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53) - 연필로 사각 사각
상태바
차근욱의 'Radio Bebop'(53) - 연필로 사각 사각
  • 차근욱
  • 승인 2015.08.05 1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아실런가 모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연필을 무척 좋아한다. 디지털 시대에 무슨 구닥다리 같은 소리냐고 타박을 주실지도 모르겠지만, 연필의 촉감은 만년필이나 볼펜이나 젤타입의 펜과 비교한다고 해도 월등하게 다르다. 특히 연필 특유의 사각거리는 소리는 아날로그 감성을 가장 잘 끌어내어 주지 않나,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비라도 오는 날에 연필로 일기라도 쓰고 있으면 이런 저런 생각이 나서 혼자서 피식 웃어보기도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연필의 힘이라고. 분명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요즘이야 좋은 펜이 워낙 많이 나왔고 연필 따위 샤프펜슬에 밀려서 어쩌면 유물처럼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연필을 깎고 종이에 연필의 뭉툭한 끝으로 자신의 생각을 차곡 차곡 적어나가는 자유로움이야 비할 바가 없다. 예전에 1000원 샾에 가면 정말 굉장히 흥분했던 것이, 10자루도 넘는 연필을 1000원정도에 살 수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그렇게 다 쓰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도 결국 사고 마는 것을 보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가끔 빠른 세상에 밀려서 옛날의 유물들은 잊혀져가곤 하는데, 휴가철이 다가오면서 여행을 간다면 나도 이런 조금은 구닥다리같은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 카메라를 들고 말이지. 속도에 맞추어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어 왔는지 돌아본다면, 가끔은 그런 흑백사진 같은 곳에서 잠시 앉아 쉬어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고.

가끔 생각이 복잡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 때면 연필을 깎는다. 캇터기를 들고 연필을 20~30자루쯤 깎으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조금은 마음이 편해 지기 마련이니까. 물론 한참을 유행하던 연필깎이도 세상에는 존재하지만, 연필은 절대 연필깎이를 써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어린시절에야 연필깎이의 그 매끈함에 설레기도 했지만, 연필깎이를 사용하면 일단 연필이 너무 빨리 깎여 나가고 스스로 연필에 들이는 정이 없어 막상 연필을 잡고 글씨를 쓰려고 할 때 뭔가 이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보면 예전에 영어공부를 할 때는 전부 ‘연필’이었던 기억이 난다. 워낙 많이 쓰면서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일단 볼펜은 너무 금방 닳아 버렸었고 무언가 내 몸에 남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반면에 연필의 경우에는 얼마를 쓰던 한참을 쓸 수 있고 음악처럼 기분 좋은 ‘사각 사각’ 소리는 내 몸에 문장과 단어를 남겨주는 느낌이 들어 참 좋았다.

세상만사는 각기 ‘시절인연’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지라, 이제는 연필로 영어문장을 쓰면서 중얼거릴 일도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연필을 보고 있노라면 빙판을 헤치며 달리고 싶은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가슴이 뛴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종종 연필을 쓰곤 하는데, 이제는 아이디어 구상을 할 때 주로 연필을 찾는다. 볼펜이나 다른 펜으로도 당연히 아이디어는 구상할 수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연필을 쓸 때 만큼 다른 펜의 경우에는 자유롭지도 못하고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래서 항상 브레인 스토밍을 할 때면 연필을 잡고 종이의 이곳 저곳에다 자유롭게 낙서처럼 글을 써 보곤 한다.

사람이 펜을 잡고 무언가 흔전을 남긴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기록한다던가 그림을 남긴다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자판을 두드리며 쓰는 글과 손으로 꼭 꼭 눌러쓴 글씨는 뭔가 다른 느낌인 것처럼. 펜을 잡고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담는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사각 사각 울리는 연필이야말로 자신의 마음을 담기에 가장 좋은 펜이 아닌가 하고.

연필 이외에 아끼는 펜이 있다면, 아무런 디자인도 없이 투박하디 투박하게 생긴 ‘P’사의 만년필이다. 이 만년필도 구닥다리인지라 스포이드처럼 직접 잉크통에서 잉크를 짜올려 사옹하는 것인데, 이 만년필은 아버님께서 주신 것이다. 아버님께서는 젊은 시절인 20대 때 외국에서 이 만년필을 사셨고, 신기하게도 그 만년필을 사실 때의 목적은 당신께서 쓰시고자 함이 아니라 나중에 아들이 생기면 줄 생각으로 사셨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스무살이 되던 해에 아버님은 정말로 내게 생일선물로 이 만년필을 주셨다. 그래서인지 이 만년필은 공식적인 문건을 쓰거나 편지를 쓸 때에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만년필을 쓸 때면 나도 모르게 긴장을 조금 한다는 사실이다. 조금 어려운 상대를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아무거나 함부로 쓰면 안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달까. 뭐, 덕분에 격식을 차려 문장을 쓸 때면 나름의 격조있는 문장이 저절로 떠오르는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막쓰는 펜으로는 파란색 Bic round stic 볼펜을 애용하고 있는데, 연필 이외에 가장 선호하는 펜의 색깔이 파란색인지라, 몇 박스를 사 놓고 쓰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에 서점에 갔다가 ‘파란펜 공부법’이라는 책을 우연히 만나 읽게된 적이 있었는데 그 책의 저자에 의하면 파란펜이 주의력과 집중력을 올려 주어서 학습성취도를 향상시킨다는 주장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쓰는 펜은 언제나 파란색이었던 지라, 파란펜이 없으면 정서불안 현상까지도 나타나곤 했었는데 ‘과연 그런 이유에서 였구나’, 라고 혼자서 감탄하며 납득해 버렸다. 꼭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파란펜을 쓰면 한 눈에 들어오니까.

그 이외에 일정을 관리할 때나 중요한 노트를 할 때 쓰는 펜은 Gelly Roll fine 파란색이다. 이 펜은 내가 아는 가장 진한 파란색인데, 다이어리를 쓸 때나 노트를 정리하는 나름 중요한 메모를 남길 때 확실하게 각인이 된다는 의미가 있다. 좀 비싼데다 금방 쓴다는 흠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맘에 드는 펜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니까 별 불만은 없다.

Jetstream 0.5 파란색 펜도 좋아하는 펜 중의 하나인데, 이 펜은 가늘기 때문에 뭔가 굉장히 섹시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 펜을 쓰고 있노라면 뭔가 정장을 갖추어 입고 샤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기존의 노트에 아이디어를 첨가하거나 스스로의 빈틈을 발견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메모를 할 때에 쓰게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뭐 꼭 자신의 빈틈을 찾고 메우기 위해서 jetstream을 쓴다는 것이 아니고, 묘하게 쓰다보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 뭐.

하지만 단연코 그 중에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펜은 역시 연필이다. 대단치 않은 듯 싶지만 무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내 안의 특별함을 이끌어 내주는 투박함에, 아무리 비싸고 근사한 펜이라고 해도 연필의 정감을 따를 수가 없으니까. 사람관계도 연필같아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다. 꾸미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조금은 시간이 걸리고 품이 든다고 해도 손으로 깎고 손 때가 묻은 연필처럼, 그렇게 시간을 지나며 진솔하게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비가 오는 날 연필을 깎으면서도 보고 싶어 질지 모르겠다. 사람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이 사람과 비교하고 저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부족하고 조금 모자라도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받아들여 주는 것. 그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서로 특별해 질 수 있는 비결이 아닌가 하고.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버린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일상화 되어버린 세상사에서 우직한 된장같은 만남에 사람들은 목말라 한다. 자고 일어나면 견딜 수 없는 공허에 비싸고 좋은 것을 찾아보지만, 어디 세상이치가 그런 것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던가. 완벽해 보이는 것을 찾기 위해 재고 따지고 하지만 결국은 조금 어눌하고 부족한 연필만한 펜이 없는 것처럼, 세상사 사람관계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조금 오래된 연필을 붙잡고 그런 상념에 낙서를 했다.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