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40) - 이 순간, 반짝 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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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40) - 이 순간, 반짝 반짝
  • 차근욱
  • 승인 2015.05.0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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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어젯밤, 하드디스크 하나가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보통 하드디스크가 수명을 다 할 무렵에는 비퍼음이 2~3일 정도 나는지라 데이터를 옮길 기회라도 있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전조 증상조차 없었던터라 그냥 갑자기 아웃.

해당 하드디스크에서 데이터가 사라져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슬람 문화에 대한 자료들이다. 요즘은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 짬짬히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날아간 하드디스크에 이슬람 문명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두었었다.

나중에 좀 더 천천히 봐야지, 시간이 나면 나중에 봐야지 하다가 결국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어렵게 구한 자료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문명의 충돌이란 서로간의 이해부족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이슬람 문명을 공부해서 세계평화에 기여해 보려고 했건만. 이런 저런 이유로 데이터 손실로 인한 곤혹스러움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지만, 문득 예전에 책장을 보며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이사를 가야 할 때 가장 골치가 아픈 것은, 나의 경우 ‘책’이다. 정리하기도 힘들고 배치하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옮기기가 너무 너무 힘들다. 난 이 책이란 녀석이 징글 징글하게 많은 편이라, 예전에는 책을 둘 곳이 없어 탑처럼 쌓아놓고 살기도 했었다. 책 탑이 무너져 책에 깔려죽는 꿈도 간혹 꾸면서. 언젠가 한번은 이대로 도저히 못살겠다 싶어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책 무더기를 보다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죽기 전까지 이 책을 다시 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이 갖고 있는 책을 전부 읽고 읽고 또 읽는 것은 아니다. 선현들께서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고 하셨으니, 책 한권을 백번씩 읽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에서 연기가 나도록 많지만, 현실적으로 읽고 싶은 것은 많고 시간은 없으니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도 당연히 있기 마련이고 갖고 있지 않으면 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어찌되었던 사서 꼽아 놓고, 시선이 닿을 때마다 만족스러워 하는 책도 당연히 있기 마련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책들을 읽고 읽고 또 읽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

언제나 읽고 싶은 책은 또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책을 아무리 많이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한 권을 한 번 읽기도 벅찬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나는 책을 움켜쥐고 있는 것일까. 한번 읽은 책은 다시 읽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계속 끌어안은 채 못 버리는 것일까.

좀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결국은 집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책 한권 한권을 볼 때마다 그 책을 샀던 때의 기억이 떠올라, 추억을 간직한다는 느낌이 들어 책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갑자기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 있기도 하고, 어렸을 때에는 이해를 하지 못하다가 나이가 좀 들어가면서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책도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타임캡슐 같은 의미도 책에는 있다. 하지만 결국 소유욕이란 집착이 아니던가.

책만 그런 것은 아닐게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꾸만 갖고자 하는 마음도 결국은 마찬가지 아닐까. 나의 경우는 그것이 책이지만,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옷이 될 수도 있고 악세서리가 될 수도 있기에 추억이 담긴 something special을 버리지 못하곤 한다. 우리네 인생이란 어찌보면 늘 상실의 연속이기에, 그 허한 마음을 소소한 물건들로 채우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으고 움켜쥔 채 못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들로는 채울 수 없음에도.

음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었다.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고프기에 허한 자신을 채우려고 자꾸만 먹는다. 배가 불러 맛을 느낄 수 없으니 더 맛있는 것을 찾고 더 좋은 것을 찾는다. 하지만, 공허한 마음이란 음식으로 채울 수 없기에 몸은 망가지고 고통은 더해만 간다.

예전에 보았던 ‘고잉 마이 홈’이라는 드라마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극 중에서 대기업 회장 할아버지가 요정을 찾아보겠다는 광고회사의 기획에 몇 억엔을 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요정을 찾으면 자신도 소원을 하나만 빌 수 있게 해달라고. 자신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한 번만 만나보고 싶으니.

드라마라는 것을 알면서도, 몇 억엔을 들여서라도 이루고 싶었던 부자 할아버지의 소원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 졌다. 꼭 드라마 속의 이야기만은 아닐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노년의 회장님이 실존인물이라면, 자신이 나이가 들어서 어머니를 보고 싶다는 소원에 돈이 아깝지 않다고 말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아마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집에 한 번 가는 시간조차 일 때문에 아까웠을지도 모른다. 성공하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리고 세월이 지나고 나서는 돈이 자신을 채워주지도, 지위가 자신을 위로해 주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슬퍼졌을지도.

사람들은 잊혀진 것을 그리워한다.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도 하고. 그리고는 추억을 위해 잡동사니를 모은다. 여행지에 가서는 사진찍기에 몰두하고, 사진을 찍었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가족이 곁에 있을 때에는 함부로 대하면서도 가족이 멀리 떨어지면 만날 날을 기다린다. 곁에 있는 순간의 소중한 의미는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책 무더기를 앞에 두고 고민을 하며, 책은 읽는 것이지 갖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만 갖고자 하는 것인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미련과 집착 때문에 책을 선듯 다른 이에게도 주지 못하는 자신이 바보같았다. 한 권 한 권 책을 읽고 떠났던 여행의 아련함이나 새 책을 사서 두근거리며 책장을 펴던 그 순간은 이미 지나버렸는데, 아직 붙잡고만 싶어하는 자신의 미망이 애닯았다.

법정 스님의 ‘버리고 떠나기’는 선물받고서 가장 기뻤던 책 중의 하나이다. 내용은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을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그 제목의 울림은 아직도 성성하다. 인생이란 여행길이 그저 버리고 떠나는 과정일 뿐인데, 알면서도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조금은 씁쓸해질 때가 있다.

바로 읽지 않을 책이라면 사모으지 말고, 책을 샀다면 바로 읽자. 컴퓨터의 자료는 다운만 받지 말고 읽으면서 정리하자. 해야 할 일은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바로 바로 처리하자 라며 지내지만, 그래도 그저 소유하는 것에만 집착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며 온갖 잡동사니들을 사 모으지만, 그 덕분에 집은 엉망진창이 되어 결국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물건을 찾아서 쓸 수가 없게 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어 한 번에 한 가지씩만. 한 순간엔 그 순간에만 집중하고 살아 후회를 남기지 말자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붙잡고 억지로 모으려고 하지 말고 툴 툴 털며 그 순간을 후회없이 살아가자고.

최선을 다한다는 말처럼 조심스러운 말도 없다. 어찌보면 변명같고 어찌보면 각오같고. 그래서 그냥 최선으로 최고를 만들겠다, 라고 생각한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 최선이란 그저 게으름뱅이의 나약한 핑계에 지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최선을 다 한다는 것은, 그 순간을 있는 힘껏 살아간다는 말이 아닐까. 시간을 돌이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이상을 해낼 수는 없을만큼 사력을 다한다는 말이 아닐까.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간다면 후회가 남지 않을까. 공허가 남지 않을까. 하지만 그래도 후회도 공허도 상실도 있을게다. 그것이 인생이니까. 매 순간을 불꽃처럼 살아도 그런데 하물며, 그 순간을 흘려보내기만 하는 인생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난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저 그 순간을 깊이 간직하고자 애쓴다. 시간은 지나가는 법이니, 잊지 않고자 후회를 남기지 않고자 그저 그 순간을 살고자 애를 쓸 뿐이다. 이별의 인사는 짧게. 미련에 메이는 것은 싫다. 후회없이 집착없이, 매 순간 불꽃이 되어 빛나는 것이 좋다.

하드디스크에 담긴 자료는 모두 사라졌지만, 훌훌 털어버리기로 했다. 앞으로는 주어진 순간에 더욱 전념하며 살아가야지.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순간 순간 의미를 담아가며 살아가야지. 상실도 공허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인생의 모든 순간은 내 삶에서 단 한번 주어지는 오직 한번 뿐인 기회이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있는 힘껏 앞으로 나아가야지. 그렇게 이 순간을 반짝 반짝 빛내며 살아가야지. 눈부시게 빛나는 5월, 나는 그렇게 창 밖 하늘을 보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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