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30)-며르치 구출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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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30)-며르치 구출작전
  • 차근욱
  • 승인 2015.02.1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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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그때 네센 도르마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작업에 실수를 기하지 않기 위해 쉼호흡을 다시 했다. 승부의 지점이었다. 손 끝에 온 신경을 모아 옅게 낀 곰팡이를 드러내고 멸치볶음의 속이 무사한지 확인했다. 멸치볶음의 안쪽은 양호했다. 불행중 다행이었다. 나는 비정상적으로 목이 타들어갔다. 시간이 없었다. 문득 시계를 봤다.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5분. 5분이 지나면 나는 수업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야 한다. 목이 바짝 마르는 듯 하여 침을 삼켰다. 나는 쇠젓가락을 이용해 가볍게 곰팡이 부분을 떼어내 멸치볶음 봉지에서 분리했다. 여기서 실수하면 그간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곰팡이를 멸치볶음 속으로 떨어뜨려 찾을 수 없게 된다면 모두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쇠젓가락이 위태롭다. 하지만 나는 집중했다.

 

떼어낸 곰팡이 부분을 신중하게 비닐봉지로 옮겼다. 이것으로 고비는 넘긴 듯 했다. 잠시 안도의 한 숨을 내쉬고 다음 작업으로 이어갔다. 이제 밀폐용기로 옮기는 일이다. 최대한 손실없이 멸치볶음을 살려야 한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여기서 실수하면, 한동안 맨밥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조심스럽게 밀폐용기로 멸치볶음을 옮겼다.

나의 서식지에는 냉기를 그닥 느낄 수 없는 냉장고가 존재한다. 아하, 기분 탓이겠지. 그래도 냉장고인데, 라고 생각하며 아직 쓰고 있다. 대형 냉장고로 바꾸고 싶지만, 공간이 마땅하지 않다. 대형 냉장고로 바꾼다면, 지금 냉장고 옆에 놓여있는 마이크로 웨이브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판단할 문제이다. 순간의 감상에 젖어 서식지의 생태계를 깨뜨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냉기를 잘 느낄 수 없는 냉장고 문에 달린 사람얼굴 닮은 브랜드 로고를 보며 생각한다. 냉장고도 천년 만년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구나.

냉장고에 냉기가 잘 돌지 않는 탓인지, 아니면 내가 음식을 너무 오래 방치한 탓인지는 몰라도 어머님께서 만들어 주셨던 견과류 멸치볶음의 이상조짐을 파악한 것은 어제 저녁이었다. 사실 늘 밖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살고있는 탓에, 집에서 식사를 해먹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설령 집에서 식사시간을 맞이한다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에 과일을 먹고 만다던가 아니면 커피 한잔으로 공복감을 달래고 넘어간다. 뭐, 그렇게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금방 나가서 또 일을 하다보면 식사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 살도 좀 빼야 하니까.

그리고 보니, 어머님께서 공들여 만드신 후 봉지에 밀봉해 주신 멸치볶음 3묶음을 본가에서 가져와 그냥 냉장고에 넣어두고 지금까지 잊고 지냈다. 존재 자체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잠자리에 누웠을 때 갑작스럽게 집에서 멸치볶음을 가져왔단 사실이 떠올랐고, 그 멸치볶음이 먹고 싶어졌다. 반찬 중에는 멸치볶음을 좋아하는 편이니까. 멸치볶음은 최고의 반찬 중 하나다. 적어도 비엔나 소세지 볶음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몸에도 좋고 밥반찬으로도 훨씬 깊은 맛이 있으니까. 게다가 장기보존도 문제없다. 이보다 더 전투식량에 어울리는 반찬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상황, 어떠한 작전에서도 멸치볶음만 있다면 안심이다. 밥은 정 급하면 햇반이 있으니까.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야채박스에 넣어둔 멸치볶음을 보는 순간, 무언가 이상했다. 살짝 하얀 느낌이었달까. 일단은 다시 그대로 야채박스에 넣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어머님께서 해 주신 멸치볶음은 보통의 멸치볶음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영양이 듬뿍 담겨있는 슈퍼파워 울트라급 멸치볶음이었다. 굳이 그 이유를 말하자면 일단 잣과 호두, 그리고 대추와 밤이 슬라이스되어 들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양파와 고추도 소고기 값보다 비싼 멸치와 함께 믹스되어 있다. 만드는 공정을 자세히 몰라서 그렇지, 대충봐도 느껴지는 이 압도적 비쥬얼에 또 다른 비밀재료가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멸치볶음에 이상징후가 발견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현실을 부정했다. 왜냐하면 경험상, 멸치볶음에 곰팡이가 끼는 것을 본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순간 나는 분노했다. 왜?! 어째서 내가 아껴 간직한 슈퍼파워 울트라 멸치볶음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여기서 이성을 잃는다고 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매사의 일이란, 감정적으로 대해선 안되는 것이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충분한 교육과 경험을 쌓아온 지성인이니까. 그리고 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곤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제는 ‘밤’이었다. 어머님께서는 아들의 영양상태를 걱정하셔서 ‘생밤’을 슬라이스해 멸치볶음에 넣어주셨다. 아마, 멸치볶음 세봉지를 모두 먹는데 그리 오래걸리지 않으리라 생각하셨던 탓이리라.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당장 멸치볶음을 먹지 않았고, 시간은 흘렀다. 돌아보니 밤은 쉽게 상했던 기억이 난다. 군밤을 이삼일만 방치해도 먹을 수 없게 되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 밤은, 상하기 쉬운 식재료였던 것이다.

밤은, 발견 즉시 모두 먹어치우지 않으면, 그 비싼 가격에 투자대비 만족을 찾을 수 없는 특징이 있다는 점을 나는 안다. 낭패였다. 너무 안일했다. 식재료는 항상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즉결처분했어야 했다. 특히, 더더군다나 녀석은 ‘밤’이었다. 난 혼자 주먹으로 무릎을 쳤다. 이제와서, 조금 하얗게 곰팡이가 살짝 생긴 이 멸치볶음 세봉지를 전부 버릴 수는 없었다. 봉지조차 열지 않은, 그야말로 순수 그 자체의 멸치볶음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미 멸치볶음은 김이 피어오르며 갓 만들어진 시절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것일까.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래, 진정하자. 여기서 무너지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나는 이보다 더한 위기도 헤쳐오지 않았던가. 문득, 카레와 현미와 진미채볶음 사태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여 결국 모두를 구해내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다. 난, 이정도의 위기에 흔들릴 남자가 아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김이 오르는 음식의 경우, 식혀서 보관하지 않으면 몇 시간만에도 쉬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카레의 경우가 그랬는데, 식히지 않고 뚜껑을 덮어두는 바람에 공들여 만든 버섯카레가 다음날 모두 쉬었던 적이 있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똑똑한 이웃인 네이버는 모르는 것이 없으니 분명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해서 ‘쉰카레 요리법’을 검색해 봤었다. 하지만, 네이버에서는 어느 누구도 쉰카레를 살리는 법을 알고 있지 않았고 모두들 버리라고만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내 무릎까지 오는 높이의 솥에 잔뜩 끓여 놓은 카레를 모두 버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난 생각했다. 정답은 없어도 방법은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마침내, 나는 방법을 찾았다. 바로 ‘하이라이스’였다. 하이라이스는 원래 새콤 달콤하게 먹는 요리다. 따라서 쉰카레에 하이라이스 분말을 넣어 새롭게 요리한다면, 카레로는 먹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이라이스로는 훌륭한 요리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즉시 하이라이스 분말을 사와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성공한다면 난 하이라이스를 배터지게 먹을 수 있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카레와 하이라이스 모두 매몰비용이 되고 만다.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새롭게 하이라이스로 거듭난 나의 카레를 먹었을 때, 어디선가 종이 울렸다. 그렇다. 결과는 너무나 맛있는 하이라이스의 탄생이었다. 성공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사놓은 현미에 쌀벌레가 보였던 사태도 있었다. 처음에는 밥에 잡곡이 들어갔나 했다가, 그것의 실체를 알게 되고서 난 경악했다. 엄청난 쇼크였다.

부랴부랴 마늘을 쌀통에 넣었지만, 막상 밥을 지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마음같아서는 다 갖다가 버리고 싶었지만, 북녂동포들은 진흙도 개어 먹는다는 판국에 그렇게 천인공노할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역시 오랜 친구인 네이버를 찾았다. 네이버는 모르는 것이 없으리라 믿고. 하지만 검색결과는 배신이었다.

‘쌀벌레’와 관련된 검색을 하니, 해결방법으로 검색된 것은 ‘남편을 이용하세요. 쌀벌레를 모두 잡아 달라고 한 뒤에 밥을 하시면 됩니다’라는 충격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군... 나는 순간 직감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의 현실을. 다행이다. 정녕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아직 자유민이다. 나는 자유민으로 살다 자유민으로 죽을테다, 하고.

고독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는 온갖 방법을 모색하다가 결국 밀도의 차이를 이용한 해결방안을 찾아내었다. 밀도는 질량/부피로 나타낼 수 있으며, 물론 온도가 올라가면 밀도는 감소한다. 후후후, 이것을 응용한다면 수압을 강하게 해서 쌀에 찬물을 틀어 놓으면 떠오르는 물질이 있고, 그 중에는 쌀벌레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떠올렸다.

쌀을 씻기 전에 먼저 강한 수압으로 쌀벌레와 가벼운 쌀들을 물에 떠오르게 해서 행구어 버리기를 3~4회하면, 따로 쌀벌레를 잡지 않아도 깨끗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지혜를, 나는 깨우치고 말았던 것이다. 진미채볶음 사태는... 아니, 그만두자.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멸치볶음 곰팡이와의 사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중요하다.

정밀진단한 결과, 멸치볶음의 겉면에 살짝 나타나기 시작한 곰팡이는 아주 극소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속까지 곰팡이의 전이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변이가 시작된 멸치볶음의 상피조직을 절제하는 것으로 현재상태에서 멸치볶음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물론 이후의 상태는 장담할 수 없으므로, 가능한 빨리 멸치볶음을 먹어야 한다. 위기는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으므로.

시술은 성공적이었다. 멸치볶음은 다시 처음처럼 맑고 깨끗한 모습으로 밀폐용기로 옮겨졌다. 하지만 나의 냉장고는 믿을 수 없다. 도전은 어쩌면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파바로티는 이어서 ‘별은 빛나건만’을 부르고 있었다. 밥을 했다. 많이 했다. 오늘 저녁부터 속도전이다. 아... 드디어 시간과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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