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38) -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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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38) - 비가 내린다.
  • 차근욱
  • 승인 2015.04.2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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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하늘이 어둑 어둑 하더니, 어느새 비가 내린다. 창 밖에 내리는 빗줄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법정 스님의 글이 떠올랐다. 후박나무 잎에 빗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가장 좋다고 하시던. 생각해보면, 빗소리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소리도 없더라. 내가 늘 그리운 소리는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파도소리, 귀뚜라미 소리 그리고 역시 빗소리.

빗소리는 소리도 소리이지만, 창가에 맺혀 흐르는 물방울들의 아름다움이 아련하다. 잊어버린 옛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그리곤 다시 후두둑, 후두득.

대학시절, 법정스님의 글을 읽고서 과연 후박나무 잎에 빗방울이 내리는 소리란 어떤 소리인지 궁금해, 후박나무를 찾아 두었다가 비가 오는 날을 기다려 끝내 그 소리를 나무 밑둥에 서서 들었던 적이 있었다. 소리는 생각보다 둔탁했다. 하지만 잎사귀에 내리치는 빗방울의 소리는 여운이 짙었다. 투명한 청량감이 귓가에 오래도록 남겨졌다. 툭, 하고 탁, 하고. 마치 풍경소리처럼.

어린 시절, 하굣길에 비가 올 때면 집으로 달려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비가 오는 날엔 산듯한 비 내음을 맡으며 빗소리를 노래삼아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좋아하는 만화책을 읽는 즐거움이 컸다. 그건, 분명 비를 만나는 날에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었다. 만화가 꼭 재미있지 않아도, 간식이 그리 대단치 않아도 행복했다. 게다가 어머님께서 맛있는 김치전이라도 해주신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꼭 부자가 아니어도, 사람은 그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진리를 나는 어린 시절에 비를 통해 배웠다.

어른이 되면서 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고,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빗소리와 함께 했던 행복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앞으로 달려보지만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은 날에는 그렇게 힘이 빠지고 지쳐, 그저 쉬고만 싶었다. 그런 날에 빗소리를 듣게 된다면, 문득 정신이 들기도 한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건가 싶어.

몇일 신세를 졌던 산사에서 비를 만난 적이 있다. 창오지 바른 여닺이 문을 활짝 열고서 툇마루에 앉았다. 후둑 후둑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바닥에 그려진 동그란 파동에 장난기가 동해 큰 우산을 펴고선 맨발로 처마 밑에 섰다. 우산에서는 탕, 탕, 하는 힘찬 빗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고, 맨발로 비 맞은 자갈을 밟아 걷는 촉감은 알싸한 박하사탕 맛이 났다. 긴 처마의 끝에서 끝까지, 질리지도 않고 한참을 걷다가 먼 산에 피어오르는 운무를 생각난 듯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앞으로의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하면서.

빗소리를 듣다보면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고마운 얼굴들도. 그리곤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 앞가림이 바빠 그립고 고마운 분들께 마음조차 전하지 못하고 지내왔구나 싶어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쩌면 철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한해 한해 지나갈수록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휴먼 네트워크 따위가 아니다. 그냥 한 명 한 명 소중한 게지. 험하고 무서운 세상살이, 어렵고 힘들 때 서로 돕고 의지할 가족과 친구가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그런지 비가 내리면 그리운 사람은 참 많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는 ‘혼자’가 ‘같이’ 보다 더 좋았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혼자 사색하는 일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면서 ‘함께’살아간다는 혜택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닫게 되곤 한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우리는 너무 빨리만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커피 한잔의 온기를 느끼며 창밖 너머 자신을 돌아본다. 물론, 살다보면 나쁜 사람도 만나고 바보같은 사람도 만난다. 하지만, 누구나 상황에 따라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되기 마련이다. 물론, 천성적으로 악한 사람도 있지만.

옛말에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인지라, 늘 사람조심이 세상사는 지혜 중에 으뜸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세상살이, 사람만한 위로도 없다. 그래서 나는 믿고 싶다. 거짓된 사람보다 진실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고, 악한 사람보다 선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라고. 그렇기에 소소하게 건내는 마음의 온기가, 비오는 날이면 새삼 참 절절하다.

비오는 날엔 기차를 타고 멀리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삶은 계란이랑 사이다랑 김밥을 챙겨서. 혼자는 싫으니까 온 가족이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기차를 보면 설레는 것은, 굳이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러 닿을 행복에 가슴이 부풀어서겠지. 마치, 꽃다발을 보고서 빙긋이 웃는 것처럼.

학창시절,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할 때에는 빗소리가 참 힘이 들었다. 책만 보며 집중해도 시간이 모자른 판국에,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잡념이 생겨 공부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애꿎은 친구만 닦달해 커피를 마시러 나가곤 했었다. 지금이야 혼자서도 커피 한잔에 창밖 보는 청승도 익숙해 졌지만, 학생시절에는 부끄럼이 남은 탓인지 혼자서 창문 앞에 서는 것이 그리 어색했었다. 감성이 돋기라도 할라치면, 그날 공부는 위태 위태 했었다. 책을 봐도 진도가 나가질 않았고 내용이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질 않아서 나쁜 머리만 탓을 했었다.

내리는 빗줄기를 보고 있노라면 울적해질 때도 있다. 맑은 햇살 아래서 파워워킹이라도 하고 있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가슴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자신의 탓만은 아니다. 비 탓도 아니고. 우리의 뇌는 비오는 날, 그런 식으로 조각모음을 한번 하는 것뿐이니까. 살다보면 슬럼프는 오기 마련이다. 인생 슬럼프이든 공부 슬럼프이든. 슬럼프일 때 비가 오는 것이나 비가 와서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자기발전도 없는 것만 같고 예전에는 잘 했었는데 이제는 잘하지도 못하는 것만 같은 날. 그럴 때면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지거나 초라하게만 느껴져 하찮은 존재 같기만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착한 마음 때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자신을 탓하거나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남의 탓을 할 뿐이지.

자신이 실망스러워 의기소침해 질 때는, 대범히도 조금은 무심해 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여 심하게 자책을 한다던가, 무엇이 되었든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니까. 정말 끝까지 버텨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다.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인지. 내가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오래 버티는 사람이 결국은 이긴다. 센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쎈 놈’이라고.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막연히 세월만 보내는 것이 아닌 열정을 다한 최선이 있다면, 그리고 그 최선이 비록 자신의 성에는 차지 않는다 할지라도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하루 하루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오래 버티기에서 이겨 끝내 뜻을 이룰 수 있다고.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오늘 무엇이라도 한 가지, 자신의 꿈을 위해 실천하는 것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나 수험생활을 하는 것이나 결국에는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생활은 하루 하루가 눈 앞에 닥친 소소한 시험일 때가 있고, 수험생활은 중요한 시험을 목전에 두고 하루 하루를 보낸다는 부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를 믿고 위기의 순간에도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태도일 게다. 굳이 결과를 생각하기 보다는 일단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는 생활태도로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는 지혜도 비오는 인생길에는 필요한 법이다.

공부가 업이고 강의가 일인 생활을 하고 있는 덕분에, 나에게도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거나 머리가 굳어버린 것만 같은 날은 당연히 있다. 그런 날에는 생각한다. 정해놓은 오늘의 분량을 소리 내서라도 그냥 읽고 다 읽었으면 마음 편하게 달리기라도 하러 나가자고. 굳이 긍정의 힘이라고까지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살다보니 알게 된 경험에 비추어보니 그까짓 슬럼프는 별것 아니었다. 자신은 우리 우주에서 딱 하나 뿐인 귀한 존재이니까, 초조해하기보다는 우직하게 자신을 소중히 여기면 되는 거다. 내일은 오늘과 또 다를 것이기 때문에.

한 두 방울 그치는가 싶더니 어느덧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다. 흐린 날이 있는가 하면, 맑은 날도 있는 법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잊곤 한다. 지금을 잘 넘기면 다음은 또 다르기 마련이다. 지금 비가 온다고 세상 끝 날까지 비가 오지는 않을 거라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왜일까, 자신의 인생에 비가 좀 왔다고 이젠 끝났다고 쉽게 실망해 버리는 마음은. 비가 오면 땅이 굳어지는 법이다.

인생, 어차피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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