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범 변호사의 법정이야기(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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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범 변호사의 법정이야기(21)
  • 신종범
  • 승인 2015.02.13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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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식 소장(訴狀)

 

 

 
 

 

 

 

신종범 법무법인 더 펌(The Firm) 변호사

sjb629@hanmail.net
http://blog.naver.com/sjb629

어느 날 내 나이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A가 상담을 하러 왔다. 체격은 컸는데 인상이 참 순해 보였다. 누구의 소개로 왔냐고 하니 그냥 알아서 찾아왔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밝히기 싫은 사연이 있는 것이다. 차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A는 2년전쯤 결혼을 해서 살고 있는데 부부싸움 끝에 몇 주전 아내 B가 집을 나갔고 더 이상 함께 살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이혼을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A의 이야기로는 A와 B 모두 첫번째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재혼을 한 것인데 B가 처음에는 말도 잘 따라 주고, A가 전처 사이에서 난 아이에게도 잘 해 주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씀씀이가 헤퍼지고 아이를 대하는 태도도 변해 자주 다툼을 해 왔다고 한다.

A는 그래도 두 번째 결혼을 또 실패할 수 없다는 생각에 B에게 더 잘해 주려고 했지만 B는 예전처럼 말을 잘 듣지도 않았고, B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아이만을 감싸고 돌더니 끝내 집을 나가고 말았다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혼을 하겠다는 A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A가 말한 내용을 토대로 이혼소장을 작성했다. 이혼, 위자료 청구를 하면서 그 청구를 인용 받기 위해서는 B에게 혼인파탄의 책임이 있음을 적극적으로 주장, 입증해야 했다. A가 말한 내용을 가급적 법률적 용어로 가다듬고 민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혼원인이 B에게 있음을 명백히 하면서 소장을 작성했다. B가 참 나쁜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B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뚜렷한 것이 없었다. 이혼소송을 하다보면 서로 상대방에게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입증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을 여러번 느낀다. 가정안에서 둘 사이에 벌어진 일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A의 이혼청구 소장은 접수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B의 답변서가 송달되어 왔다. B는 A가 혼인 초기와는 달리 술을 자주 먹고 들어오고, 술을 먹고 들어올 때면 큰 소리로 자신을 타박했으며, A가 오히려 자신과 전 남편사이에 낳은 자식을 차별했다고 주장했다. 답변서를 본 A는 극도로 격앙되었다. 여느 이혼소송 진행과 같이 이 사건도 확인되지 않은 서로간의 상처받는 주장만이 난무한채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예정된 수순을 밟는 것 같았다. 조정기일에는 A, B 참석없이 대리인만이 참석한 채 별 성과없이 끝났다.

그러던 어느 날 A의 제안에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술도 곁들었다. 술이 어느정도 들어가자 A는 B와 재혼을 하면서 정말 잘 살아보고자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다며 또 다시 눈물을 보였다. A에게 B와 다시 관계를 회복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니 A는 너무 많이 와 버렸다고 하였지만 미련이 남아 있어 보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변론기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A에게 연락이 왔다.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B와 다시 재결합 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참 잘 되었다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당부의 말을 전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소송과 관련한 자료는 다 없애 버리고, 기억에서도 지워 버리라고 말해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소장도 좀 더 순화해서 쓸 것을, 송달온 답변서도 A에게 보여주지 말 것을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당시 A에게 소송을 의뢰받은 변호사로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 후 2014. 9. 1.부터 서울가정법원에서 ‘새로운 가사소송 모델’을 시범 실시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혼소장 등 소송서류 양식을 개선하여 이혼초기 단계부터 상호 비방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기존에는 A의 경우처럼 당사자가 소장에 자신의 감정과 파탄 사유를 자유롭게 기술하던 방식이었지만, 새로운 양식은 미리 유형화된 문항에 체크를 해 파탄 사유를 규격화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답변서도 원고의 청구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규격화된 문항에 체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조정기일 전까지 위와 같이 규격화된 소장이나 답변서를 제외한 다른 주장이 담긴 준비서면을 제출하지 못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새로운 가사소송 모델’ 시범실시 후 또 다른 이혼소송을 위임 받게 되었다. 위 모델에서 제시하고 있는 양식에 따라 소장을 작성하였다. 이혼 원인, 위자료, 재산분할, 양육에 관한 각 사항에 대하여 설문지를 작성하듯 해당하는 사항에 체크만 하면 되었다. 예전처럼 상대방에게 파탄의 책임을 묻기 위하여 입증하기도 어려운 사실을 장황하게 주장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소장 작성에 걸리는 시간도 많이 단축되었다. 예전에 작성했던 소장이 논술식 소장이었다면 새로운 모델에 의한 소장은 객관식 소장인 셈이다. 소장만을 놓고 보면 변호사로서는 부담이 크게 줄었다. 상대방 변호사도 새로운 모델에 의한 답변서를 보내 왔다. 원고가 제출한 소장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해당사항란에 체크만 해서 작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가사소송 모델에 의하면 이혼소송 초기에 쓸데없이 감정싸움을 하는 것을 상당부분 막을 수 있고, A의 경우처럼 이혼소송 도중 다시 화해를 하는 경우에도 그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이상 화해의 가능성이 없는 당사자들의 경우 소장이나 답변서에서 주장하였을 내용을 조정 기일 후 준비서면으로 주장함으로써 절차만 지연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다.

그리고 변호사로서 또 하나 심히(?) 우려되는 것은, 가사소송의 신모델처럼 객관식 소장이 다른 소송에도 일반화 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변호사란 직업이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제 언론기사도 로봇이 작성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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