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46) - 한여름 밤의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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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46) - 한여름 밤의 걷기
  • 차근욱
  • 승인 2015.06.1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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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솔찍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심각한 길치다. 대체로 알려진 상식에 따르면 남자는 지리감에 뛰어나도록 진화했고, 여자는 공감능력이 뛰어나도록 진화했다고들 하는데, 나는 어찌된 일인지 지리감과 전혀 상관없는 남자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공감능력이 탁월한 것도 아니면서 말이지.

지리감이 없을 경우 겪게 되는 불편은 생각보다 굉장히 크다. 남들은 2시간이면 가는 길을 8시간이 걸려 간 적도 있었고, 처음 가는 곳이라면 시행착오 없이 간다는 것은 사실 상상하기도 어렵다. 뭐, 처음 가는 길이라면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란 거의 모두 경험하고 가는 편이니까. 그러니 운전을 할 때면 필수적으로 네비게이션에 의지하기 마련인데, 네비게이션이 잘 가다가 만약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고 한다거나 현재 가고 있는 곳과 전혀 다른 엉뚱한 지역의 지도를 보여주기 시작할 때면 등 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라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네비게이션은 3D화면이 지원되는 화려한 최신기능 따위로는 발전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제발 길만이라도 제대로 알려주는 방향으로 충실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런 나도 어린 시절에는 한참을 잘 돌아다닌 덕에 동네의 골목이란 골목은 모두 잘 알았었다. 얼마나 동네 지리에 밝았는가 하면, 아버님께서 감탄을 하실 정도였달까. 나는 호기심이 많은 성격인지라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새로운 길을 마주치게 되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가보곤 했었다. 물론, 초등학교 시절에야 정해진 시간에 어딘가에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거나,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 없었기도 했던 터라 시간의 제약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던 덕분이겠지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시간에 쫓기기 시작했고 항상 가장 빠른 길만을 찾게 되었고 덕분에 새로운 길을 만나면 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면 내가 지리감이 없다는 것은 꼭 생래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같은 길을 몇 번이나 간다 해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역시 헤매기 마련인지라 나는 역시 지리감이 없구나 라며 낙담하기도 한다. 얼마나 지리감이 없길래? 라고 물으신다면, 군대에서 전역할 때까지 늘 가던 훈련장까지의 길이라던가 늘 가던 행군코스의 길을 결국 제대할 때까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고나 할까. 여자분들은 ‘그게 뭐?’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남자분들의 경우에는 이 대답을 듣고 나면, 대부분 폭소가 터지고 만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두 세 번만 가보면 기억하는 행군코스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심각할 정도여서 어의가 없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으니까.

군인이었을 때는 사실 후임병들을 보면서 그 점이 정말 신기했다. 난 몇 번이나 다녔어도 잘 모르는 길을 한 두 번 정도 밖엔 가보지 않은 친구들이 기억한다는 사실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익숙한 행군코스의 갈래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알지 못해 당황하고 있으면 어느쪽 방향으로 가면 된다고 알려주는 후임병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굉장한데!’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럼 그 친구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늘 가는 길이지 않습니까.’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곤 했었다. 난 정말 그 늘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는데도 말이지.

아이러니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지리감도 없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난 걷는 것을 좋아한다. 군대에서 가장 좋아했던 것도 행군이었는데, 다들 싫어하는 행군이 내겐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줄을 맞추어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 길을 잃어버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걷는 것은 실컷 할 수 있는데다 맞을 걱정까지 없으니 그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특히 군대에선 한 여름 밤에 밤새 행군을 하곤 했어서 그 여름 밤의 행군이 너무나 좋았다.

개인적으로, 이 무렵인 여름밤의 밤마실을 무척 좋아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안타깝게도 밤에 산책을 잘 하지 못했지만, 대학시절까지만 해도 정수형과 뻔질나게 걸어다니곤 했었다. 나보다 제법 나이가 많은 정수형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죽이 잘 맞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주 걷곤 했었는데, 어느 날인가에는 하루 종일 모르는 길을 한번 걸어보자, 라는 모토 아래에 아침 일찍 만나서 해가 질 때까지 걸었던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정도로 돌아다녔다면 서울의 지리를 잘 알법도 한데, 후후후 신기하게도 나는 서울의 지리를 잘 모른다. 그냥 길을 찾는 이를 따라다닌 한 명의 길치였다고나 할까.

걷는 것을 워낙 좋아해서 서울대부터 서울역까지 정도의 거리는 잘 걸어다니기도 했고, 한 번은 서울에서 청주까지 걸어가 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과천의 정부종합청사에 걸어가보려고 한 적도 있었고. 특히 도보 국토순례는 늘 어린시절부터의 로망이었음에도 안타깝게도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길을 알아야 걸어가지. 취지와 기백은 좋지만 늘 가다가 결국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번번히 실패한 것이다. 게다가 땅 끝까지 걷겠다며 호기롭게 표지판을 따라 걷다보면 고속도로 입구로 가기가 일쑤라서 좌절하기도 했었는데, 오기로 고속도로 갓길을 그냥 걸어가 볼까도 생각했지만 역시 그만 두었다. 왠지 교통사고로 죽을 것만 같아 겁이 났거든. 그렇다. 결국 나는 소심한 데다 겁까지 많은 심각한 길치인 것이다. 그래서 다른 분들의 블로그나 책에서 도보여행을 한 경험을 접할 때면 정말 정말 부러웠다. 저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길을 잘 찾아 걸어 갔을까? 싶어서.

어른이 된 이후로는 늘 시간에 쫓기게 되어 언제까지고 내키는대로 걸어본다는 일은 그야말로 사치스런 꿈이 되어버렸지만, 원고를 어느정도 마무리 한다거나 조금 한숨 돌리게 되는 늦은 밤 2~3시 무렵이면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여름 밤 달콤한 공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가끔 집을 나서는 경우가 있다. 그냥 휘적 휘적 근처 보라매 공원이나 관악산까지 걷다오곤 하는데, 그 순간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설레임 때문에 잠 잘 시간을 훌쩍 넘겨 걷다 들어오기도 한다. 예전에야 함께 걸을 정수형이 있었지만, 이젠 멀리 살고 있는 탓에 혼자서 걸어야 하지만 여름 밤의 걷기라면 혼자 걸어야 한다 하여도 그다지 불만은 없다. 따스한 공기 속에서 시원한 밤바람을 맞고 있노라면 뭔가 호젓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평소 내가 알던 세상과는 다른 고요한 모습에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서 좋다. 물론, 산 길에 가까이 갔을 무렵의 아카시아 향이나 나무 냄새는 정말 좋지만, 계절이 계절인지라 도심을 걷고 있노라면 느닷없이 엄습해 오는 쓰레기 냄새는 좀 무섭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내가 길치인 이유는 아마 어느 순간부터인가 낮선 길을 피하게 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낮선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 집을 나섰는데, 이제는 낮선 길을 피하기 위해서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낮선 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낮선 길을 걸으며 새로운 거리를 누비는 것은 굉장히 근사한 경험이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니까. 특히 조금은 재래식의 정겨운 동네를 걷고 있노라면 어린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신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가면서 자꾸 마음이 급해지는 탓인지 새로운 길, 낮선 길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빠르고 안전한 길만을 찾게 되었다. 누구나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두렵다. 하지만 길이란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가다가 조금 길을 잘못 들었다는 정도라면 돌아오면 그만이다. 부비트랩이 설치된 길이나 실족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길이라면 당연히 피해야 하겠지만, 누군가 갔던 길이고 돌아올 수 있는 길이라면 한 번쯤 다시금 모험을 할 가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익숙한 길만을 고집하니 갈 수 있는 곳이 없어지고 마음도 생각도 협소해진다. 어린시절에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자유롭게 생각하고 여유있게 꿈을 꿀 수 있었다. 아마 그렇기에 낮선 길에 과감히 발을 디딜 수 있었고 결국 길과 길을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랬기에 더욱 자유롭게 생각하고 꿈꿀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고, 처음이기에 서툴 수는 있지만, 그 서툰 한걸음 뒤에는 조금씩의 용기도 조금씩의 자신감도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붙는 것이 세상 이치이리라.

한 여름밤의 길을 걸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는 길치라고 해서, 그냥 길 찾기를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말자고. 길치니까 더 새로운 길로 가보고 모르는 길을 따라 모르는 곳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그렇기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아보자고. 길을 나서지 않았기에 길을 모르는 것 뿐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 보자고. 그까짓 시행착오 쯤이야 두려워하지 말자고. 그렇게 걷다보면 다시금 살풋한 꽃내음이 가득한 근사한 길을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아직도 도보 국토순례의 꿈을 꾼다. 굳이 LTE가 되는 스마트 기기가 아니더라도, 조금 촌스런 지도를 들고서라도 길 찾기에 조금은 용기를 내어 오솔길을 찾아서 내 두 발로 대한민국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보리라. 열린 마음으로 길을 두려워하지 않게끔 다시 어린 시절의 마음을 되찾는다면, 걸어서 땅끝까지 충분히 갈 수 있을 테니까. 혹시 아나? 내가 도보로 국토를 순례한 이야기를 어느 날엔가 연재하게 될지. 한 여름의 깊고 푸른 밤, 나는 그렇게 다시금 꿈을 꾸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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