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52) - 아무러치나 쓰는 공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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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52) - 아무러치나 쓰는 공책
  • 차근욱
  • 승인 2015.07.28 16:4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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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한 반에 한 명쯤은 개성만점의 재미있는 친구들이 있지 않았나 싶다. 나의 경우에도 잊혀지지 않는 친구가 한 2명 정도 있는데, 한 명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친구였고, 다른 한 명은 중학교 2학년 때의 친구였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이지만 그 친구들의 이미지는 또렷하게 내게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고 있다.

먼저 중학교 2학년 때의 친구이야기를 살짝 해보자면, 내 앞자리에 앉았던 그 친구는 정말 과묵한 친구였다. ‘중학교 2학년 주제에 얼마나 과묵해서?’ 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무엇을 상상하시던 상상 그 이상으로 과묵한 친구였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외모에서도 그런 과묵함의 아우리가 사방으로 후광처럼 뻗어 나가던 친구였는데, 짧은 스포츠 머리에 두터운 목과 튼실한 허리를 가진, 그야말로 ‘아버님’스러운 친구였다. 뭐랄까...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 듯 하면서도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포스였달까. 하여간 그 친구는 정말 말이 없었는데, 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무언가 발표를 시킬 때가 아니라면 결코 말하지 않는 친구였다. 하지만 너무나 과묵해서 선생님조차 발표를 시키는 것이 민망할 지경이라 발표도 거의 시키시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2학년 때만 해도 그 친구가 이렇게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1년 동안 함께 한 교실에서 공부를 하다보니 거의 경외에 가까운 존경심을 갖게 되어 결국 잊을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존재감 있고 무게감 있는 친구가 말도 없이 오직 - 쉬는 시간까지 - 공부만 하였음에도 결코 좋은 성적은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없이 묵묵하게 자신의 본분과 공부에 매진하는 태도는 뒷자리에 앉은 나로 하여금 저절로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고 합장을 하게 할 정도였다.

그 친구가 말하는 것을 들은 것은 정말로 뻥 안치고 중학교 2학년의 1년간 딱 세 마디 였는데, 마지막 한 마디는 종업식 때 반 모두가 그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한 목소리로 부탁하여 인사를 한 번 한 것이었다. 그러니, 사실 두 번 정도만 들을 수 있었던 그 친구의 목소리를 덤으로 한 번 더 들을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니 새삼 감동의 물결이 밀려온다. 외모는 코끼리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친구였지만, 목소리는 의외로 가늘었어서 말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들어 좀 신기한 기분이기도 했었던 신비한 친구였다. 뭐, 지금쯤이면 아마 믿음직한 리더가 되어있으려니 생각하지만.

다른 한 명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내 왼쪽에 앉았던... 굉장히 여성스러운 이름을 가진 친구였는데, 이 친구는 그 이름과 외모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케이스의 모범이랄까, 하여튼 그랬다. 특히 코가 벌렁코라서 굉장히 정력적으로... 초등학생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 청소년 보호법 위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외모는 정말로 굉장히 원초적으로 생긴데다 덩치는 나보다도 큰 편이었어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어른 키’였던 친구였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말과 행동이 좀 4차원 스러워 왠지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올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안소니 홉킨스의 이미지와도 살짝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평소 왼쪽에 앉아있던 친구였기에 이 친구의 말과 행동을 자주 접하게 되었는데, 이 친구가 가끔 읇조리던 대부분의 이야기는 내용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 친구는 친구가 정말로 아무도 없어서 가끔 나에게 말을 붙여오곤 했었는데, 당시에는 그런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어떤 표정으로 무어라 대답을 해 주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을 정도였다. 수업시간에도 어눌한 말투로 혼잣말을 한다던가, 갑자기 혼자 ‘히히히’라는 소리를 내며 웃고 있는 다던가 학교에 교과서와 공책 딱 한 권만을 갖고 온다던가 한여름에도 아동복이 아닌 총천연색 어른 풍의 옷을 여러겹 끼워 입고 있을 때도 있어, 담 작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내게는 조금 오싹한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내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바로 초등학교 5학년 소지품 검사로 인해 생겨났는데, 무슨 일이었는지 그 날은 담임선생님이 모두의 소지품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라고 하셨고 이윽코 소지품 검사가 시작 되었다. 날은 더웠고 매미가 울고 있었는데 나야 그다지 꺼릴 것이 없어 그냥 가방 안에 있던 소지품을 모두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왼쪽을 바라본 나는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내 왼쪽 친구의 책가방 속 소지품은 놀랍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일단 ‘팽이’라던가 말라죽은 ‘딱정벌레’라던가 때가 꼬질꼬질한 옷가지라던가 ‘노가리’... 노가리? 그렇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왠지 소주를 마실 듯 한 포스로 노가리를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그 노가리를 수시로 질겅거리며 지냈던 것이었다.

뭐, 그런 신기하고 재미있는 물건들이 그 친구의 책상 위에 가득 올려 졌었는데, 가장 놀라운 물건은 바로 공책이었다. 담임선생님 역시 보도 듣도 못한 개인 물품들을 보시면서 기가 질리시는 듯한 - 대부분의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여 선생님들 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 표정으로 때가 꼬질 꼬질한 물건들을 검사하시다가 그 친구가 갖고 다니던 딱 한 권의 공책을 보시고는 순간 눈이 반짝 빛났다. 나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쑥스러운 듯 웃으며 의자를 뒤로 젖혀 흔들거리고 있는 친구와 선생님의 표정 모두를 너무나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는데 그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공책을 보시고 선생님께서는, 교육적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충격과 공포 속에서 아마 그러셨으리라 생각이 드는데, 선생님께서는 낮은 목소리로. 소리를 내어 읽기 시작하셨다. 공책의 제목은 바로 ‘아무러치나쓰는공책’.

띄어쓰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제목에서부터 무언가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졌는데, 그 삐뚤빼뚤 씌어진 공책에는 제목부터 시작해서 철자법이나 국문법 따위는 모두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그야말로 해방구 속 자유지대에 위치한 공책이었다. 그 공책에는 학과내용보다는 온갖 사념적 이야기들이 적혀있는 일기장 비슷한 느낌이기도 했고, 주문과 비슷한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적혀 있는 잠언적 메모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당시 남자 반장과 여자 부반장의 험담을 늘어놓다가 결론적으로 둘이 사귀라는 내용의 글이었는데, 당시에는 그런 글을 공책에 적는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고 반장과 부반장의 문제를 그야말로 남과 여의 관계로 이해해서 희화화하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선생님은 처음에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읽기 시작하시다가 이윽코 입을 굳게 다무시고 거친 호흡을 하시며 공책의 이곳 저곳을 보신 후에 긴장한 표정을 하시고는 “띄어쓰기 잘해라” 라는 말씀만을 남기시고 다음 분단으로 넘어갔지만, 나는 왠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친구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투덜대기 시작했는데 웃음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모습 역시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시간이 지나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학교에서 아마 자신의 개성이 억압되어 친구도 없고 흥미도 없는 학교생활을 버텨내기 위한 그 왼쪽 친구 나름의 노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내가 조금 더 철이 들었었다면 친구라도 되어 주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 당시의 나는 기껏해야 TV프로그램에 나오는 로봇을 동경하는 수준의 꼬맹이였던 것이다.

가끔 혼자, 늦은 밤차를 타며 차창 밖을 보고 있노라면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아무러치나쓰는공책’이 떠오를 때가 있다. 아마 무척 재미있을 법한 내용이 있었으려니 하는 생각이 들면 혼자 피식 피식 웃기도 하는데, 반장과 부반장 이외의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을지는 지금도 궁금하다. 하지만 반면 나도 그런 공책이 하나쯤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항상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는 규율에 얽매어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그렇게 자유분방한 공책이 하나쯤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면 그 친구는 지나치게 창의적이었을지도 모르지.

유부남이 해서는 안되는 것 중에 하나가 일기를 쓰거나 가계부를 쓰는 일이라고 한다. 후후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이지. 일기는 불안한 마음이나 울적한 마음을 치료하는데 가장 좋은 치료법이 되기도 한다고 하니, 아직 총각인 나는 정말 아무거나 쓸 수 있는 ‘아무러치나쓰는공책’을 하나쯤 만들어 써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존재하리라는 믿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허망하게 배신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아무러치나쓰는공책’이 한 권쯤 있다면 그까짓 외로움, 그럭저럭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아... 그건 그렇고, 내 주위엔 왜 다들 이런 친구들뿐 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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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y 2015-07-28 22:10:14
이분 공무원 경찰면접 전문으로 하시는 교수님 인데 인생의 철학도 있으신 듯...

ksy 2015-07-28 22:10:14
이분 공무원 경찰면접 전문으로 하시는 교수님 인데 인생의 철학도 있으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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