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49) - 온 몸으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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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49) - 온 몸으로 울었다
  • 차근욱
  • 승인 2015.07.0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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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 진다고 했던가. 하지만 나이가 그리 많이 들지 않았더라도 눈물이 유달리 많은 사람이 있기도 하다. 물론 나야 눈물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닌데다 그리 눈물이 많아질 나이도 아닌지라 상관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고른 영화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시야가 흐려질 때가 있다. 좀 쑥스럽지만 이제와 무엇을 숨기겠는가. 그렇다. 나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것이다. 후후후.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흐려지는 경우는 단순한 감동에 의한 경우와는 다르다. ‘쿼바디스’나 ‘십계’를 보고 흘리는 눈물이 ‘러브스토리’를 보고 흘리는 눈물과는 다른 것처럼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고 흘리는 눈물 또한 ‘명량’을 보고 흘리는 눈물과도 다르다.

어려서는 철없고 어린 탓에, 역시 영화는 ‘액션’이었다. 특히 모험적 요소가 가미된 액션이라면 정말 최고였는데, ‘인디아나 존스’같은 영화는 몇 번을 봐도 재미가 있었다. 원래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강렬한 이미지로 남기 마련인지라, 어른이 되고 나서는 ‘인디아나 존스 4’가 개봉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첫 개봉시간에 맞추어 영화관으로 달려갔던 기억도 있다. 물론 ‘엑스파일’과 ‘24시’를 섞어놓은 듯한 정체 모를 장면 장면에 런닝타임 내내 개인적으로 실망의 한숨을 내쉬며 보아야 했지만.

돈이 아무리 좋아도, ‘인디아나 존스’는 ‘인디아나 존스’다. ‘셜록 홈즈’가 ‘셜록 홈즈’인 것처럼. 있을 법한 이야기와 설득력 강한 모험, 그리고 패기 넘치는 유머에 환호하는 것이지 무조건 채찍만 휘둘러 댄다고 해서 관객이 열광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겨 만든 억지 영화로는 공감을 얻지 못하기 마련이다.

어린시절에 영화를 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이야기’였다. 영화에서 얼마나 이야기 구조가 탄탄한가는 당연히 중요한 부분이 되겠지만.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영화가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될 때에는 이야기보다도, 물음의 무게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인디아나 존스’를 좋아하던 때에 비하면 한참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뭐, 그런 이유로 어렸을 때는 얼마나 잘 싸우고 얼마나 화려한 장면이 나오는가에 따라 재미있는 영화와 재미없는 영화를 나누곤 했었다. 말 그대로 영화의 미덕을 ‘재미’ 여부로 갈랐던 것이다. 그런 대목에서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성룡’이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우리 ‘성룡’어르신의 영화철학은 바로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인터뷰 기사를 보았을 땐 정말 감탄하며 새삼 ‘성룡’어르신에 대해 존경의 마음이 퐁퐁 샘솟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런데 ‘왜 ‘성룡’어르신의 영화는 내게 맞지 않는 것일까‘ 라는 점이다. 나는 아주 아주 어렸을 때부터 TV에서 반 강제적으로 ’성룡’어르신의 영화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나마 어렸을 때라도 무척 재미있다고 느꼈다는 향수에 젖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브루스 리’의 영화는 손에 땀을 쥐면서 본 주제에 안타깝게 ‘성룡’ 어르신의 영화만는 매번 기대와 의문이 교차했다. 뭔가 맞지 않았던 탓인게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렇다면 나는 과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인가?!’에 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면 조금 오싹해 지기도 하지만, 뭐 여튼 그렇다. 그런 것이니 ‘룡’어르신, 신경쓰시지 마세요. 노래를 듣다가 울컥해지는 순간이 있는 것 처럼, 영화를 보다가 울컥 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렇게 갑자기 자신의 지나온 시간과 감정에 휩싸여 그만 온통 세상이 뿌옇게 변해버는 순간이, 인생을 살다보면 한 번쯤은 오지 않나 싶다.

살다가 어느날 우연히 영화를 본다.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예기치 못한 이야기를. 그러다 문득 영화 속의 이야기가 자신의 외로움과 닮아 있음을 알게 되고 그만 눈 앞이 흐려진다. 촌스럽지만, 뭐 그런 이야기. 나의 경우에는 대표적으로 3편의 영화가 그랬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델마와 루이스’.

어떤 영화가 가장 인상 깊었느냐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번쯤 보고 생각하면 좋을 법한 영화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란 사람마다 다를테니, 굳이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재미’가 무엇보다 중요한 영화의 요소인 것 또한 불변의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3편의 영화는 내 인생에서 영화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워낭소리’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고도 울지 않았던, 메마른 감성의 나도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보고는 그만 울어버렸으니까.

사람은 눈 앞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 자신은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은 대부분 그렇다. 그러다보니 어려 보이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고 늙어 보이는 사람은 무시한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 처럼. 하지만,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있기 마련이고 누구에게나 노년 또한 찾아 온다. 이미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대한민국에서 지하철만 타 보아도 노년은 이미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듯이.

3편의 영화를 한 편 한 편 보고 나서, 중요한 것은 젊은가 늙은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혹은 부자인가 가난한가가 아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인생 그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과연 지금 외롭지 않은지 하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부서지고 쉽게 다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소중히 대하고 더욱 귀하게 보듬어야 하는데, 세상에는 스스로 사람의 가치를 포기해 버리고자 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속이고, 빼앗고, 짖밟고.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것이 인생이라고.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체념한 채 돌아서야만 하는 삶이 가끔은 참 서럽다. 법구경에 이르기를,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아라. 사랑하는 사람은 멀리 있어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가까이 있어 괴롭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아무런 마음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마음을 다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마음을 닫아 걸면, 결국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다치지는 않을까. 아직까지 놓지 못한 나의 화두는 늘 이것이었다. 법구경의 그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고.

산다는 것은 애달프다. 늘 외롭고 늘 슬프고 늘 아프다. 아니,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카스나 페북에 자신이 얼마나 화려하고 행복한지에 대해 모두들 강박적으로 사진들을 찍어 올리고들 있으니까. 하지만 생로병사 속에서 사람은 언제나 혼자다. 혼자인 것이 무서워서 사진들을 찍어 올리고들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나이가 들어도 엄마는 그립고, 비오는 날의 파전은 언제나 각별하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감정이 무뎌지는 것도 아니고 여자라고 해서 원래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못배우고 스팩이 떨어진다고 해서 주눅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그 마음이 애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 아주 단순한 사실을 마주하게 해 준 영화를 만난 나는, 3편의 영화가 끝난 뒤 혼자서 흐느껴 울었다. 왜 울었는지는 모른다. 가슴이 그저 저렸고, 향할 곳 없는 마음을 어찌할지 몰라 아마 울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에는 미운 마음도 있고 고운 마음도 있겠지. 시기하는 마음도 있고 갑질하고픈 아둔함도 있겠지. 나라고해서 나쁘지만 않은 것처럼, 다른 누군가도 착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알고 조금만 더 살피면 세상이, 조금은 달라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한 학생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면접이란게, 면접관하고의 기싸움에서 이기는게 중요하지 않나요?’ 그래서 난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기싸움에서 싸워서 이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면접이란 건, 면접관을 나에게 반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면접관과 싸우고 눌러 이겨서는 반하게 할 수 없고, 반하지 않고서는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테니까요.’

우리는 보이는 면만으로 서로를 외면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면에 대해서는 서로 얼마나 살펴 보았던가. 나는 자신의 사진을 찍지도 않고 인터넷에 나에 대해 올리지도 않는다. 보이는 것이 가끔은 눈을 멀게 할 때가 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면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사람과 삶의 입체감을 다르게 한다.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기 마련이고 세상엔 모르는 것 투성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세상이 그렇다 치더라도, 적어도 난 사랑을 믿고 돈에 웃기 위해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그 한 가지의 용기를 통해, 지금 눈 앞의 그대를 믿고 웃으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도, 보이지 않는 면의 입체감이 존재하는 세상은 분명 아름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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