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33)-밤 마실 좋은 날
상태바
차근욱의 'Radio Bebop'(33)-밤 마실 좋은 날
  • 차근욱
  • 승인 2015.03.11 11: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아주 예쁜 카페를 하나 알았으면 좋겠다. 잔잔한 재즈가 하루 종일 흘러나오는. 물론, 빅밴드도 좋구. 고성방가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조금은 수줍듯 조용조용 이야기 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창이 크고 볕이 잘 드는 카페였으면 좋겠다. 날씬한 노년의 마스터는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중저음의 근사한 목소리로 주문을 받으면 어울리겠지. 근처에 공원도 있으면 좋겠다. 카페에서 원고를 쓰다가 몸이 찌뿌드드해 지면 잠시 걸으면서 기분전환을 할 수 있게. 공원에는 새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 새벽 공원의 옅은 안개가 잘 어울리는, 그런 카페를 하나 알았으면 좋겠다.

아침에 출근하듯 기분 좋게 카페로 향한 뒤, 차분하게 앉아서 얼 그레이를 시켜 놓고 컴퓨터를 켠다. 깜빡거리는 커서는 여전히 고압적일 테지만, 그래도 근사한 음악에다 그럴듯한 얼 그레이를 한 잔 정도 앞에 두고 있다면 그 정도 뜨악함이야 이기지 못할 일도 아니다. 어디까지 썼더라... 가만히 손을 짚어 책장에서 책을 찾듯, 생각을 더듬는다. 컴퓨터를 켰으니, 이제 다시 글을 써야지.

 

푹신한 소파와 조금은 딱딱한 의자가 나누어져 있어서 원고 작업을 할 때에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을 때는 푹신한 소파에 앉을 수 있으면 좋겠다. 담배를 피워서는 안된다. 누군가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한다면 도무지 작업을 할 수 없을 테니. 아르바이트 하는 소녀의 동선은 콧노래가 나올 만큼 유쾌해서, 보고 있노라면 빙긋이 미소가 번지게 깔끔할꺼야. 물론, 급여는 조금 넉넉하게 주어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좋은 서비스란 기대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급여가 넉넉하다고 하더라도 프로의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곤란하다. 아르바이트라고 해도 자부심을 가질 정도의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좋으니까.

겨울인갑다며 지내다보니 어느샌가 바람에 달콤한 냄새가 묻어 온다. 아마도 어디선가 꽃이라도 피었나 보지. 밤이 되니 살풋한 내음이 몸을 감싼다. 한웅큼 공기를 삼키면 설레인다.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밤엔 걷는 편이 좋다. 노래를 부르며 걸어도 좋고 그냥 음악을 들으며 걸어도 좋다. 조금 부끄럼이 있다면 작은 문고본 한 권을 손에 들고 휘적 휘적 걷는 것도 좋다. 알았으면 좋겠을 카페까지, 천천히.

걷는 길에는 야채가게며 과일가게를 둘러 본다. 사람들이 흥정하는 모습이 정겹다. 빵가게나 떡집 앞은 빨리 지나야 한다. 크로와상의 냄새라도 맡게된다면 참지 못하고 들어갈지 모르니. 무심히 걷다보면 어느새 공원이 보이겠지. 나무 밑을 지나면서 옛 일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이맘때쯤 신입생이 되어서 한참 들뜨던 시절의. 그러면 그립기도 아쉽기도 해서 조금은 울적해 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걷는 게지.

아이들이 흐드러지게 웃는다. 지나가는 여고생들은 즐거워 보인다. 보드를 타고 있는 친구들은 사뭇 자유로워 보인다. 공원의 공기는 미세하게 겨울과 다르다. 같은 듯 다른, 겨울의 끝자락. 잠시 벤치에 앉는다. 벤치에 앉고 나서 목이 마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야에 보이는 수돗가에 가서 한껏 물을 마신다. 차갑고 시원한, 아직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일깨우는 물을 목젖이 얼얼할 때까지 마셨다. 저편에서 누군가 축구를 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공을 쫓으며 달리고 있다. 그 모습을, 벤치에 앉아 천천히 응시한다. 시간이 궁금했지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은 이 공기가 좋아서 순간을 보낼 뿐이므로.

가져온 문고본을 읽기에는 하늘이 어둡다. 책을 읽으려면 나만이 아는 카페에 가야한다.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카페에 가면, 향이 좋은 블루 마운틴을 주문해야지. 마주하고 책을 펼치면 마음이 편안해 지도록. 카페의 조명은 그리 환하지는 않지만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음악은 어느새 쳇 베이커로 바뀌어 있었고, 사람들은 많지 않다. 유리벽을 왼쪽에 둔 채로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는다. 편안한 의자의 미덕이란, 사람을 안정시킴으로. 이 카페는 24시간 하니까, 시간을 자꾸 확인하면서 나가야 할 때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나만이 아는 조용한 카페.

바쁘게 살아간다. 나도, 너도. 목적이 있는 사람도 있고, 목적이 없는 사람도 있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현실이 가혹해서 멀게만 느껴지는 꿈이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허허로운 사람보다는 축복받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축복. 한 곳만 바라보며 정신없이 달리다보면, 문득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있다.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럴 때면 반나절의 여유가 도움이 되기도 한다. 새싹이 올라오고, 나무에 물기가 차오르는 시절, 혼자서라도 걷고 바라보는 시간은 텅 비어있는 자신을 온전히 위로할 수 있는 순간이니까.

좋은 에세이라도 읽으면서 근사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날 저녁은 부자가 된다.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조근 조근 나눌 수 있는 친구와 함께 한 셈이니. 마음을 나누고 이해받을 수 있는 친구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그런 충만한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기적을 허락받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나를 채워주는 에세이라도 한권 만났다면,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인생은 스스로를 스스로가 채워가야 하는 낱말풀이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 말이 많으면 번잡하다. 핸드폰은 그래서 불편하다. 말이 그냥 말을 낳을 뿐이므로. 다들 조급증에, 자신의 불안을 이기지 못해서 전화로 닦달을 한다. 그렇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도.

초라하고 자신이 없어도 자신을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용기다. 용기 없는 사람은, 현실을 부정하기에 급급할 뿐이다. 지금까지 못했어도, 앞으로 잘하면 그만이다. 스스로 그렇게 자신을 믿어주고 지난 무게를 털어버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용기다.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지 자기 자신을 믿고 아끼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용기다. 봄날의 밤에는 걷는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행복이 내게 주어졌는지를, 가끔은 그렇게 스스로와 걸으며 돌아본다.

어느덧 나의 블루 마운틴이 내 앞에 놓여졌다. 가만히 그 검은 심연을 바라본다. 옅은 김이 올라와 온기를 전한다. 향이 산듯해서 조금은 개운한 기분. 시럽은 아주 약간만. 너무 쓴 것은 싫으니까.

살며시 테이블에 올려놓은 책. 오래된 책이지만, 읽지 않았다. 고전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 같아도, 결국은 읽기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오래 전에 나왔지만, 새로 만났다면 그냥 내겐 신간일 뿐이다.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래서 불안하다. 그 불안함은 사람을 막막하고 서럽게 한다. 사람은 평가로 소외당하여 결국은 외로이 홀로 남겨진다. 쓸쓸하게, 조금은 초라히 남은 스스로가 부끄럽고 창피할지 몰라도, 실망할 것은 없다. 영원한 강자는 없듯이, 영원한 패자도 없으니까. 안 풀리는 사람은 안 풀린다고들 하지만, 결국 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경험에 비추어 그렇다고 하여도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울 뿐이다. 내일은 원래 모르는 거니까. 지금부터 바꾸면 되는 거니까.

가만히 밖을 바라보다가 예전에 적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노력하는 것뿐이다.’라고. 나는 얼마나 노력했었나.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결과에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스스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에 부끄러워해야지. 무엇을 얼마나 노력했는지 돌아 봐야지. 꿈은, 꿈꾸는 자의 것이 아니라 시간의 정직함을 알고 있는 자들의 것이니까.

얽매임 없이 보낸 시간으로 자신을 채우고 커피잔을 놓는다. 이제 일어서서 카페를 나서야지. 창 너머 보이는 공원에, 어느덧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다들 돌아가 나름의 행복에 충실할 시간일지도 모른다.

문을 나섰다. 바람이 아련하다. 차갑지만 춥지 않은 바람. 올려다 본 하늘엔 가로등이 깜빡였다. 노란색 가로등 아래서 잠시 손바닥을 바라보다 주먹을 쥔다. 발을 내려다보니, 신발도 참 오래 신었네. 이윽코 한 발 내딛었다. 오늘은, 밤 마실 나가기 참 좋은 날.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