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58) - ‘손님’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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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58) - ‘손님’을 보았다.
  • 차근욱
  • 승인 2015.09.1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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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영화나 책에 대해선 스포일러가 되고 싶지 않지만, 영화나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그 내용을 언급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니, 혹시 영화 ‘손님’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즐기고 싶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이 글은 패스하시길 부탁드린다.

일부 영화를 제외한 ‘류성룡’씨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좋아하는 편인지라, ‘류성룡’씨의 새 작품이 나왔다고 했을 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극장에 가서 보아야지, 하다보니 어느새 영화는 개봉관 상영이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어찌하다보니 조금 늦게나마 VOD서비스로 영화 ‘손님’을 심야에 접하게 되었는데, 아무 정보없이 영화를 보다보니 ‘심리 스릴러’장르의 영화임을, 나는 영화가 끝날 무렵에서야 알게 되었다. 영화 ‘손님’의 공포는, 영화적 장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그 자체에 있었기에 더욱 오싹했달까.

‘손님’의 모티브는 흔히 알려진대로 ‘피리부는 사나이’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자체에 흥미가 생겨 이것 저것 찾아보게 되었는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굳이 흠을 잡을 필요가 없는 잘된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인터넷에 보이는 영화평에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내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충분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달까.

사회 문제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많은 문제는 청소년 문제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학교폭력이나 왕따문제는 사회 일반의 문제로 확장되기 때문에 청소년 시절, 학교에서 겪게 되는 실체없는 그 기괴한 공기 속 괴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항상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같은 맥락을 나는 영화 ‘손님’에서 보게 되었다.

사람은 약하다. 특히나 그 마음은 너무나 부서지기 쉽기에 언제나 스스로 서기 보다는 의지할 무언가를 찾기 마련이다. 그것이 어떤 절대적 존재이든, 아니면 자기 곁에 있는 그 누군가이든. 그리고 그 근원에는 두려움이 있다. 자기 자신의 불안함에서 오는 두려움. 우리는 그 두려움을 외면하고자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적 선이나 절대적 악이 현실생활에서는 존재하지 않듯이 두려움을 느껴 폭력을 행사하는 이도, 그 폭력에 의해 희생되어 소멸하는 이도 사실은 모두 우리의 단면일 뿐이다.

영화 ‘손님’에서의 주인공은 순박한 떠돌이 악사이다. 그냥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는 애처로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 악사는 용서받지 못할 과거로부터 도망쳐 스스로 ‘섬’이 되어버린 한 마을에 우연히 도착한다. 마치 깊은 밤 노래를 부르며 손짓을 하는 세이런처럼, 봉쇄되었던 마을로의 오솔길은 이 애닯은 떠돌이 악사 부자를 유혹한다. 언제나 그렇듯 악사는 배가 고프고 쉴 곳이 아쉬웠기에 그 달콤해 보이는 유혹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마을로 향해 살아갈 기회를 찾아 보고자 애를 쓴다.

천대와 냉대 속에서 살아가다보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을 저절로 터득하기 마련이다. 비참한 처지에서 살다보면 사람들의 안색을 살피며 작의 호의라도 얻고자, 미움을 받지 않고자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요령도 생기게 마련. 떠돌이 악사는 자신의 재주로 그 작은 호의를 붙잡고 싶었고 그저 노력한 만큼의 댓가만을 바랬지만, 세상 사람들이 어디 그리 순박하던가. 문제가 없어진 마을사람들은 그 노력의 댓가 따위가 아까워졌고 자신들의 추악한 마음을 합리화할 구실을 붙여, 결국은 그 어둡고 끈적한 욕망을 드러내고 만다.

처음의 약속은 쥐들을 잡아주면 소 한 마리 값을 주겠다고 했지만, 악사는 돼지 한 마리 값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세상 사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사람들의 마음이란 것이, 처음에는 소 한 마리 값이라고 하지만 결국 그 셈조차 아까워하리란 사실을 알았기에 스스로 실리를 택한 나름의 양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인심이라는 것이 그 양심에 조차 인색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고자 한다는 것을 깨닫기에 악사는 너무 순진했든지 너무 절박했다. 결국 마을사람들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악사에게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웠고, 끝내 아들과 아버지의 목숨까지 빼앗으려 든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두 번 가슴 아픈 장면을 만났다. 하나는 받지 못할 품삯을 굳이 받으러 가는 그 허허로운 뒷모습에, 또 하나는 손가락을 잃고 나서도 목숨이라도 부지 하고자 공포에 질린 눈으로 애절히 웃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모두 무심한 빛으로 악사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그 댓가를 치루는 장면은 오히려 무섭지 않았다. 내가 정말 무서웠던 것은 그 무표정한 자기합리화의 공기였다. 영화에서 이장은 늘 말한다. ‘살기 위해서 지은 죄는 용서받는 법이다.’ 이 말보다 더 무서운 자기합리화가 이 세상에 있던가.

우리는 악사인가 이장인가. 아니면 늘 회색지대에서 눈치에 따라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며 휩쓸리는 마을사람들인가. 영화를 보면서 내내 섬뜩했던 것은, 결국 우리는 그 모두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살기 위해 가진자를 위해 애절히 빌어보기도 하지만 자신이 살기위해 가차없이 약자의 모든 것을 짖밟기도 한다. 그리고 되뇌일지 모른다. 살기 위해 지은 죄는 용서받기 마련이라고.

마지막 남은 자신의 희망조차 잃고 만 악사는 복수를 한다. 그리고 그 복수는 역시 무표정하다. 마지막 장면 속에서 피에로처럼 웃는 악사의 무채색 표정은, 아마 감독으로 인해 단적으로 발가벗겨진 우리의 속내는 아니었을까.

학교라는 공간은 꿈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기괴한 공포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학교괴담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공을 거친 우리들은 우리 사회에서 또다른 공간을 만든다. 유치한 욕망의 모습은 조금 세련된 표정으로 채색되어 강자와 약자를 향해 웃는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문제는 결국 성장기를 거치며 겪게 되는 불안정함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그 불안은 누군가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기에 그 폭력은 가학적 희열로 구체화된다. 그 중 피리를 가지지 못한 누군가는 결국 자신을 포기하는 결과로 파국을 맞기도 한다. 그리고 성장기를 지났음에도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는 여전히 불안을 이기지 못해 결국 다시 누군가를 표정없이 바라보며 웃고만다.

‘손님’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 보았다. 스스로 늘 옳은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결국 나 역시 그 무표정함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결국 나도 마지막에 가서는 피에로처럼 웃는 얼굴로 누군가를 대한 것은 아니었을까. 두려운 것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정녕 두려운 것은 우화를 통해 까발려지는 자신의 추악함이다.

누구에게나 과오는 있다. 하지만 그 과오를 비밀로 잊고자 다시 과오를 만드는 선택을 할지, 아니면 그 과오를 돌아보며 다시 스스로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선택을 할지에 따라 인생의 향방은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특히, 악마여고생 사건을 뉴스로 접하면서 아직 고교생과 대학생인 범인들이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게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새삼 섬뜩했다. 범인이 재판장에 들어서면서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입정했다는 소식이며, 범인의 부모가 자신의 딸은 억울하다며 도리어 피해자측에 따져들었다는 후일담 또한 인간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였달까. 그들도 그렇게 말할지 모른다.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그냥 살아보려고 하다 보니 지은 죄니까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학교 폭력의 문제도, 사회 생활의 문제도 결국은 우리 모두의 불안한 마음이 비추인 모습일게다. 그리고 자기합리화라는 오류로 빠져들어가며 사태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에 매몰되는 과거를 버리고 자신이 스스로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키고자 행동으로 애쓰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서로가 서로에게 끝없는 두려움이 되어 살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학교와 공동체에서는 올바른 가치관을 배울 수 있어야 하고, 잘못된 행동과 선택들에 대해서는 원칙에 따른 엄격한 기준을 익힐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 원칙을 사회가 끝까지 지켜내 행동으로 이어갈 때 우리는 영화 ‘손님’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의 불안한 평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평도 있고 저런 평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관점에서 영화 ‘손님’은 내게 많은 과제를 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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