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시험 필수과목 전략적으로 마스터하기-한국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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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시험 필수과목 전략적으로 마스터하기-한국사(5)
  • 법률저널
  • 승인 2014.12.2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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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하지 않은, fun한 인물 한국사

왜 송시열인가?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한국사 전공자가 논문 쓰기를 기피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흥미진진하지만 기록이 너무 없어 쓰고 싶어도 못 쓰는 경우이거나 반대로 남아 있는 관련 저서나 기록이 너무 많아 소위 엄두가 안 나는 경우이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유형인데,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를 검색하면 약 3천 번이 검색된다.

인조, 효종, 현종을 거쳐 숙종 대에 사사되기까지, 그는 조선 시대 정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이황도 이이도 이자(李子)가 되지 못했지만, 송시열은 ‘송자(宋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조선을 ‘송시열의 나라’로 만든 인물이었다.

북벌은 꿈이었는가?

그를 가장 곁에 두고자 한 왕은 효종(조선 제17대 왕, 재위 1649∼1659)이었다. 효종은 봉림대군이었던 시절 스승으로 인연을 맺은 그를 정계에 가까이 두고 싶어 했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에서 인질 생활을 경험한 효종은 즉위 후 그 치욕을 씻고자 북벌의 기치를 높이 들었는데, 송시열 역시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북벌이야말로 조선의 대의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효종과 송시열에게 중국의 주인은 오랑캐(청)가 아니라 명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청나라는 이미 강성했고, 조선은 청을 정벌할 수 없었다. 송시열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뿐인 북벌론’을 그와 그가 속한 서인의 정치적 명분으로 삼아 집권의 정당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주자도통론

사상적으로 그는 주자(朱子)의 성리학이 율곡 이이에 의해 꽃피워졌고, 자신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즉, 주자 정통의 계보가 자신에게 이어졌다는 주자도통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는 자는 가차 없이 사문난적으로 몰아 성리학을 절대화, 교조화하였다.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린 대표적인 학자는 주자학의 교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해석을 한 윤휴(尹鑴, 1617~1680)였다.

“나의 저술 의도는 주자의 해석과 다른 이설(異說)을 내놓으려는 데 있다기보다 몇 가지 의문점을 기록하려는 데 있다. …… 송시열이 나의 학문을 이단이라고 배척했다. 송시열의 학문은, 주자의 가르침이라면 덮어놓고 논의를 용납하지 않으니, 주자를 존경하여 따른다 하더라도 이 어찌 진실로 체득했다 할 수 있겠는가?”

‘북벌의 꿈’이 그가 쥔 정치적 명분이었다면, 주자 중심의 ‘성리학’은 그의 사상적 명분이자, 전(全) 인생의 지지기반이었던 것 같다. 의문점도 용납하지 않았던 그에게 주자의 성리학 외의 학문은 모두 이단이었다.

정치적 부침(浮沈)

효종의 권유로 정계에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낸 그였지만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효종이 죽자, 그는 화양동으로 은거,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화양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에 그는 우의정에 오르기도 했으나 갑인예송(1674, 현종 15년)으로 서인이 실각하면서 함께 유배되었다.

서인의 영수로서 예를 그르친 죄를 이유로 파직, 삭출된 것이다.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석방되어 중앙 정계에 복귀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결국, 장희빈의 아들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반대하다 제주도로 유배,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기사환국). 그의 나이 83세였고, 조선을 호령하던 대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우암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관련 기출 문항>

18세기 조선 사상계의 동향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009 국가직 9급

① 북학사상은 인물성동론을 철학적 기초로 하였다.

② 낙론은 대의명분을 강조한 북벌론으로 발전되어 갔다.

③ 인물성이론은 대체로 충청도지역 노론학자들이 주장했다.

④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만동묘를 세워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냈다.

[정답] ②

[해설] 낙론은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여 북학론으로 발전되었다.

[오답풀이] ④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건립한 것으로,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기 위해 만든 사당이다. 송시열은 오랑캐 나라인 청을 정벌하는 것(북벌)이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의 원수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 만동묘

자료제공: KG패스원 공무원 전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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