 여론에 의해 ‘사법의 독립을 지킨 올곧은 판사’였다가 '권력의 시녀’로 변하기도 한다. 판결의 이유를 살펴 보지 않고는 그 결과에 대해 쉽게 말해서는 안된다. 존경스러울 만한 명판결문이 있다. 증거에 의해 사실을 명확히 확정하고 정확한 법리와 판례의 적용, 그리고 당사자들의 주장에 대한 빠짐없는 판단이 들어가 있다. 그 판결문은 법률전문가 아닌 사람이 읽더라도 막힘없이 읽을 수 있고, 패소 판결을 받은 당사자 조차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런 명판결문을 요즘에는 보기 힘들어졌다. 법원이 판사의 업무 부담을 이유로 판결문을 간소하게 쓰는 방안을 내놓으면서 명판결문을 만나기가 어려워진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우리 사법의 신속함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우리 국민들의 사법에 대한 신뢰도는 최하위권이다. 법원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많은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구두변론을 강화하고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등 소통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만 듣고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일까? 이유 있는 판결이 되어야 또 다른 억울함이 남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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