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오래도록 말없이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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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오래도록 말없이 가만히...’
  • 이동근
  • 승인 2014.12.19 12:4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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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근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그는 해방 후 이듬해인 1946년 황해도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이던 여섯 살 때 어머니, 누나와 같이 군산으로 피난했다. 아버지와 나머지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식모살이를 했다. 그가 여덟 살 때 어머니와 누나가 사망했다. 그는 열여덟 살까지 종로와 송탄에서 동냥과 구두닦이 하면서 생활했다. 그 후 건설현장에서 일용노동을 했다. 서른두 살 무렵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1남 1녀를 낳았다. 2011년 극심한 경제난으로 이혼하면서 그동안 노동일 하여 마련한 유일한 재산인 15평 빌라를 처 앞으로 넘겨주고 가족과 헤어졌다.

그는 1998년 쉰두 살 때 건설회사에서 비계공으로 일하다가 추락하여 허리와 골반을 다쳤다.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에 일당 12만 원을 5만 원으로 신고해놓고도 산재로 처리하지 않고 교통사고로 처리하였다. 무학이라 글도 몰랐고, 회사에서 알아서 했거니 했다. 보험회사는 교통사고가 아니라고 하면서 병원비를 지불하지 않았고, 결국 그의 돈으로 수술 받고 보험회사와 1,000만 원에 합의했다. 2001년도에 장애6급 판정 받았고, 지금은 지체장애 4급이다. 현재도 목발에 의지하여 걷는다.

그는 뒤늦게 회사가 신고를 그렇게 하는 바람에 연금을 적게 받게 된 것을 알고 청와대, 감사원에 바로잡아 달라고 민원을 제기했다. 검찰에 사문서위조로 고소도 했다. 민원은 모두 검찰로 보내졌고, 검찰은 고소든 민원이든 시효가 지났다고 각하했다. 고소하고 나서 검찰청에 출석해서 자신을 잡아가지 않으면 회사에 불 지르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잡아가지 않았다. 몸이 아파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생활이 곤궁해져서 가족과도 헤어졌는데, 처지를 생각하니 국가가 자신처럼 힘이 없는 사람을 무시한다고 여겨졌다. 자살할까 하다가 억울해서 페트병에 휘발유 담고 회사 화단에 갖다놓았다. 그러나 차마 불 지를 수 없었다. 두 달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2013. 4. 17. 새벽에 회사 건물 주차장으로 갔다. 생활정보지를 주차장 근처 화단 잔디 위에 놓고 그 위에 경유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갑자기 겁도 나고 걱정도 되어 건물 옆에 숨어서 지켜봤다. 경비원이 달려와 불 끄는 것을 보고 달아났다.

그 후 그는 포천 기도원으로 들어가 화장실 청소를 해주며 살았다. 어느 날 경찰이 찾아 왔다. 내일 출석하겠다고 하고 다음날 경찰서로 가서 다 자백했다. 포천 기도원은 방세는 싸지만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서, 2014. 1.부터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갔다. 기초생활수급자여서 장애연금 포함하여 월 15만 원 받는데, 방세 월 25만 원을 낼 수 없어서 고시원 청소를 대신 해주는 것으로 월세 면제받았다. 매일 아침은 거르고 정상인이면 30분 걸리는 거리를 2시간 동안 목발 짚고 근처 절에 가서 점심 얻어먹고 남은 밥과 반찬을 싸 가지고 저녁을 해결한다. 일요일은 동네 교회에 가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한다. 오산역에 가면 공짜로 점심을 주는 곳이 있어 가끔 가는데, 전철은 무료지만 버스는 돈을 내야 해서 서울대입구역까지 1시간 30분 동안 목발 짚고 가서 전철 타고 점심 얻어먹으러 가기도 한다.

그는 범행 이후 계속 후회했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데, 왜 그랬을까 하고 자책했다. 경찰이 오기 전에는 언제 잡으러 올까 하고 겁났고, 괴롭고 힘들었다. 불 지를 때는 까짓것 교도소에 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재판 받으러 갔다. 판사가 일반물건방화죄에는 벌금형이 없고 징역형 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서 피해정도나 회사 입장 등 양형요소에 관한 조사를 하겠다고 했다. 며칠 후 다시 법원에 갔다. 판사 말이, 잔디가 조금 죽었고, 나무가 불에 약간 그슬리는 정도의 피해가 발생했고, 수리비로 6만 원 정도 들었단다. 회사는 그의 처벌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다만 잘못을 빌고 다시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는 선처를 바라는 것으로 해줄 수는 있다고 했단다. 그는 판사에게 그런 짓을 해놓고 뻔뻔스럽게 회사에 찾아간다는 것이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래도 조만간 회사에 찾아가서 사과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판결 선고하기 전에 회사에 찾아가서 사과했다.

판결 선고를 받으러 법원에 갔다. 판사가 ‘선고유예’라고 했다. 그는 선고유예가 정확히 뭔지 몰랐다. 선고하면서 판사가 그의 지나온 삶을 얘기하는데, 눈물이 흘렀다. 그는 왜 눈물 나는지는 몰랐다. 한참을 서 있다가 선고 끝나고 나서 방청석에 가서 앉았다. 다른 사건들에 대한 선고가 계속 이어졌다.

그는 오래도록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 소통광장 법원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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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민 2014-12-23 09:59:48
잘읽고갑니다.. 씁쓸하네요..

하재민 2014-12-23 09:59:48
잘읽고갑니다..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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