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44) - 버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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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44) - 버거의 추억
  • 차근욱
  • 승인 2015.06.0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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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그 날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저녁 늦게 서울에 도착한 순간, 나는 버거를 향한 생각지도 못한 격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평소 햄버거를 그리 먹고 싶어 하지도 않을 뿐더러 패스트 푸드 자체를 멀리하고 있었던 터라, 이 느닷없는 충동은 조금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요즘 자꾸 배가 불러오더니... 혹시?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뭐, 그럴 일은 없겠지.

어른이 된 후, 어쩔 수 없이 버거를 먹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만든지 오래되어 소스에 축축해진 빵과 어딘가에 눌린 듯 찌그러진 패티는 입에 닿는 그 순간부터 햄버거 죽을 먹는 기분이 들어 끔찍했다. 성의 없는 직원과 성의 없는 버거의 앙상블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적어도 성의 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바램으로 햄버거를 멀리하게 되었다. 물론, 햄버거 자체의 문제는 아니겠지. 늘 문제는 사람이니까.

집 근처에 패스트 푸드점이 생긴 것을 본 것은 오래 되었지만, 정말 낮선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냥 무난한 버거를 하나 먹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치즈버거를 주문했다. 물론, 별 기대는 하지 않고.

지금 만들어야 하니 5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조금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음식을 만드는 데는 원래 시간이 걸리지 않던가? 그리고 보통의 패스트 푸드점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주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곤죽을 종이에 쌓아 포장한 햄버거를 내 놓을 뿐이지.

통 유리로 된 패스트 푸드점의 벽면을 보면서 밖을 응시하니 늦은 밤, 모두들 집에 서둘러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곧 집에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잠을 청하겠지. 가만... ‘저녁’? 과연 ‘저녁’이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없는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 그리고 거기에 익숙해져 무언가 하고 있지 않으면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우리. 위너와 루저인 상품으로 나누어 가치가 매겨지고 비판받아 피곤으로 예민해 짜증만을 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고 돌아보자니 과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학생시절에나 할 법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다. 치즈버거나 기다리는 주제에 그런 질문도 조금 사치스럽다고 느끼면서.

치즈버거는 5분보다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려서 나왔다. 그리곤 늘 그렇듯 소스와 김에 뭉개진 부분은 먹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종이포장을 여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지금 만든 햄버거가 있는 것이었다. 양상추가 그리 많이 들어간 것도 아니었고, 패티가 그리 두툼하지도 않았지만, 분명 햄버거 안에는 치즈가 들어있었고, 빵은 따뜻했다. 지금 만들었기에 소스와 열기에 빵이 곤죽이 되어 있지도 않았고, 바삭한 느낌의 패티가 고소한 향을 풍기며 빵에 끼워져 있었다.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입에 베어물자, 그야말로 ‘햄버거 맛’이 났다.

아, 치즈버거가 이런 맛이었구나...

난생처음 햄버거를 먹어보는 사람처럼, 왠지 ‘뭉클’했다. 사업을 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에이, 기껏 몇 천원짜리 빵에 넌 그럼 뭘 기대했는데?!’라고 짜증을 내실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날 내가 먹은 치즈버거는 흔히 시내에서 만나는 버거는 아니었다. 눅눅하고 불어터진 곤죽이 아니라, 정말 빵이 젖어있지 않은 뽀송뽀송한 빵에 노릇노릇 구워진 패티가 끼워져 있는 치즈버겨 였다. 물론, 양상추가 조금 넉넉히 들어있다면 더 맛있었겠지만, 그래, 말 그대로 단돈 2500원에 먹는 치즈버거에 너무 과한 기대가 아니냐며 짜증을 내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니 손톱만큼의 양상추는 그냥 눈감아주자.

그렇다고 그 치즈버거가 정말 굉장한 맛을 체험하게 해 주었다거나 엄청난 가성비를 자랑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 치즈버거는 그냥 ‘치즈버거’였을 뿐이었으니까. 아주 당연하고, 아주 평범한.

중·고등학교 시절엔 밤새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방학 때면 종종 그랬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는 주말이면, 밤새 밀린 시험공부를 하며 밤을 새기도 했다. 지금이야 하룻밤을 새는 것조차 피하고 싶어졌지만, 그 때는 밤새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뿌듯했고 내가 가치있는 사람같아 좋았다. 그렇게 밤을 새는 날이면 그간 모아놓은 용돈으로 햄버거를 2개쯤 사다 놓고 출출해질 시간을 기다리곤 했는데, 마치 마시멜로우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처럼 햄버거를 바라보면서 언제 먹을지 세워놓은 나름의 계획에 두근거리기도 했었다. 이만큼 공부를 하고 이만큼 책을 보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그 때 자주 가던 집 근처 수제 햄버거 집 사장 아주머니께서는 햄버거에 얇게 사과를 한 장 넣어 주셨다. 어려서 패스트 푸드 체인점은 너무 비싸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동네 분식점 수순인 수제 햄버거 집에 가곤 했었는데, 그 시절의 소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아무리 먹어도 더 먹을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그 집 햄버거는 중학생이라도 용돈으로 부담없이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였고 무엇보다 맛이 있었으니까. 그 사과를 넣은 햄버거를 처음부터 먹어왔기에 개인적으로는 익숙한 맛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햄버거란, 당연히 얇은 사과가 들어간 음식이었다. 그래서 유명 체인점 햄버거를 먹게 되었을 때는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나에게는 주문을 받고 능숙한 솜씨로 패티를 굽고 빵을 데워 끼운 뒤, 그 자리에서 양상추를 자르고 사과를 얇게 한 장 썰어 빵에 넣고는 케첩과 마요네즈를 뿌려 만든 다음, 자랑스런 표정으로 ‘여기있다’라고 웃으며 주시던 아주머니의 햄버거가 햄버거였던 것이다. 그런 나름의 정성과 자부심으로 만든 햄버거에 익숙했던 내게 유명 패스트 푸드점의 햄버거는, 뭔가 텅텅 비어있는 공갈빵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재료나 가격으로 본다면 그 싸구려 햄버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겠지만, 메마른 표정으로 건네지는 햄버거는 그래도 내게 뭔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무언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아마 정성의 차이였으리라고 생각한다. 패스트 푸드점이 꼭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햄버거 가게 아주머니에게 햄버거는 나름의 공이 들어간 요리였지만 대형 패스트 푸드점에서 만들어 내는 햄버거는 그냥 상품이라는 느낌이 차이랄까.

물론, 그 나이 때가 무엇이든 맛있는 나이였기에 맛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것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라면만 부셔먹어도 꿀맛이었던 때니까. 하지만 그래도 무표정한 얼굴로 햄버거를 미리 찍어 낸 뒤에 돈을 받고 그냥 건네주는 햄버거와 주문을 받고 바로 만들어 나름의 정성을 쏟은 버거의 맛에는 분명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음식은 정성이기도 하니까. 뭐, 그렇게 만들어서는 'Fast Food'란 이름도 손님의 주문도 소화해 낼 수 없다고 반박하신다면야 그렇다고 할 수 밖엔 없습니다만.

어쩌면 내가 먹은 그 치즈버거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소비자가 상품을 주문하면서 기대한 가장 기본적인 2500원짜리 치즈버거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기본을 만났을 때, 나는 감동하고 말았다. 어느새 돌아보니,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기본과 본분을 지키고 있지 않는 탓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이 사람은 내 주머니를 노리고 거짓말을 하고 있으려니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2500원짜리 치즈버거에서 2500원만큼의 정성을 마주했을 때 감동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젠 아무도 진심으로 자신의 할 역할 따위는 하고 있지 않으니까.

햄버거는 맛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제법 좋아했던 햄버거를, 난 어느 순간부터인가 곤죽이 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범벅이 그 이름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에 절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우연히 만난 그 2500원짜리 치즈버거는, 비록 사과 슬라이스는 없었다 할지라도 분명 기본에 충실한 내가 알던 버거였다.

공들여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배운대로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지역 체인점에서는 여전히 곤죽이 된 버거를 만난다. 하지만, 우연히 들른 집 근처 매장에서 만난, 기본을 지킨 그 햄버거가 난 너무 좋았기에 공들어 나도 정성껏 맛있게 먹었다.

사람들은 불평을 한다. 그리고 세상이 엉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엉망인 세상을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로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가. 기본을 얼마나 잊지 않고자 노력했고, 적어도 자신이 받는 혜택만큼의 기본에 부끄럽지 않고자 얼만큼의 정성을 들여왔던가. 치즈버거를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난 그런 생각을 했다. 난 과연 얼마나 원점에 충실하고 기본을 지키며 정성을 다하는가, 내 원칙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하고. 어쩌면 모두가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그 기본을, 그 패스트 푸드점의 아르바이트 학생은 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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